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소중한 사람 마태복음 6:25-34
요즘은 유행어가 참 많이 생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완소남’ ‘완소녀’라는 말이 있었는데 한 물 간 것 같기도 합니다. ‘완전 소중한 남자’ ‘완전 소중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가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하여 별로 좋은 평가를 하지 않을 때에는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부모님도 뭐라고 하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겠죠? 그러나 때로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평상시에는 별로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잊고 지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장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더 소중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물건에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가장 소중한 것은 숨겨놓고 아끼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자랑스럽게 꺼내 놓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완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항상 두 측면이 있습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과, 상대방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내가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또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한 번 해 본적은 있습니까? 어느 누군가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내 마음은 어떨까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과 일치가 된다면 정말 좋겠죠?
어느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에 전제 조건이 반드시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첫 눈에 반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안다’는 것이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속마음까지도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외모는 어떻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행동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도 다 알아야 합니다. 그저 외모가 멋있으니까 사랑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오직 ‘빠르게 빠르게’만을 외치는 시대에는 연애도 빠르고, 헤어지는 것도 빠릅니다. 사랑도 빠르고 미움도 빠릅니다. 이는 외모로만 상대방을 판단했다가, 그 내면의 세계를 점점 알게 되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일시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헤어지게 됩니다.
물론 내면의 세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을 하게 되었다가, 내면이 더욱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각과 버릇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커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아느냐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래 참을 수 있느냐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어떤 좋지 않은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 사귀면서 모든 것을 100% 다 꺼내 보이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나쁜 점, 모자라는 점, 싫어하는 모습을 다 알면서 그 사람과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사랑을 받는 나는 정말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분이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완전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사랑해 준다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명하여”(사 45:4)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느 한 쪽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쭉 자신을 관찰하고 혼자서 사랑을 주고 있었다고 말하면 그 때의 반응은 아마도 ‘황당하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아는 것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이 어미의 태중에서부터 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시 51:5) 태어나기 전부터 죄 가운데 있는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기 때문에 조건 없는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 즉 아가페의 사랑은 오직 여호와의 사랑 하나뿐인 줄로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이신지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요일 4:19). 나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알고 계신 분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랑과 견줄 수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에 대해서 다 알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천지만물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다 받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날아가는 저 새도 키우시고, 들의 백합화 한 송이도 직접 키우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새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 잘 자라서 꽃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는 새나 백합화보다 ‘너는 더 귀중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날아가는 새와 들의 백합화까지 친히 관심을 가지고 먹이고 키워주시는데, 그런 것들보다 훨씬 더 귀한 ‘바로 너를’ 내가 책임을 져 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지금 마음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인정을 하더라도, 내 마음은 염려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염려를 해도 해결될 수도 없는 문제를 안고 끙끙거리고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 상태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27절)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1. 모든 염려를 버리라.
‘염려하다’(메림나오:μειμνάω)는 말은 ‘분열하다, 찢어지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찢어 상하게 하는 근심의 파괴력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질 문제, 세상적인 문제, 육체적인 문제로 인하여 염려하여 마음이 혼란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영적인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되고 세상적인 것들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고 마는 것을 주님께서는 경계하고 계십니다. 그 세상적인 것들의 대표적인 것들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요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음식과 의복은 목숨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목숨이 음식과 의복과 같은 것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주된 것이 아닌 것으로 근심하고 염려하여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영혼이 병들어 멸망당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물질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절)에서 ‘귀하지’(디아페로:διαφέρω)라는 말은 ‘구분된다,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새와 같은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다른 피조물들과는 근본적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들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보다 귀한 사람을 먹이실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먹을 것으로 인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즉 먹을 것, 입을 것은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반드시 책임지시고 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키’(헬리키아:ήλίχια)는 ‘생명’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한 자’는 ‘한 규빗’을 말하는데 보통 사람의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입니다. 그러므로 ‘헬리키아’를 생명으로 번역하면 ‘한 자의 거리를 갈 수 있는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염려가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영적인 침체만을 가져 올 뿐 아무런 좋은 결과도 가져올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생각하여 보라(카타만다노:χαταμάνθάνω)’는 ‘깊고 정확하게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적 판단으로도 깨달을 수 있도록 자연의 쉬운 예를 통하여 진리를 가르치시며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염려는 사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것보다는 잘못된 감정에 의한 것이 더 많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적 이성으로 판단해 볼 때에도 이 세상에 염려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의 백합화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린 모든 사람들의 대표적인 존재이지만, 그 역시도 꽃보다 못한 영화를 누린 것입니다. 이 말은 인공적인 그 어떤 것보다 자연 그대로의 존재가 더욱 아름답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에 자라는 들풀까지도 친히 키우십니다. 들의 백합은 사람에 비해 아주 미미한 것으로 사람들이 불쏘시개로 사용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옷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가꾸시는 것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근심걱정과 염려를 거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이 적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시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지키시며 보호하시는 운행자이심을 믿을 때에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며 근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염려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범죄 행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 줍니다. 믿음만이 우리를 지혜롭게 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 삶을 책임질 것이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나만 믿으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2. 구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기도로 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면 그냥 주시면 되지 왜 기도하기를 원하실까요? ❶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들에게 임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랑에 인간이 화답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로 향한 우리의 사랑을 기도를 통하여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주고받는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❷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에는 얼마든지 단독적으로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에 따라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 내가 동참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내가 가져야 할 자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❶ 오늘 본문 말씀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내 필요도 다 알고 계십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기억하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해 중언부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억지로 구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말을 많이 하는 어리석은 기도는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❷ 기도할 때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구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능력을 주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런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 어떤 일이 더 빨리 해야 하는 일인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❸ 기도는 기다림을 배우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먹는 채소, 과일도 씨를 뿌리고 열매가 맺혀도 어느 정도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밥도 그냥 생쌀로 먹을 수는 있지만, 쌀을 씻고 물을 붓고 열을 가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맛있는 밥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그 즉시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긴급한 일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즉시 응답을 해 주시지만, 일반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새벽에 런던 올림픽 자유형 400m 결승에서 박태환 성도는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예선에서 1위로 들어왔지만 부정출발로 결선 진출이 좌절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의 제기를 하여 결국 결선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숙소에서 그 결과를 기다리는 박태환 성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도 결선 경기에서 결코 은메달이라고 하는 값진 수확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지 않고 금메달을 땄다면 더 좋겠지만, 이번 사건에서 한 단계 더 신앙의 진보와 세상의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대처 방법을 터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기도하기만 하면 즉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제 무엇을 주어야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것인가를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 편에서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만을 속히 주실 것을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내게 최선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실패란 성공의 어머니다.’ 에디슨이 남긴 명언입니다. 이는 실패한 사람에게 단지 위로를 주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성공만이 있는 인생은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또한 실패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성공의 진정한 기쁨을 결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한 것이 거절을 당했을 때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실패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렇게 다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어떻게 임하는가를 깨다는 것이 참으로 귀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을 구하는 것,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구하는 것은 세상의 헛된 것을 위해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불신자들처럼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생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원리입니다. 이런 성도의 삶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말씀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더 필요한 자세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내일 할 일에 대하여 무책임한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할 일이 있고 내일 할 일이 있습니다. 매일 단순한 작업이 계속된다고 해도 그 역시도 오늘 일과 내일 일은 다른 것입니다. 내일은 아직 내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일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은 바로 오늘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괴로운 일, 슬픈 일, 기쁜 일 모두 오늘 마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신 내일에 대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기다리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오늘을 생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알고계시면서도 나를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예쁜 얼굴로도 살 수 없고, 내가 가진 지식으로도 살 수 없고, 권세로서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에 대한 증거입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나는 하나님께 완전히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데,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믿음 안에서 잘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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