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임하시면 갈라디아서 6:1-10
오늘은 성령강림주일 곧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유월절로부터 49일이 지난 다음 날이 맥추절입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이 땅에서 40일간 더 머무시다가 하늘 보좌로 올라가신 후 10일 째 되는 날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오신 날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또 우리 교회 위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성령 강림이라고 하면, 성령의 불같이 뜨거운 은혜를 받는 것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기도원에서도 두 손을 들고 외치면서 성령의 역사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성령의 역사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기대를 하게 됩니다. 이런 성령의 불같은 역사는 오순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문도들과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할 때에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고 많은 설교를 들었고, 또 일부 신학자들 중에서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언급한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종합적으로 볼 때에 오순절 성령 역사가 일어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제자들이 방언이 터져서 각 나라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 순례자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다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례자들이 어떻게 마가의 다락방을 알았겠으며, 무엇 때에 마가의 다락방을 찾아 갔을까 하는 점입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순례자들이 가는 곳은 십중팔구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루살렘 성전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를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24:47부터 보면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람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하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 회개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지식입니다. 그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이 된다고 분명히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49절에는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따라서 성령강림 때까지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는 52,53에서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며 찬송하며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5을 보면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제자들이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은 곳은 분명히 예루살렘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제자들과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 모두 합하여 120명이나 되는 성도들이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갔다는 사도행전 1:13 말씀에 근거하여, 오순절 날에도 동일한 다락에 모여서 기도했다고 하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평상시에 제자들이 모일 때에 다락방에 모였으니 오순절에도 다락방에 모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꼭 다락방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여러 사람이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들립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릴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가의 다락방은 최소한 2층일 것이고, 순례자들이 그곳에 갔을 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방언이 터졌다고 한다고 해도, 그 방언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또렷하게 귀에 들려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가 있고, 아무리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돌아보면서 기도도 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방언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 더 자연스러운 해석이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신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냐,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기도할 때에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까?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 또 성경에서 성도들에게 주신다고 기록된 말씀을 잘 믿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약속들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도로서 해야 할 일, 주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말씀은 지키지 않는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오신 것입니다.
1. 성령 강림의 이유
자 그러면 성령께서 내 마음에 오셨을 때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오순절 성령강림과 동일한 현상이 우리에게 나타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도의 구원을 위한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우리 모든 각 사람에게 적용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말씀을 심으신 것을, 기르고 열매 맺도록 만들기 위해 오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주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시고, 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일컬어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진리는 즉 주님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핵심은 돈 잘 버는 것도 아니고, 육체적으로 뛰어난 건강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벼슬을 하는 것도 아니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복된 소식, 복음은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습니까? 성경 말씀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신 것입니다.(요 1:1-15) 과거 오순절 성령강림은 이미 복음을 받은 제자들에게 힘과 용기와 소망을 주셔서,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다면, 오늘날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말씀을 심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하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성령이 임한 후 변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는데, 그 새로움은 어떤 것입니까?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이처럼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인하여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분명히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우리의 마음은 별로 변화가 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공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 때와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돈을 벌어도 정말 왕창 벌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지 않습니까? 단번에 돈벼락을 맞듯이 그렇게 벌고 싶어 합니다. 승진도 남보다 빠르게 척척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그렇게 우리 생각대로 되어 집니까?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가리켜 ‘허황(虛荒)’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아도 예언 은사를 받아서 내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싶고, 말하고 싶고, 신유의 은사도 받아서 병든 자도 척척 고치고, 기적도 행해서 자랑도 하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습니다.
내가 못하니까 다른 어떤 사람이 그런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얼마나 부러워합니까? 그리고 찾아갑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가 아니라, 내일 일을 알고 싶어요! 그래서 찾아가면 귀에 솔깃한 말을 해 주거든요. 거짓말에 속아서 입이 귀에 걸리기까지 싱글벙글합니다. 그리고 그냥 옵니까? 헌금하고 옵니다. 사기당한 줄도 모르고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또 초대교회와 같은 그런 기적을 동반하는 경우는 정말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나타날까요?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단번에 완성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되어서 지어져 가기는 하지만, 이 세상 살 때에는 완성이 되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그 때에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에서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이 앞 장에 있는 갈라디아서 5장의 내용입니다. 내 심령 속에는 두 개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마음으로 악령의 지배를 받는 ‘구습’이고, 또 하나는 성령의 법입니다. 이 두 개가 서로 싸운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법이 싸워서 이겨야만 우리 심령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열매가 맺힌다고 즉시 먹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열매가 조그맣게 달리기 시작하고 커지고 익어야 먹을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가 익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새롭게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맺혀도 자라다가 떨어지는 것도 많이 있고, 비바람이 불어도 떨어집니다. 즉 내 속에 있는 악한 구습인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않고, 맺혔다가도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매가 맺혀서 잘 익은 것을 수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의 정욕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어떻게 해야 물리칠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의 소욕만이 물리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만들 때에 악한 것들을 소멸시키고 정결케 만들 수가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그냥 살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한 날, 한 날, 한 시간 한 시간 모든 시간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위배되기는 하지만, 내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괜찮다고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는 육신의 소욕에 진 것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는 깨닫고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성령의 열매를 익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성령이 내 마음을 주관하게 만드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기도할 때에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고, 내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내가 말씀에 죽어지고 복종하게 됩니다. 기도로 내 마음을 옥토로 일구고 가꾸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할 때에 또 기도하고 싶어지고, 기도할 때에 힘을 얻을 수 있고, 말씀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빛을 발하여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성도의 변화된 삶의 모습
기독교가 세상에서 많은 욕을 먹고 있습니다. 이는 무늬만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을 수밖에 없는 핍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외치면서 내 생활이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즉 외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게 되면 불신자들은 ‘교회 다녀도 별 볼 일 없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직 성령으로 열매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으로 새롭게 변화가 되면,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오늘날 목사가 강단에서 이렇게 외치면 교회에 나올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에서는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령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지각이 없이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정상 작동하는 가운데, 차분하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가운데서 교회 생활을 하게 됩니다. 교회 생활 가운데는 이런 초대 교회의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성령으로 변화를 받은 성도가 살아가야 할 모습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5절에는 범죄한 자에 대한 성도 자세에 대하여, 6-10절은 복음을 가르치는 자에 대한 의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성령의 열매에 대한 실천적인 교훈입니다.
먼저 ‘범죄한 자’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이 범죄는 어떤 큰 죄를 지은 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혹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불법적 행위에 가담한 것을 말합니다. 즉 믿음이 연약한 자가 세상이라고 하는 홍수에 휩쓸려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이런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가 본분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아가면 그 사람들은 우리를 성도로 보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닌다면서도 할 짓은 다 해’ 저희들끼리는 한 마음이 되어서 수근 거립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왕따 성도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성도가 왕따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께 한 발, 세상에 한 발 걸쳐서 있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가 왕따지 별것입니까?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을 받는데 어떻게 왕따가 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을 겉으로 왕따를 시키지만, 그들 속으로는 그 믿음의 성도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리켜 ‘신령한 너희는’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연약한 성도를 온유한 마음, 불쌍한 마음으로 권면하여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도 돌아보아서, 혹시 나도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잘못한 것을 책망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권면을 하여 바른 신앙을 가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하는 것은 범죄한 심령이 고통을 받게 될 때에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교제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 즉 목사에 대하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물질적인 도움을 가리킵니다. 성도들 중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말하는 것을 간혹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내 할 도리만 하면 됩니다. 내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라는 말에는 물질도 포함이 되지만, 영적인 면에 포함이 되지 않으면 그 물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함께 하라’는 것은 성도의 교제를 지칭하는 것인데, 어려움을 같이 하는 것(벧전 4:13), 영적으로 친교를 나누는 것(고전 1:9), 물질을 통용하는 것(빌 4:15)입니다. 일부 성도들 가운데에는 이 물질적인 짐을 지기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는 짐을 지려고 하지 않고, 내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고 자기는 편하게 따라가기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짐을 물질적인 요소로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교회에 가면 자신이 져야 할 물질의 짐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심어야 할 것만 심으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무엇인가를 심는 사람들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You cannot make a silk purse out of a sow's ear. -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는 없다.)는 격언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판 난다는 말로, 자연의 이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의롭고 정직한 원리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지만,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되는 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입니다. 불신자들에게 잘해서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성도들끼리 잘하는 것입니다. 성도 간에 사랑이 없이 불신자에게 잘해주는 것은 결코 하나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잘 섬기고, 그 다음에 성도를 잘 섬겨야 하고, 그 다음에 불신자의 순서입니다. 섬기는 것은 한 번 두 번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심다보면 반드시 거두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지만 믿음 가운데 끝까지 십자가를 부여잡고 나아갈 때에 영생을 거두고, 주님의 칭찬을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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