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담할 수 있을까? 마태복음 23:29-36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 일이 불가능함을 강조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장담입니다. 이 속담의 정확한 뜻은, 손바닥에 ‘된장, 혹은 간장’을 놓고 지진다는 뜻입니다. 지진다는 말은 물을 적게 넣고 걸쭉하게 끓인다는 뜻입니다. 손바닥에서 된장, 혹은 간장을 끓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밑에서 불을 때야 합니다. 손바닥 밑은 손등이 될 것입니다. 손바닥에 장을 끓게 하려면 불을 지펴서 때야 하고, 장이 끓을 정도가 되려면 그 손 자체가 없어지고 말지도 모를 일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이런 고통을 감수할 정도로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호언장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호언장담’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상반된 견해가 등장을 합니다. 한 편에서는 ‘천국이 나의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아니다 너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들은 지식도 매우 깊고 많다고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존경도 받고 있고, 가르치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장담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당장의 권세로 볼 때에 어느 편이 더 타당하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임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와 지혜를 사용하여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왕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제사장들과 함께 계략을 꾸며서 반대편 입장에 서 있는 단 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눈엣가시와 같던 사람을 죽였으니 마음 놓고 자신들이 가진 소신을 펼쳐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바리새인들이 호언장담한 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겉보기에만 이루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던 그 반대편 입장의 사람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바리새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장담대로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셨습니다. 이 호언장담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는 전혀 그 격과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우리 속담대로 ‘손바닥에 장을 지지게 된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손바닥에 국한되지 않고 온 몸에 장을 지지는 결코 꺼지지 않는 불타는 지옥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마 3:12;막 9:43, 48;눅 3:17)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까? 구원 받은 것을 믿습니까?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키기 때문입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착하게 살기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볼 때에는 도와주기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 중에 ‘외식하는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못난 자가 잘난 체하는 것입니다. 잘난 체를 하다 보니 정말 잘난 줄로 착각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착각 속에서 겉모습을 꾸미기 때문에 계속 못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외식이라는 말이 종교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단어 이상으로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종교적 외식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여 결국 경제적, 신분적 이득을 노리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처럼 막달라 마리아가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였다고 책망을 하지 않았습니까? 외적으로 볼 때에는 유다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믿음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팔아서 자신의 돈으로 만들어 유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은 물론이고 하나님까지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하심과 영광을 이 땅의 것과 바꾸려고 하는 사악하며 어리석은 탐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외식적인 모습은 성경 시대에는 물론이고 이천 년 교회사를 통하여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내 자신은 외식을 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외식자의 모습에 끌려서 속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13절부터 36절 사이에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경고가 무려 7가지나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경고는 13절입니다.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획책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의로운 분노를 발하고 계십니다. ‘화 있을진저!’ 이 말은 단순한 분노의 표현을 넘어서 자신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엄숙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15절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 죄는 자신만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죄보다 더 중대한 것입니다. ‘바다와 유지를 두루 다니다’ 이 말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할 정도로 전도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교리를 전파하여 교인을 만들려고 하는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너희보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이처럼 악한 동기에서 비롯된 바리새인들의 전도를 받아 개종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형식주의자가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청출어람 청어람, 빙수위지이한어수.(靑出於藍 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푸른 색은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이룬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순자의 권학편) 제자가 그 스승보다 더 훌륭하게 된다는 뜻으로 학문에 더욱 정진하라는 말입니다. 이방인 개종자들도 하나님의 복음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데는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교도의 악에다 유대인의 악을 접붙임 받은 것입니다. ‘지옥 자식’은 ‘지옥 불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라는 뜻으로 이방인 개종자들의 악행이 바리새인의 그것보다 더 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경고는 16-22절입니다. 이는 맹세에 대한 것으로, 잘못된 맹세를 하고 있지만 그 맹세를 이행해야만 하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못 박고 계신 것입니다. 먼저 이들에게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명목상 이스라엘의 선생들입니다. 즉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살 수 있도록 말씀을 잘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미 세속화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사실상 진리에는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은 오히려 천국의 문을 닫다 버리는 데에만 소용이 있고, 함께 지옥으로 가기에만 유효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이 세상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드려지고, 그와 더불어 특별한 관계에 있게 된다면 피조물에 맹세해도 좋다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규정에 따라 그들은 성전과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이 맹세는 이행되지 않아도 아무런 제재 조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위적인 맹세법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해 호소하는 본래 취지를 벗어난 것으로써, 피조물을 하나님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신 6:13)
또한 맹세를 말로만 할 수 있다는 여지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신앙의 불이행을 합법화시켜 주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는 동떨어진 인본주의적 시도입니다.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이 말씀에는 바리새인들의 탐욕을 잘 보여줍니다. 성전의 금은 백성들이 예물로 바친 것이거나 성전 안의 금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규정하면서도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키도록 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더 많은 재물과 예물을 성전으로 가져오도록 장려하기 위함 부양책으로, 이들은 성전을 종교 사업화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맹세법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예배보다는 백성들의 예물과 재물에 더 관심을 가졌던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욕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성전보다 그 안에 있는 금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맹세법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제단(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과 금을 비교해서 바른 가치판단을 내려주셨습니다. 이처럼 세상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영적인 소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전의 건물이나 장식들은 그 자체로 맹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교리화한다면 이 교리는 분명 우상숭배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전 내부 시설 중 가치의 경중에 따라 맹세의 이행 여부가 달라진다고 하는 것도 역시 성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맹세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마 5:34) 이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맹세를 남발하는 유대인들의 진의를 파악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하늘로 맹세하는 자가 이미 하나님께 맹세한 것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심으로써(사 66:1), 맹세를 하는 한 이행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못 박고 계신 것입니다.
네 번째 경고는 23,24절입니다. 십일조에 관한 규정으로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라는 율법에 대한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신명기 14:23에 따라 곡식, 포도주, 기름의 경우에 적용이 되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를 지나치게 세분화시켜 땅의 모든 소산에까지 적용시키게 되었습니다. 박하, 회향, 근채가 강제 부과된 종류들입니다. 박하는 유월절에 먹는 쓴 나물의 양념이고(출 12:8), 회향과 근채는 미나리과에 속한 식물로 대체로 향료로 사용이 되었습니다(사 28:25,27). 바리새인들은 이런 것까지 열심을 부린 것으로 보입니다(눅 18:12). 예수님께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 그 자체를 비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만 이것을 하나님께 대한 자발적인 헌신의 예물로서가 아니라 강제 규정으로 고착화시켜 율법 이행 여부의 규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며, 이런 세세한 규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면서도 율법의 근본정신을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중요한 점은 ‘의와 인과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반면 십일조는 분명하게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구했던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근본정신인 의, 인, 신은 저버리고 자신들의 의를 사람들 앞에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사소한 규정인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는 매우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에 반드시 충실할 뿐만 아니라, 그 세부지침인 십일조에도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재물의 십일조는 충실히 드리면서도 거지 나사로에게는 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 주기도 거절했습니다(눅 16:19-21).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의 장식품인 십일조보다는 자비와 긍휼을 더 원하시기 때문입니다(호 6:6).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말씀은, 포도주를 마실 때에 망으로 걸러낼 것에 관한 것으로, 하루살이는 원래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레 11:4)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정결키 위해 포도주를 마실 때에 하루살이는 걸러낼 줄 알면서 똑같이 부정하면서도 더 큰 동물인 낙타를 삼킨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사소한 정결법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더 중요한 계명들을 어기는 처사를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사소한 식물의 십일조는 바쳤지만, 정작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행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작은 부정은 제거하면서, 약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삼킨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왜곡된 신앙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경고는 25,26절입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에는 부정한 것들을 담는다는 것입니다. 잔과 대접은 모든 그릇을 통칭하는 말이면서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릇은 안과 밖을 다 깨끗이 닦아야 합니다. 겉은 깨끗이 하면서도 속이 더러우면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고 겉을 닦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겉만 깨끗이 하듯 율법의 사소한 규정은 준수하여 겉으로는 정결하게 보이게 했을 뿐 정작 정결해야 할 속사람은 탐욕과 방탕으로 채워 썩도록 방치한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으로 그들은 선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물질적, 도덕적으로 심각한 죄악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회복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깨끗한 음식과 음료를 원한다면 그릇과 잔의 안을 깨끗이 하듯 경건한 신앙을 보이기 위해서는 속사람을 정결케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해야 할 일’ 즉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겉사람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깨끗케 하면, 생활의 절제, 온화, 인내 등 성령의 열매까지도 맺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섯 번째 경고는 27,28절입니다. 다섯 번째 경과 비슷하게 ‘회칠한 무덤’의 비유로 교훈하셨습니다. 율법에는 의식적, 무의식적이건 간에 무덤에 접촉하면 부정하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민 19:16). 순례자들은 가끔 여행 중 부지불식간에 무덤에 접촉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러면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 전 아달월 15일에 무덤에 흰 회칠을 하여 성전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접촉하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그 회칠한 까닭에 눈에 쉽게 뛸 뿐 아니라, 때때로 아름답게 보이기조차 했습니다. 이런 회칠한 무덤의 형상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형식주의적 신앙에 비유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그 속에는 썩고 남은 것들이 있고, 온갖 미생물과 곰팡이 등과 냄새까지 고약한 것들이 채워져 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온갖 죄와 부정함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꼬집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정결법을 준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심히 부패한 족속이었던 것입니다.
일곱 번째 경고는 29-3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을 핍박한 유대인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계십니다. 산상보훈에서는 선지자의 반열에서 박해를 받는 것이 최대의 복(마 5:12)이라고 하셨는데, 반대로 선지자를 핍박하는 것은 최대의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가지 바리새인들의 향한 여섯 가지 저주는 마지막 저주에서 종합이 되는데, 최대 최고의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까지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의 죄는 더 이상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는 막중한 죄임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옛날에 있었다고 가정하면 자신들은 결코 조상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조상과 조상이 한 일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이스라엘의 자손임을 자처하면서도, 조상의 악한 행위는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은 자신의 조상들보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이고, 자신들은 조상들과는 달리 선지자의 말에 충실히 수종한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명은 스스로 박해자의 자손임을 증명할 뿐입니다. 선자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역시 그들의 조상과 같은 잔인한 성격과 악함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증거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죽인 데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행 7:51,52).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맟무리하라는 의미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죄의 잔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일을 너희가 충만하기까지 채우라는 냉소적인 명령입니다. 이제 이들의 심판의 시기가 다가옴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결정적인 선포를 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뱀과 독사는 사단의 상징으로(창 3:1; 계20:2) 저주을 받은 짐승입니다. 이들에게 이런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그들이 사단의 사주를 받은 악인들이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포입니다. 영원한 멸망의 심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경고와 심판의 선포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구원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고 믿고 외치고 있습니다. 많은 거짓된 무리들은 자신의 교회 자신이 믿는 종교가 구원을 확실히 받을 것이라고 외치며 오늘도 대한민국 방방곡곡, 그것도 모자라서 해외에 나가서까지 왜곡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호언장담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들의 호언장담은 천국이 아닌 지옥에 가는 것임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천국에 갈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호언장담할 만한가요? 내가 잘못한 것도 세상 흐름에 비추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합리화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잘못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들도 동일한 죄를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핍박한 죄, 말씀에 불순종한 죄 모두 돌이키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율법의 정신인 ‘의와 인과 신’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호언장담하는 데 있지 않고, 구원의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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