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뜨림의 복 에베소서 4:17-24
깨진다는 말은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은 아닙니다. 속어로 깨진다는 말은 야단을 맞는다, 끝장난다, 망가진다, 창피를 당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여자가 앙칼지게 소리를 지는 것을 가리켜 ‘접시 깨지는 소리’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독일에서는 신혼 풍습으로 신랑 신부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그릇이나 쓰레기 같은 것들을 집 앞에 버리거나 깨뜨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랑 신부가 빗자루를 가지고 나와서 치우는데, 그 이유는 결혼 후 미리 어려움을 겪게 하여 그 뒤로는 평안한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실패와 좌절을 반드시 겪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에, 엄마가 100% 다 들어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거절을 당하면서 작은 상처들을 받게 되어 있지만, 그런 미리 받는 상처들로 인하여 더욱 앞으로 닥쳐올 인생의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가 있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어짐들은 매우 작은 것들이지만, 이를 통하여 요구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내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더 나아가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고는 절대로 빛을 발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등 값비싼 보석들은 땅 속에서 채굴되는 원석을 가공해서 아름다운 모양과 빛을 발하게 만듭니다. 세공사가 작은 망치로 이 보석들을 다듬고, 각을 만들고, 골을 만들어서 빛을 반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원석은 어떤 모습입니까? 돌덩어리에 박혀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돌을 깨뜨리고 부서뜨리고 깎아서 잘 다듬으면 값비싼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원석의 돌을 깨지 않고 돌덩어리인 채로 놓아둔다면 값진 보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보석의 가치는 깨어지고 부서지고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훌륭하게 되려면 깨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집의 껍질, 교만의 껍질, 불신앙의 껍질 등이 깨어져야만 합니다. 특히 성도의 경우에는 이 외에도 깨져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보석보다도 더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걸작품들입니다. 그러나 돌덩어리 속에 함께 굳어져 있는 원석과 같은 모습으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도로서 깨져야 할 것이 깨지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깨뜨리기 위하여 계속적인 작업을 하십니다. 그것이 때로는 고통과 절망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깨어져야 성도의 본분을 다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 세상에서는 소금과 빛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1. 속사람이 깨어져야만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은 반드시 어떤 계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새롭게 된다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바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자신이 마음과 생각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라온 환경과 경험한 것에 따라서 어떤 일정한 틀을 만들게 되는데, 일단 이 틀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 안에서만 움직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서 그 틀은 점점 더 튼튼하게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는 생활의 지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소위 ‘좌우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와 다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어디 자신의 생각으로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나요? 나 아닌 다른 사람도 나와 동일하게 어떤 틀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이 틀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비슷한 것이 있을 수는 있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한 가정에 두 아이가 있다면 같은 환경 속에서 자라지만 그 생각이 전혀 다른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되면 서로 만들어 놓은 틀이 부딪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하여 나와는 다른 틀을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을 함께 하면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부딪히게 될 때에는 3가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내 틀에 상대방의 틀을 흡수시킬 수가 있고, 내가 상대방의 틀 속으로 흡수당할 수가 있고, 서로 절충하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서로 양보를 하다가도 점차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중대한 결정이나 혹 금전적인 문제가 걸리게 된다면 그 충돌은 지금까지 부딪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딪힘을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서로 상처를 입기도 하고 끝내는 결별하게 되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이렇게 내가 깨어질 수도 있고, 상대방이 깨어질 수도 있고, 상처를 받기도 하고, 헤어질 수도 있는 부정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부딪힌다고 해서 꼭 이렇게 부정적인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 잘못된 생각이 드러나서 바뀔 수도 있고, 모르던 것을 배워서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게 되면, 그 중에 반드시 자기의 스승이 있는데, 그 중 옳은 사람을 가려서 따르고 배우며, 옳지 않은 사람을 가려서 그 잘못을 내가 똑같이 따르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고쳐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빌 하비트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 장점이 있고 타인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따라서 그것만 배우면 된다. 상대를 경시하는 순간 상대를 통해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스스로 놓친다. 이 일로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깨어져야 될 부분이 반드시 있기 마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깨어진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겠습니까? 내 잘못을 인정하고 부서지는 과정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게 유익이 된다면 반드시 깨지고 부서지는 것을 감내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적인 일로도 갈등이 있는데, 하물며 영적인 문제인 종교에 있어서는 어떻겠습니까? 종교에 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어떤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틀은 매우 튼튼하게 지어져서 타인의 침입을 불허합니다. 그 종교가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이슬람교이든, 기타 무속신앙이든 간에 사람마다 어떤 형태로든지 틀을 만들 놓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종교적인 틀은 가지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한 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어떤 고정화된 생각이나 종교적인 틀을 만들어서 지키는데, 그것을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온갖 것들이 다 들어와 있습니다. 얼마 살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자기들의 주관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라면서 부딪히고 깨지고 하면서 만들어지는 틀입니다. 그런데 이 틀이 좋은 것으로만 만들어지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좋지 않은 것들이 눈을 통하여 귀를 통하여 마음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것들을 접하게 되면 그것은 옳은 것인 줄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단단하게 굳어지게 됩니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 13:3-9) 길 가에 떨어지는 것을 새들이 와서 먹었다는 것은, 악한 자들이 말씀을 빼앗은 것이며,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것은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에 넘어지는 것이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는 것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깨달은 것으로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의 결실은 맺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이 바로 이 옥토와 같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심령이 길 가와 같이 단단한 사람, 돌밭과 같은 사람, 가시덤불과 같은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였다고 하는 성도들 가운데에도 이런 심령을 가진 사람은 없을까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사도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틀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틀을 깨뜨리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갈 수가 없고, 성도로서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은 타락한 자연인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결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너 죄인이다.’ 이런 지적을 하면 ‘너는 죄인 아니냐?’ ‘너 나 잘 해’ 이렇게 역공을 해 옵니다. 이는 자신의 잘못된 마음의 틀을 공격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의 틀을 깨뜨리려고 하고, 우리의 심령은 깨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충돌이 있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충돌에서 내 심령의 틀이 깨어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어 내 마음이 옥토로 변하게 되고,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세상 염려와 재리와 온갖 핍박을 다 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을 건드려서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철통방어를 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틀은 오직 더러운 것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양심에 찔림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기준이나 사회적 기준까지도 무시해 버리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모습이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즉 더러운 탐욕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자신의 몫이 아닌 것에 대한 탐욕입니다. 영혼이 무감각해진 자들은 자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 삶의 만족을 모르고 방탕한 생활로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죄와 결별을 해야만 합니다. 죄와의 결별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해야만 가능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은 새롭게 해 주셔야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서 역사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더러운 탐욕으로 이루어진 틀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녹아질 것입니다.
2. 껍질이 깨어져야만 합니다.
껍질이 깨어져야만 한다는 것은 속사람이 변화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본래 우리 심령 속에는 보물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다만 그 보물이 세상적인 모든 더러운 것들과 향락과 탐욕과 거짓 등이 계속 덮이고 쌓여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 보물을 덮은 껍질을 깨야 됩니다.
우리 건강에 좋다고 하는 음식들이 참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는 단단한 껍질로 쌓인 것들이 있습니다. 밤, 호두, 땅콩, 아몬드, 잣, 은행 등은 식물성 지방과 비타민이 풍부해서 몸에 좋은 식품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견과류는 성인병을 막아주고, 두뇌를 발달시키고,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견과류는 모두 두꺼운 껍질로 싸여있어서 먹기가 어렵지만, 껍질을 깨뜨리기만 하면 몸에 좋은 식품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는 자신을 깨뜨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고집의 껍질을 깨뜨려야 합니다. 교만의 껍질을 깨뜨려야 합니다. 불신앙의 껍질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런 껍질들은 모두 마귀가 내 마음에 만들어 놓은 것들입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7,38) 이 여인은 창녀로 알려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자신의 추한 인생 속에 주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령의 악하고 더러운 틀리 깨어졌습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된 후에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인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마가는 이 옥합에 담긴 향유가 ‘한 나드’라고 하였고, 그 값은 무려 300데나리온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막 14:5)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하루 일당은 5만이라고 해도 1,500만원이나 됩니다. 그것을 모두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고, ‘내 장사’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여인은 평생 동안 모둔 자신의 전 재산을 주님께 부어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죄가 용서 받은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 7:47,48)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지만 주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죄는 너무나 더럽고 추한 것이었지만, 감히 용서을 구할 수도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그 향유는 주님의 머리로부터 발까지 흘려 내렸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 중에는 이런 행위에 대하여 책망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눅 7:44-46)
오늘 주님께서 나의 더럽고 추한 너무나 많은 죄를 죄들을 용서해 주심을 믿고, 우리의 심령이 주님의 말씀으로 깨어지기를 바랍니다. 깨뜨린 향유는 죄를 버리는 것인 동시에 주님께 감사하는 표시입니다. 마음의 감사가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향유가 없을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무엇으로 주님께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욕망, 재물에 대한 욕망, 권세에 대한 욕망을 다 버리라고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만들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며, 주시지 않는다고 오히려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심령입니다. 온전히 깨어지지 못한 심령입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버릴 때에, 내가 깨어질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정해진 시간에 주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전제조건이 붙어있다는 것은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내가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나를 새롭게 만들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내가 깨어진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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