알기 쉬운 성경 말씀

어느 날 들려 온 소식

chukang 2012. 6. 15. 14:08

어느 날 들려 온 소식 누가복음 17:11-19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편리해 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과학 기술이 뒷받침 되어 의학도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이전 같으면 죽을병도 살려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현대에서도 왜 그렇게 치명적인 병들이 많은지요. 이름도 생소한 처음 듣는 병명들이 참 많습니다. 이전에는 무슨 병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가 있어서 더 많은 병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각 시대마다 대표하는 불치병과 혐오하는 병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대표적인 불치병이며 혐오하는 병은 문둥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이 문둥병은 기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한센병, 한센씨병 혹은 나병이라고 부르는데 전염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환자들은 격리하여 살도록 하였습니다. 저주의 상징이기도 한 문둥병 환자들은 죄인 취급을 받아 마을과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나 동굴과 같은 곳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지만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어느 날 한 가지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식은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한 줄기 빛이 비춰오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소망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소식을 들었기에 그들이 이토록 흥분하였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마을로 오고 계신다는 것을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 하고 그들의 문둥병과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들은 일찍부터 마을 어귀에 나가서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비록 문둥병자였지만 귀로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전해 들었습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온갖 질병을 모두 고치는 분이신 것을 듣고 있었습다.   그냥 듣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간절한 소망을 이룰 소식이 들여 온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대로 여행도 다닐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행을 다닌다고 해도 숙식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더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이 더럽고 추한 문둥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을 어귀까지 나온 문둥병자는 모두 열 명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로 들어가시기 전에 크게 외쳐 불렀습니다. “예수 선생이여!” 왜 불렀을까요? 자신들이 이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문둥병을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까! 죽을 죄를 지었어도 용서해 주시는 참으로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해서 문둥병에 걸렸느냐? 무슨 죄를 지었느냐? 이런 질문을 일절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율법에 문둥병이 나았을 때에는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외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을 이미 고쳐주셨기 때문에 다 나았으니, 가서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으라는 뜻입니다.(레 13:13) 할렐루야!

  이들이 그 뜻을 다 알아 차렸습니다.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서로서로의 몸을 살펴보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나은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소망은 그 소망이 어떤 것이라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모두들 마을로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서 자신들이 병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받고 보통 사람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 한 사람은 예수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시며,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그 한 사람에게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은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1. 은혜를 받은 자는 많으나 감사하는 자는 적다.

  나음을 받은 열 명은 모두 문둥병자였고 그들은 다 똑같이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다가 나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펄쩍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너무나 기쁘고, 빨리 제사장에게 자신을 보이기 위하여 뛰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주님께 돌아와 발아래 엎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원리와 연관이 있을까요? 열 명 중에 한 사람 단 한 사람을 통해서 감사의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받은 은혜 열 중에 하나라도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하였을까? 우리들은 정말 많은 은혜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은혜를 받고 있는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성도도 참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세상 속에서는 은혜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좋다고 말해야 할 정도입니다. 열 사람이 은혜를 받아도 겨우 한 사람 정도가 감사를 할 줄 알고, 열 번 은혜를 받고 한 번 정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도 믿음이 좋다고 인정을 받을 정도의 그런 불신앙과 감사가 없는 신앙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아우성을 칩니다. 내 고통에는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즉각적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받은바 은혜에는 무덤덤합니다. 무감동합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는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19) 이렇게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데, 받은바 은혜도 모르고 감사하지 못하는 이런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원하지 않은 선택’(Second Choice)이라는 책에서 다니엘은 원하지 않은 선택의 삶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전쟁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곳은 다니엘이 살고 싶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문화, 종교, 음식, 언어, 교육 모두 원하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의 생활 속에서 다니엘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은 오직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죽을 줄을 알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난 창 아래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 때에 반드시 큰 복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적들의 모함 속에서 사자 굴에 던져졌어도 살아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복을 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2. 타성에 젖은 자는 감사하지 않는다.

  열 명의 문둥이 가운데 아홉 명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돌아와 엎드려 감사한 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개와 같이 여기던 사마리아인만이 감사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는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문둥병자들까지도 그 신앙이 병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은 병이 들어 있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하면서 남을 정죄하는 데에는 우두머리들이었던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기는 하였으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앞세운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우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만들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관계없이 모든 것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정죄를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율법에 얽매어 있던 불쌍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율법이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대신 지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민감해야 할 오래 믿은 성도들이 타성에 젖어서 초신자보다 더 감사할 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믿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늘 회개하는 마음만이 처음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은혜를 받아도 감사할 줄 아는 처음 사랑의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다니엘은 처음과 나중이 꼭 같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고 오직 채소만을 먹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얼굴빛이 더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지키는 다니엘과 친구들의 지혜와 총명을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보다 열 배나 뛰어나게 하셨습니다(단 1:20). 그리고 모든 이상과 몽조까지 깨달아 알게 해 주셨습니다(단 1:17).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총리에 올렸습니다(단 2:48-49). 그의 친구들도 다니엘의 청으로 각각 지역을 다스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후에 벨사살 왕 때에도(단 5:29), 그리고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오 왕 때에도 총리를 쓰임을 받았습니다(단 6:2). 어떻게 하면 다니엘처럼 범사에 감사하며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주어진 현실을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다니엘은 왕족이거나 아니면 귀족의 자손이었습니다(단 1:3). 그런데 본인이 원치 않는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이 과거에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그 나라는 귀신을 좇는 우상의 나라요, 마법과 점성술이 성행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제공하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과 문화를 배웠습니다(단 1:4). 바벨론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온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을 이해하고 끌어안아야 한다고 해서, 우상의 문화까지 끌어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현실에 타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배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 오직 말씀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고 오직 채소만 먹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상황이 다니엘처럼 최악의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해 있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상황을 아뢰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힘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조건을 초월한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 속에서 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감사하는 자는 더 큰 은혜를 받는다.

  문둥병을 치료 받고 돌아와 주님 앞에 엎드린 단 한 명의 사마리아인에게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9절) 이 감사할 줄 아는 사마리아인은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건강한 몸으로 살던지, 병든 몸으로 살던지, 장수를 하든지 아니면 일찍 죽던지 간에 일단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은 정해진 일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천국의 삶과 지옥의 삶이 영원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인가 아니면, 지옥 불에서 죽지도 못하고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인가는 믿음으로 결정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사마리아인에게 하신 말씀을 통하여 볼 때에 믿음이 있는 자가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감사도 할 줄 모릅니다. 즉 감사라는 것은 믿음의 외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반드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도 기도할 때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하였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말에 ‘부자는 감사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불평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중에 누가 부자가 될 확률이 높을지 모를 사람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한 집 자식이거나 북쪽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처한 환경에 대하여 좌절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다니엘처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적응해 나갔습니다. 내가 부잣집에서 태어났는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일찍 깨닫게 된 것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재물을 잃은 사람은 건강을 잃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다쳐서 장애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잃지 않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고 불평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세상 사람들도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귀중히 여기는데, 하물며 천하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온갖 재능을 다 심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빌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재능을 꺼내서 쓰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며,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잠 9:10)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내게 재능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나는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과 비교해 상대적인 빈곤감에서 스스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돈의 적고 많음이 인생의 성공 여부가 아니고, 건강하고 연약하고가 성공의 여부도 아닙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건강이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골 여자 택시 기사는 하루 15시간을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일하면서도 7,8십만 원 밖에 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어떻게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다 쓰고도 모자랄 금액이지만, 저는 이 돈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게 쓰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노예처럼 비굴하게 사는 것도 비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처지를 비관하고 좌절한다면 인생은 실패작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목적지를 잃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이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여덟 번 일어나느니라”(잠 24:16)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무리 되고 싶다고 발버둥을 쳐도 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롬 8:39)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내 자신과 싸워서 이기고, 세상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존재라도, 그 어떤 상황이라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이 부족하여 스스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들고 실패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내 믿음이 부족한 탓이요, 감사가 없는 탓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자에게 마귀는 그 마음속으로 침투하여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 조건 속에 있습니까? 그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의 지혜를 빌리는 사람은 멋진 삶을 살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해가 될 것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나쁜 조건을 일찍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날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앞날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대로와 같이 활짝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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