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바벨론에 대한 5가지 저주

chukang 2012. 9. 2. 08:25

바벨론에 대한 5가지 저주 하박국 2:5-20

 

  ‘하박국(הבקוק)’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껴안는 자’, ‘매어달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신앙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어달리고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정세는, 바벨론이 급부상하여 앗수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을 함락시키고, 앗수르는 거의 몰락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애굽도 군사를 일으켜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의 전쟁을 하였으나 패하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이렇게 강대국끼리 세력 다툼을 하는 틈바구니에서 유다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앗수르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요시야 왕은 앗수를를 돕기 위해 갈그미스를 향하고 있던 애굽 왕 바로느고의 진군을 막다가 므깃도에서 전하한 후 유다는 애굽으로부터 큰 곤경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또 바벨론 제국은 남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팔레스틴 지역을 먼저 장악해야 했기 때문에 유다를 필히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유다를 공격하여 B. C. 609년 요시야 사후 애굽의 꼭두각시로 세워졌던 제17대 왕 여호아하스(B. C. 609)를 폐하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B. C. 609-598)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B. C. 605 갈그미스에서 애굽 군대를 대파한 바벨론 제국은 유다의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갔는데(대하 36:5-8; 단 1:1) 이것이 제1차 포로로 끌려간 사건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남유다는 그 말기적 현상으로 종교적,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통치자들은 강대국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압제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왕하 23:35-37; 24:4; 렘 22:13-19),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들을 잡아 죽이는 일까지 행했다고 했습니다(렘 36:20-32). 이런 악한 세상에 하박국 선지자와 같은 의로운 남은 자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속히 도래하기를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박국 선지자는 남은 자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불의한 상황 속에서도 더욱 믿음으로 살 것을 격려하기 위해서 본 서의 예언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박국은 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대변하는 심정으로 불의한 자들을 속히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항변조로 하나님께 두 가지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남유다 사회의 죄악 된 생활을 목격한 하박국 선지자는 먼저 ‘공의의 하나님께서 왜 악인들을 징계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습니다.(1:2-4)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남유다의 죄악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때가 되면 이방 민족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남유다의 죄악을 징계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1:5-11). 그러나 하박국은 이런 하나님의 답변을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있어서 악한 세력이 사용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을 통한 남유다의 심판은 원수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삼하 7:8-16)이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또 다시 하나님께 질문을 제기하는데 그것은 ’왜 하필이면 남유다보다 더 패역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족속인 바벨론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를 심판하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1:12-17).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남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잠시 바벨론을 들어 사용하실 뿐 바벨론도 결국 그들의 죄악대로 심판을 받아 반드시 멸망할 것임과 의인의 종국적인 승리를 가르쳐주심으로써 하박국 선지자의 신앙적 회의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1. 첫 번째 질문(1:2-4)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죄악이 관영한 남왕국 유다를 징계치 아니하시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남왕국 유다에 예레미야, 스바냐 등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고를 발하셨으나 왕들과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고 더욱 더 죄악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강포, 간악, 패역, 겁탈, 분쟁 등의 표현을 볼 때에 당시 유다 사회가 얼마나 죄악으로 관영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힘없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하고 학대하였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너무나 만연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눈을 뜨기만 하면 그런 일들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바라보면서 하박국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유다의 죄악을 징계하지 않으시며, 또한 의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가 하고 불평어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어떤 면에서는 하박국이 반정부주의자 혹은 매국노 같은 인상을 갖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가 온 사회에 판치는 현실에 대한 의인의 고뇌이며, 징계를 통해서라도 유다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진정한 애국심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1:5-11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의 죄악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심판할 때가 되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남유다의 죄악을 징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벨론으로 인하여 남유다는 처참한 상황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B. C. 586년 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성취가 되었습니다(대하 36:11-21). 결국 유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은 죄에 대한 방관이나 용납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심판할 때가 차기까지 기다리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은 전쟁에서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승리를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교만한 자들이며, 비록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자들이었습니다.

 

  1차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❶ 불의에 대해 가만히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태도는 방관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으로 더 깊어져 어둠이 짙어질수록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들의 죄악을 회개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또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❷ 하나님께서는 구속사를 성취하시기 위해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서도 회개치 않을 때에는 심지어 악인들을 사용해서라도 징계하시고 고난을 주셔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회개케 만들어 다시금 신실한 자녀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시 51:11,12). 그러므로 성도들은 고난이 닥칠 때에 낙심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며, 회개와 함께 고난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질문(1:12-17)

  ‘왜 하필이면 남유다보다 더 패역하고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족속인 바벨론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심판하시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구원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신앙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남유다가 하나님의 언약대로 망하지 않고 계속되리라’는 것입니다. 비록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크게 유린을 당하지만 결코 완전한 멸망에 이르지는 않게 되리라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은 결코 파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십자가 언약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가운데 보호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는 어떤 악한 상황 속에 빠질지라도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후 4:8,9(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3. 바벨론에 대한 5가지 죄에 대한 저주

  ❶ 탐욕의 죄(2:5-8): ‘술을 즐기며’ 이 말은 ‘술은 반역을 행하리라.’는 뜻입니다. 술은 교만한 자를 망하게 하는 반역자와 같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만하고 방자한 바벨론의 무절제하고 탐욕스러운 생활은 결국 멸망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결코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는 뜻인데, 바벨론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다른 나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음부는 구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묻히는 무덤 또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사용이 되고, 모든 주검을 삼키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곳으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잠 27:20; 30:16; 사 5:14). 다라서 바벨론이 결코 그칠 줄 모르고 주변 국가들을 연속적으로 침략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바벨론에게 주어진 첫 번째 저주는 남의 것을 약탈하는 행위는 반드시 똑같은 약탈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무력을 앞세운 침략 전쟁으로 자신들의 소득을 풍부하게 만들고 식물을 풍성하게 하였지만, 그렇게 누리는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바벨론이 침략 전쟁으로 모은 약탈물들은 아무 쓸모없는 진흙처럼 무가치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들은 언젠가 반드시 되갚아야 하 무거운 부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이 약탈한 것들은 자기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도 약탈을 반드시 당해야 하는 저주를 불러 올 뿐이라는 것입니다.

  7절에 ‘너를 물 자’ 이는 바벨론을 물어뜯을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벨론은 뒤에 일어난 ‘바사 제국’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세계 역사에 있어서 영원한 절대적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인간의 역사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❷ 불의한 이를 취한 죄(9-11): ‘자기 집’은 바벨론 국가 혹은 왕조를 뜻합니다. 강압이나 폭력 혹은 사기와 같은 불의한 방법으로 취득한 이득, 즉 바벨론 제국의 통치자들은 다른 민족들을 침략하여 거기서 얻은 탈취 물을 가지고 국가 경제를 유지시키고 번영을 누리며 왕가를 유지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불의한 방법으로 소득을 얻는 자들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에 대한 저주는 ‘네 집에 욕을 부르며’ ‘욕’은 ‘부끄러움, 수치’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이 여러 민족들을 멸한 것이 그들에게 영원한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도리어 수치를 가져다주는 길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는 말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는 물체들조차도 바벨론의 죄악을 고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성벽과 궁월과 신전 등은 포로들의 피와 눈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돌과 들보는 포로들의 피와 눈물의 증인이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은 자신들이 다른 나라를 노략한 것처럼 그들도 노략당하고 또한 여러 민족들을 멸망시킨 것처럼 자신들도 멸망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게 될 것입니다.

 

  ❸ 피 흘림의 죄(12-14): 바벨론은 피로 건설되고 불의로 건축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의 희생에 근거하여 건설된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를 건설할지라도 결국 쇠약해진 국력은 마침내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무려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것입니다(13절). 바벨론 제국을 일으켜 세우심으로 강대한 나라로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시고(암 6;14; 합 1:6), 또한 그들이 교만해지자 완전히 멸망시켜 흔적도 없게 만드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사 14:12-23; 렘 51:1-40; 단 4:30-33; 5:24-31). 이처럼 개인적인 인이든 국가적인 사업이든 오직 하나님의 손에 모든 성패와 흥망이 달려 있음을 명심하여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를 의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❹ 비루한 협박의 죄(15-17):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이 말은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인데, 속국들에게 패역과 탐심 등의 죄악을 전염시켜서 멸망의 길을 걷도록 만든 것을 뜻합니다.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이는 속국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하면서 거기에 독을 섞어 걷잡을 수 없이 취하여 쓰러지게 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속국들로 하여금 멸망의 길에 이르도록 유도하는 악행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 취하게 되고, 취하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하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런 자는 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술잔’은 일반적으로 심판이나 형벌을 상징합니다(시 11:6; 75:8; 사 51:17). 하체를 드러낸다는 말에서 노아의 경우를 연상하게 합니다(창 9:21). 이는 바벨론이 속국들을 자신들이 범한 죄악과 동일한 죄악으로 오염시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는 수치를 당하도록 만든 바벨론에 대한 저주의 선포입니다. 이 선포는 바벨론이 속국들보다 더 큰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오른손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권능을 상징합니다. 다른 나라에 행한 악행 그대로 하나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바벨론을 완전히 뒤덮게 될 것입니다.

 

  ❺ 우상숭배의 죄(18-20):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다섯 번째 저주는 그들의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새긴 우상’은 돌이나 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우상입니다. 우상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사 44:9; 렘 2:11).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금속으로 주조해서 만든 우상을 말합니다. 부어만든 우상과 거짓 스승 역시 새긴 우상처럼 무익함을 말합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조각하거나 주조한 우상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먹지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며 말하지도 못합니다.(신 4:28).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든지 아니면 그 위에 금과 은으로 덧입혀 화려하게 장식한 우상이든지 아무런 생명력을 갖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상에게 기도하거나 응답을 기다리며 향기롭고 값진 제물을 바치는 일처럼 허망하고 무익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생리 기능조차도 소유하지 못한 우상에게 무슨 능력과 권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바벨론 사람들이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조각한 우상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상숭배는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엄중한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늘 보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보좌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오직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며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소망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멸시하며 침략하지만 결국에는 동일한 보복을 당하여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또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이 모든 일들은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지만, 그 결국은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할수록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부강한 나라, 큰 교회, 부자들, 지식 있는 자들도 지금 당장 강하고 부하다고 하여 교만하고 강퍅한 행동을 한다면, 지금은 연약하지만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강한 자들을 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연약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겉으로는 연약한 것 같으나 속으로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겉으로는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주님만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연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나가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자는 오직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자가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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