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자유롭게 지음을 받은 존재

chukang 2012. 8. 17. 22:12

 

자유롭게 지음을 받은 존재 요한복음 8:31-47

 

  사람들은 자유라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지 자신이 구속을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고, 사회 환경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고, 심지어는 돈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어 합니다. 어릴수록 더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한시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때입니다. 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가 많아지면 이러한 자유를 어느 정도 억제하게 되고, 오히려 어느 집단에 속해서 스스로 구속을 당하기를 바랄 때도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창 1:27)으로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이 본래 자유롭게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신학적인 측면으로 고찰을 해야 하지만,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성품에 의하여 자유를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할 때에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이처럼 자유로운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늘 자유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결코 완전한 자유가 아닙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즉 선악과는 절대로 따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건은 약속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며,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율법’입니다. 인류 최초의 법이 바로 선악과 언약입니다.

  이 법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보호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반대로 이 법에서 벗어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는 경고가 됩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측면이 나타나게 됩니다. 법을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제한 된 자유를 누리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법을 어기고 내 마음대로 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않을 것인가? 그 결정권이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의지의 핵심입니다. 결국 자유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 인간에게 주어질 때부터 그 자유는 ‘제한된 자유’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는 완전히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리켜 자유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자유를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국가라고 가정을 한다면, 그 국가에 속해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에 대하여 생각하고 각기 다른 주장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하든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에서 정한 법률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법률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제재를 받게 됩니다. 즉 자유를 제한 당하게 됩니다. 즉 한 국가의 국민이 그 나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이 광복절이었습니다. 광복절은 나라의 주권을 찾은 날입니다.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 그토록 독립운동을 하였습니까?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즉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국민에 의해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대한민국이 자유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 국민들이 완전한 자유 즉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되었나요? 여전히 또 다른 제약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자유를 일부분 제한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자유든지 간에 전혀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 사회 질서를 해치는 행위, 국가에 손해를 끼치고 위태롭게 하는 행위 등은 결코 자유가 아닙니다.

  다시 성경적인 개념의 자유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금지한 선악과 언약은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것이라는 한 측면이 있는 반면에, 선악과 언약을 어길 때에는 그 보호와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는 또 다른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 언약은 하나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인류 최초의 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법을 다른 말로 하면 구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써 에덴동산에서의 생활을 보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그 율법이 나를 구속하는 것이 귀찮고 싫다고 하면, 에덴동산에서의 생활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리킵니다. 즉 성경을 말합니다. 이 성경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진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선악과 언약은 곧 진리였습니다. 그 진리를 지킬 때에 에덴동산에서의 아름답고 복된 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라야 하는 이유는 에덴동산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아름다운 에덴동산인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지킬 때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다른 편에서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죄로부터 자유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고 하였습니다. 죄를 행하는 사람은 죄의 노예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롬 3:23)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의 종, 죄의 노예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서는 죄인은 천국에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는 원죄를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아야만 천국에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진리 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하였습니다.(요 14:6) 히브리서 기자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휘장 가운데 열린 길은 곧 십자가의 길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지성소 휘장을 찢어 새롭고 산 길을 만들려고 십자가에서 그 몸을 찢기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 8;1,2)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주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자유하게 하신 유일한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믿어야만 합니다. 그 자유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2. 세상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짐으로부터만 자유하게 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죄의 짐이 가장 무겁고 중요한 것이지만, 이 죄의 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세상 근심과 염려 속에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런 것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걱정입니다. 또 자녀 걱정, 주택 걱정,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 직장에 대한 걱정, 대인 관계 걱정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눅 12:25,2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근심과 걱정도 내가 해결해 주마!” 이런 뜻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를 얻은 몸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세상 근심 걱정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는 세상 걱정 근심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세상 짐은 완전히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이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나 기쁜 일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미소를 띠게 되지만, 근심 걱정이 있는 사람은 표정이 어둡고 슬픈 기색이 돕니다. 이는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나타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나 말을 가려서 하는 사람이라면 눈치를 못 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순간순간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군인이 사복을 입고 다닌다고 해도 그 행동이나 말투를 보면 군인임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환경에 있느냐,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그 특색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성도들의 얼굴은 어떤 빛이 나타나야 하겠습니까? 기쁨의 빛, 소망의 빛, 평안의 빛, 그리고 사랑의 빛이 나타나야 합니다. 반면에 불신자의 얼굴에서는 어떤 빛이 나타날까요? 불안, 불편, 근심, 걱정, 슬픔, 고통의 빛이 나타날 것입니다. 불신자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욕심입니다.(44절) 마귀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욕심을 그의 자녀들에게 불어 넣습니다. 따라서 아비 마귀의 욕심을 너희도 행한다는 말은 사단 마귀가 자기 자신처럼 인간들에게도 아주 더러운 욕망과 욕심을 불어 일으키고 또 그 마음을 사리사욕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게 해서 죄를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과 같은 제 2, 제 3의 복사 품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마음이 지금 어떤 것이 들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마귀적인 것 즉 세상적인 욕망 같은 것들은 내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마귀로부터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정결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규정하셨습니다. 마귀의 특징 중에 하나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이라는 말에는 ‘현혹시키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진리를 세우거나 진리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거짓 증언과 기만적인 행동으로 사람을 현혹시켜서 죄악의 길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거짓은 마귀의 특징이므로, 마귀에게 속한 자는 진리와 합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대항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 마음을 비비꼬이고 비뚤어지게 만들어,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진리를 대적하고 대항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 마귀에게 현혹당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일을 대행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마귀만 좋게 하는 일을 행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이런 거짓을 가려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밖에는 없습니다.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성경의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맘이 청결해야 하고, 내 청결한 마음에 성령께서 충만한 은혜를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고, 또 말씀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무식입니다. 마귀의 자녀의 특징 중에 또 하나는 무식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훌륭하고 똑똑해서 진리에 대하여 잘 안다고 떠듭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결코 진리에 대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설사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읽을 수가 있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회개하고 십자가의 길로, 천국의 길로 걸어가는 자는 오직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밖에는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세상적으로 가장 똑똑한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교회 안에서, 천국의 백성 앞에서는 가장 무식한 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간혹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에 이런 말씀이 써 있는데... 하면서 인용을 해도 그것은 잘못된 인용이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하여 해석을 하는 것이거나,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이 옳다고 해도 자신은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남에게는 해당이 되지만, 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인 줄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결코 거짓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와 거짓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따르던지 아니면 거짓에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죄가 드러날까 진리를 거절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어둠은 죄를 말합니다. 밝은 빛 앞에 죄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드러나야 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그러나 멸망되기로 예정되어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죄를 숨기기 위해서 빛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죄인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반대로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에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교만한 사람은 결코 진리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지식이나 과학 지식이나 기타 다른 종교의 교리가 주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좋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그 교만으로 인하여 말씀에 순종할 수 없고 결국 지옥의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주님께서는 지금도 내 마음의 문을 진리의 말씀으로 두드리고 계십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더 이상 마귀에게 붙들린바 되거나 속임에 빠져 있는 어리석은 불신자나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죄와 사망의 족쇄에 묶인 채 슬픔과 고통의 삶을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요, 진리 안에서 자유자가 되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할 줄 알고,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의 아름답고 풍족한 삶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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