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누구의 마음을 얻으려고

chukang 2012. 5. 19. 12:18

누구의 마음을 얻으려고 사도행전 25:1-12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하면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도록 창조가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짐승, 짐승과 짐승, 그리고 사람과 식물 등 자연환경과의 관계, 서로서로 깊은 연관을 가지고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집에서 개를 키우고 있다든지, 아니면 길에서도 두 세 사람이 개를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서로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고, 손짓합니다. 개가 자기에게 오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이 짐승으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되면 마음이 기뻐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할까요? 왜 인정을 받으려고 할까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인정받고 칭찬을 받을 때 마음이 기뻐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일종의 욕심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인정하고 칭찬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그 사람이 싫어지고 미워지는 마음이 듭니다. 칭찬만 받고 자란 사람은 그 성격이 편협해 지게 되고, 자신은 인정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인정해 주지 않는 성향으로 진행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할 때에는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오히려 미치지 못함만 못하다.’는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또 내게 경제적인 유익을 가져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건 하나 팔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원자재를 공개하고, 생산 공정을 공개하는 것은 그 제품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특히 경쟁 제품이 있는 경우에는 더 심해집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소비자의 마음을 얻어야 판매를 할 수 있고,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가리켜 ‘마켓팅’이라고 합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실현 불가능한 것들까지 공약으로 내세웁니다. 국민들이 모르는 부분도 있지만, 당선이 되기 위해서라면 온갖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는 잘못된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권력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이 어떤 유익인지는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 내게 유익이 될지라도 나중에는 해로운 것으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 꼭 신체에 유익한 것만이 아닌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람을 마음을 얻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려고 애쓰는 사람도 등장을 합니다. 우리 성도는 누구의 마음을 얻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성도로서의 우리의 삶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오늘 말씀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유대인들이 그곳에 헬라인과 함께 있는 바울을 보고, 바울이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서 더럽혔다는 누명을 씌워 바울을 잡아 끌고나가서 그를 죽이려고 때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난 것은 천부장이 알고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일단 바울을 구출해 내고 군대 진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이후에 소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 바울을 심문하려고 할 때에, 자신이 ‘로마인’임을 밝힘으로써 모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은 죽이기로 결심하여 무려 40명이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바울의 생질이 이를 알아차리고 천부장에게 알려서, 천부장은 군대를 동원하여 바울은 총독이 벨릭스에게로 안전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썼습니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송사하는지 알고자 하여 저희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송사하는 것이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게 하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송사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를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행전 23:27-30)

  이처럼 천부장은 올바른 판단을 하였습니다. 바울을 보호해 주는 대가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군중들이 소동하는 내용을 정확히 판단하여, 그들의 폭동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인임을 안 후에는 자신의 권한으로 처리할 수 없게 되자, 총독에게로 안전하게 호송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당시 총독인 벨릭스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송사하는 자들과 바울을 함께 대질하고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벨리스도 역시 바울의 말이 옳은 것을 알고는 부하들에게 이르되, 지키기는 하되 자유를 주고 어느 누구든지 바울에게 수종드는 것도 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벨릭스의 아내는 유대인으로 ‘드루실라’인데 함께 바울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하여 강론을 하니 두려워하며, 바울을 보내고 다음에 틈이 날 때에 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벨릭스는 바른 판단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 가지 그것은 바울로부터 혹시나 돈을 받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자주 바울을 불러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행 24:27) 벨릭스는 바울에게 죄가 없음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무려 2년 동안이나 구류하고 있었습니다.

 

  벨릭스의 모습에서 오류를 찾아내야 합니다. 첫째,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소요를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는 별 탈 없이 임기를 채운 뒤에 후임자인 보르기오 베스도에게 총독의 지위를 물려주기를 원했습니다. 둘째,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함입니다. 바울을 풀어줌으로써 야기될 유대인들의 반감을 두려했던 것입니다. 셋째,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바울은 2년 동안이나 잡혀 있었습니다. 2년 동안 벨릭스는 바울로부터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아무리 좋은 말, 옳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이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결코 회개와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방법은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에 열고 영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벨리스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불의한 일을 행했습니다.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일을 편하게 할 수가 있고, 어려울 때에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동기와 목적이 올바르지 않게 되면,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든다고 해도 악한 행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뒤에 부임한 베스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르기오 베스도(Porcius Festus, A. D. 60-62)는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지 2년 만에 죽었는데, 벨릭스에 비하여 선량한 치리자로 평가되고, 온화한 성품으로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임한 지 3일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이는 매우 빨리 움직인 것으로,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기타 유대 지도급 인사들과 유대 관계를 한시 바삐 맺기를 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파벌로 심각한 상황이었고 또한 전임 총독 벨릭스의 실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행 24:27) 이를 개선하려고 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신임 총독 베스도와 만난 자리에서도 사도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매우 크기 때문에 2년 이상의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임 총독이 방문한 때가 바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대개 새로 부임한 지방 행정관들은 주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를 활용하여 어떻게든지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베스도에게 압력을 가하여 바울에 대한 재판을 예루살렘에서 열게 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계획의 뒤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자객들을 매복시켜 바울을 죽이려는 음흉하고 악랄한 계획이 숨어 있었습니다. 혹시 암살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성전을 더럽혔다는 종교적인 죄목으로 산헤드린 법정에서 합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이런 말을 듣고는, 자신의 법정이 있는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송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유대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스도를 통하여 악인들의 생각과 계획을 흐트러뜨리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예루살렘에 오래 있을 것이 아니며, 업무상 가이사랴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굳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재판을 받게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유대인들의 요청을 일축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을 세울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하나님이시라”(잠 16:1, 9; 19:21)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좋은 계획을 세웠든지 아니면 나쁜 계획을 세웠든지 모두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이 가이사랴에 돌아온 후에 유대인의 요청에 따라 공식적인 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베스도는 총독으로 재판장이 되어 재판을 주재하였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아무런 죄가 없으나 공식적인 재판만 3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재판 과정에서도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한 죄를 입증할 수가 없었습니다. 증인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의 고소 역시 모함임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고소하는 내용에 대하여 변론을 하였으며, 단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증거하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소동이 있었음을 밝혔습니다(행 24:21). 그리고 그 부활에 관한 믿음도 실상은 문제가 없음을 이미 밝혔습니다(행 24:11-21).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행 25:8)고 법정에서 분명히 선언을 한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도 이런 재판 과정을 통하여 바울의 무죄를 이미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스도는 바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제안에 대하여 잘라 말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죽기를 사양하지 않을 것이지만, 나를 송사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이 아니게 때문에 결코 재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가이사께 호소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고, 총독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더 높은 곳, 즉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벨릭스와 베스도의 예를 볼 때에 하나님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공의를 행하기보다 자신의 이해득실을 살펴서 자신에게 이롭거나 득이 된다고 판단이 되면 얼마든지 공의를 버릴 수 있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모습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사람일지라도 상대방의 재물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는 것이나, 상대방을 밟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 행위들이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바울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와 부활의 진리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바울의 변론이 지어낸 것이나 허탄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받은 복음을 저버렸습니다. 즉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이나 또 내 자신을 돌아보면 내 유익을 위하여, 내 쾌락을 위하여, 내 자존심을 위하여, 내 편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팽개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되다보면 결국 벨릭스와 베스도와 같은 인물이 될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빠져들게 되면 악독한 유대인 간악한 제사장들과 같은 무리가 될 것입니다.

  은혜는 올 때에 받아야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를 찾아오셔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에 응답하고 열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을 기회를 놓치는 것은 지옥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일 택함을 받은 자가 문을 열지 않을 때에는, 그에게 온갖 고난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고난은 질병으로 찾아 올 수도 있고, 직장의 문제로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대인 관계의 문제로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릴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 큰 고난 속으로 몰고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는 자들은 아무리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해도,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것이 가장 소중합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가치가 많이 나가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식과 지혜입니까? 재능입니까? 재물입니까? 아니면 권력입니까? 가치라고 하는 것은 내 자신을 포함하여 세계나 만물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가치에는 상, 중, 하가 있다고 합니다. 가장 낮은 가치는 이 세상에서 내가 많이 가지면 남은 가지지 못하거나 적게 가지게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권력, 부귀영화, 명예, 돈, 욕심 등은 내가 많이 가지면 남이 적게 가지거나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는 교만, 자만, 화냄, 불평, 사기, 기만 등등입니다.

  이런 낮은 가치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혼자 가지는 권력이나 독재를 경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명예도 부귀도 모두 동일합니다. 이런 낮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사람을 높게 평가합니까? 돈이 많은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후 6:10)고 분명히 경고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높은 가치에는 무엇일까요? 내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남에게 도움이 되거나 유익이 되고 덕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 이해, 감사, 위로, 충성, 봉사, 섬김, 겸손, 배려, 나눔, 축복, 칭찬, 용서하는 마음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높은 사람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간 가치에 속한 것들도 있습니다. 쓰이는 용도에 따라서 높은 가치가 되기도 하고 낮은 가치가 되기도 하는 것들입니다. 정보, 지식, 건강 등입니다. 정보나 지식과 건강은 악하게 쓰면 낮은 가치가 되고 선하게 쓰면 높은 가치가 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남을 돕는데 사용하면 그 힘은 높은 가치가 되지만, 만약 그 힘으로 강도짓을 하거나 약한 자를 괴롭힌다면 낮은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어떨까요? 세상에서는 기독교나 천주교나 불교를 높은 가치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는 종교로 분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당장 필요한 것을 공급하거나, 위로를 해 주었다고 높은 가치의 종교가 될 수 있을까요? 조금만 더 길게 보면 그 앞길이 낭떠러지인데 지금 당장 편한 길로 가게 한다면 그것이 유익을 주는 가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일부는 낮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 예수를 믿으면 건강해 진다는 것이 목표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부수적으로 받는 것이 건강과 부요함이요, 평안과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급속도로 무너져가는 것은 바로 이 낮은 가치를 중심으로 교회들이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급속한 경제 발전과 과학과 의학의 발달은, 교회에서 외치던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되는 것들을 대체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서 하는 이런 말들을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세상적인 종교나 윤리가나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데 교회가 낮은 가치를 중심으로 외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오직 낮은 가치를 찾아 방황하는 이때에,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노아가 그랬지 않습니까?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오직 노아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갔을 때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하나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매를 맞아 죽을 뻔 했어도, 감옥에 갇혔어도, 총독 앞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8-14)

 

  우리가 아직 잡지 못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신앙이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믿음이요, 십자가의 믿음은 하나님의 부름의 상과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혼란 속에 있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께 내 가치관을 둘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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