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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편 강해: 메시아 수난과 영원한 승리의 예언시

chukang 2012. 7. 2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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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22편 강해 - 메시아 수난 예언시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사울에게서 핍박과 온갖 수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겪었던 자신의 절망과 비통함을 여호와께 호소하는 비탄시입니다. 이는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갖 박해를 다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은 다윗의 생애는 많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그랬고 또 고난 속에서도 변치 않는 그의 여호와 신앙과 고난을 극복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광스럽게 등극한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와 승귀(昇貴)를 잘 예표하고 있습니다.

본 시가 다윗 이후 약 1000년이 지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예언이 성취가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으며, 예수님에 의해 주어진 구속의 복음의 진정성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 시는 1-21절에서 고난에 빠진 다윗의 비통한 심정과 그가 처한 고난의 상황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절박하게 구원을 호소하고 있으며, 22-31절에서는 비통한 분위기에서 급전환되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선취적인 신앙에 따라 구원을 확신하며 이스라엘 온 백성과 더불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며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반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후반부는 주님의 부활과 승천 및 재림으로 온 우주 가운데 펼치게 될 영광스러운 통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본 시에 나타난 다윗의 처절한 부르짖음이 그의 억울한 고난에 대한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여호와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는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과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는 구누나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는 단지 절망 속에서 좌절로 끝나지 않고 여호와 신앙으로 그 절망을 극복해 나가는 자이며, 그러한 자만이 여호와께서 예비하시는 궁극적인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으로 반드시 일어서는 것이 곧 참 성도의 바른 자세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생명이 끊어질 정도로 극심한 환난과 무수한 역경을 겪기는 했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찬미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었듯이, 주님을 통한 구원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성취가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 하시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수난 당하시던 주님께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외침과 동일합니다(마 27:46;막 15:34). 여기에는 ‘메시아’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대적들에게 수난을 받으시는 메시아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 사울에게서 온갖 박해를 받던 상황에서 기록된 시이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흔들림이 없던 여호와 신앙의 위대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단지 다윗의 개인적인 경험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메시아의 수난과 영광스러운 승리를 예언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심한 환난과 고통에 처해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하나님’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은 인간들로부터의 모든 도움의 손길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곳은 오직 여호와 한 분뿐이심을 역설적으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극심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도움을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환난 속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마 26:36-44) 이처럼 극심한 환난이 때로는 성도에게 더욱 더 간절한 기도를 하게 만듭니다. 다윗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지더라도 실망치 않고 계속 기도하는 것이 바른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귀를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 기도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눅 18:1-8).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거하다(야솨브:ישׁב)’는 말은 ‘자리에 앉는 것’ ‘처소에 거하여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80:1;99:1)과 유사한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이스라엘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심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극심한 환난으로 인해 고통을 부르짖는 가운데에서도 여호와께 대한 신앙만큼은 흔들림이 없는 다윗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의뢰한다’는 말은 ‘어떤 대상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의미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신앙의 자세를 뜻합니다. 다윗은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들에게 베푸셨던 구원의 은총을 자신에게도 베풀어 주실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열조 시대에나 오늘날에도 언제나 동일하심으로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부르짖어’와 ‘의뢰하여’ 또 ‘구원을 얻고’와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가 대구를 이루어 뜻하고자 하는 바를 한층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열조가 환난 중에 주께 부르짖어 의뢰함으로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고 구원을 얻은 사실에서 자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분명한 근거를 찾은 것입니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벌레’는 극단적인 ‘무기력함’과 ‘하찮은 것’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입니다(욥 24:6;사 41:14).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모욕과 멸시를 받는 등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다윗이 원수들로부터 당한 치욕은(삼하 15:13-23)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조롱과 멸시를 예표한다고 하겠습니다(사 53:3).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입술을 비쭉인다는 것은 밀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내미는 행위로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이며, 머리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드는 것도 역시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를 경멸하는 행동입니다(왕하 19:21;사 37:22). 이런 조롱과 멸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받으신 것으로 (마 27:39), 결국 다윗이 당한 고난과 수난을 표현하는 동시에 장차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역설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문제를 내어 놓아도 능히 해결 받지 못한다는 조소의 말입니다. 이 같은 말은 성경에서 의인이 악인에게 조롱을 받을 때 자주 발견됩니다.(왕하 19:21;사 37:22) 다윗도 이런 조롱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삼하 16:7,8).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런 조소를 받으셨는데(마 27:43), 당시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로써 본 절의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9,10: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다윗은 자신의 출생 때부터 자신을 특별히 지키시고 보호하셨음을 고백하며 또 자신의 모든 생애가 온전히 하나님만을 향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참 신앙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지식적인 신앙은 결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있어야 하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1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앞에서 고백한 것과 같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끊지 마시고 자신을 돌아보아 달라는 부르짖음입니다. 이는 1절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부르짖던 절규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자체가 그 어떤 환난보다도 시인 자신에게는 더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그런 엄청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3: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바산(Bashan)은 갈릴리 바다 동쪽, 길르앗 북쪽의 요단 동부 지역으로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목초지입니다. 건장하고 힘센 소들이 많이 생산이 된다고 합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자신을 둘러싼 대적들을 이 바산의 힘센 소에 비유하여 자신이 아주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생생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적들의 포악함과 잔인함이 먹이 동물을 찢고 부르짖는 사자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피에 굶주린 사자 같이 광란을 일으켰던 유대 군중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물 같이 쏟아졌으며’ 다윗이 혹독한 시련 소에서 지쳐 탈진한 상태가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훗날 십자가에 못 박혀 온 몸의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수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요 19:34)을 연상케 합니다. ‘뼈는 어그러졌으며’ 육신의 처절한 고통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처참한 고통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촛밀’ 초가 탈 때에 녹아떨어지는 촛농에 자신의 심경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심경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앞두고 처절한 인간적 고뇌에 잠기셨던 주님의 심적 고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마 26:38-42)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질그릇 조각 같고’ 대적들로 인해 무기력해 진 자신이 마치 깨진 질그릇 조각처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하기 불가능한 상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혀가 잇틀에 붙었다.’는 표현은 목이 마르다는 뜻으로 그만큼 심신이 곤핍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진토’는 대개 마른 땅, 먼지를 가리키지만 때로는 ‘무덤’이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욥 10:9; 시 30:9; 전 3:20) ‘사망의 진토’는 ‘사망의 무덤’ 곧 인간의 생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여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개들은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를 상징합니다. 즉 자신이 잔인하고도 무례한 악인들에게 둘러싸여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의인의 수족을 찔렀다는 표현은 훗날 무례하고 잔인한 로마 병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사건을 연상시킵니다(요 19:17-37).

 

17,18: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피골이 상접하여 뼈가 모두 드러날 정도가 된 상황입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다윗을 바라볼 때에 동정의 눈빛이 아니라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분명하게 목격한 것은 본 절의 성취라고 보았습니다(요 19:37). 이처럼 악인들이 의인의 고통을 분명하게 목격한 사실은 장차 하나님께서 그 의인을 구원하실 때 그들로 부끄럽고 두렵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는 다윗이 대적들에 의해 곤고한 지경에 빠진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있을 일에 대한 분명한 예언입니다(요 19:24).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지금도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다윗이 위기 중에 처하여 하나님의 신속한 도움을 간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어떤 상황이라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여호와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에 계시기만 한 분이 아니라,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20.21: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칼과 개의 세력’ ‘사자 입’ ‘들소 뿔’ 등은 모두 다윗을 대적하는 세력들입니다. 이런 같은 의미의 말을 달리 반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대적의 손에서 자신을 신속하게 구원해 주실 것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 유일 한 것’ 이는 하나밖에 없는 다윗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제까지는 탄식과 부르짖음으로 계속되던 시가, 찬양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다윗의 신앙의 표출입니다. 본 절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었습니다(히 2:12).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으니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형제 된 성도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다짐하였고 이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치 아니하시고 들어 응답해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당위론적 명령입니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하는 23절에 대한 답이 본 절입니다. ‘곤고한 자’는 다윗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25: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대회라는 말은 ‘큰 군중(카할 라브:קהל רב )’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중입니다. 다윗이 찬송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여호와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피조물인 인간의 마땅한 도리(사 43:21)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풍성한 찬송의 이유를 먼저 주심으로 우리 인간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11:36).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하였던 감사제(레 7:15,16)를 약속대로 이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다윗 자신에게 풍성한 찬송의 이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다윗 자신의 헌신의 각오를 나타낸 것입니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이는 감사제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 일단 바쳤던 제물을 물려서 백성들과 나누어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레 7:16) ‘겸손한 자’에 해당하는 단어 ‘아나윔(ענוים)’은 가난한 자 또는 곤고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로보아 다윗은 감사제에 가난한 자들을 초청하여 함께 기쁨의 식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사는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여 성도들이 기쁨으로 교제를 나누는 성찬식을 상기시켜주는 동시에 주님의 재림 후 모든 성도들이 참여한 천국 잔치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했습니다.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마음’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그의 백성들이 한 조각 떡과 고기로써 육신을 만족시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에 영혼을 소생시키며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본 절에서부터 31절까지는 다윗 자신의 시대가 아닌 메시아 통치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인 땅이 회개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겔 33:11).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제한 될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후에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의 복음 선포에 의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예언은 시편 여러 곳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18:43-49;45:17;47:9).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이심이로다.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으로만 인식되었던 여호와께서 실상은 모든 인류의 왕이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를 힘입어 영적으로 그의 백성된 자들인 온 세상의 성도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창조자시오 주관자이심을 입술로 고백하며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9: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자가 먹고 경배한다는 것은 육신의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의 은총을 받은 부요한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요 10:10). ‘진토에 내려가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로, 모든 풍비한 자와 대조가 되는 말입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거의 죽어가는 자로 육체적인 질병과 가난이 아닌 영적으로 병든 자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권념하시면 그들도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같은 영생의 소망을 지니고 사는 자들은 비록 곤궁한 중에도 하나님을 기뻐 찬양하며 경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30: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후손은 일차적으로 다윗의 육적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을 의미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영적 이스라엘 자손인 전(全)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시대에 미치게 될 것을 바라보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31: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공의는 구체적으로 의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철저하게 공의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 공의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내어 놓으시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이 철저하신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의인들은 고난을 받는 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본 시는 첫 절에서 고난 중의 부르짖음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궁극적 승리를 노래함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의 구원 역사로 말미암은 영광된 승리에 대한 소망은 현재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함이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우리 성도들은 자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승리를 얻을 것이므로 기뻐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롬 8: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