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 뗀 아이처럼 시편 131:1-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어떤 것일까? 태어나서 자란 곳에 대한 추억이나 동경은 항상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아름답게 생각이 됩니다. 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산이 가장 아름답고,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은 바닷가 풍경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성장하면서 많은 것을 접하면 또 다른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좋아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 나무나 돌이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 들녘의 곡식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 도시의 빌딩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고, 일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합니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인류의 시각에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과 또 추구하는 방식이나 표현 방식이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초기 미술부터 중세시대까지의 미술은 종교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고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이 되는 것은 종교 중심 즉 신 중심의 미술에서 벗어나서 인간 중심으로 옮겨가면서부터입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미술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을 합니다. 종교로 인하여 억눌린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당시의 그림을 보면 남녀의 신체를 소재로 한 것들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화가로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에 여성의 몸이라고 말을 했는데, 여기에서 좀 더 발전하여 여성의 몸보다 아름다운 것이 남성의 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보편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엄마의 젖은 빠는 아기, 엄마의 품속에 잠들어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평화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남자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자의 모습과 엄마로서의 모습을 닮은 마리아 상을 만들고, 또 아기 예수를 상징한다고 하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마리아 상까지 만들어서 교회 입구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포인트가 되는 것은 ‘젖 뗀 아이’입니다. 그러면 시편 기자는 무엇 때문에 엄마 젖은 물고 있는 아기가 아닌 젖을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을까요? 젖을 물고 있는 시절의 아기는 오직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본능적인 욕구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지만, 젖을 뗀 아이는 이런 원초적인 욕구와 불만족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습에서 어떤 면을 느낄 수 있습니까? 아마도 ‘평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샬롬’이라는 말은 ‘안녕, 평화’ 이런 뜻으로 사용이 되는데, 본래는 전쟁을 하다가 쉬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쟁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만 합니다. 내 나라가 이기기 위해서는 적국의 병사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죽느냐 죽이느냐의 긴박한 전쟁이 끝나고 찾아오는 ‘쉼’이 바로 샬롬입니다.
전쟁 중이라도 새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기 마련입니다. 영유아기를 벗어나 성장하고 있는 어린이의 눈에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 또 전쟁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노동의 고통 등도 다 들어갈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집 안팎을 드나들거나 엄마 곁에 있는 것뿐입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든지 놀다가 피곤해서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을 자고 있는 어린이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고통도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어머니를 하나님으로, 어린이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유하여 노래하였습니다. 저자인 다윗은 일평생 자신이 겪은 일들을 토대로 어떻게 해야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자신은 어떤 일을 만나든지 오직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시기를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자신은 마치 엄마 품에 안기듯이 하나님의 품엔 안겨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 품 밖에는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그 답은 바로 1절에 있습니다.
1.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마음(레브:לב)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중심부를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시작이 되는 곳입니다. 창세기 20:5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온 나라가 멸망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에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다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마음이 악한 생각으로 사라를 뺏으려고 한 것 아님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꿈에 나타나셔서 그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마음을 돌이키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그 마음에 이미 아내의 순결보다 자신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누이’라고 아비멜렉에게 소개를 하였다가 정말로 빼앗길 뻔한 사건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즉 아비멜렉도 그렇고 그 누구든지 어떤 행위를 할 때에는 그 행위가 온전한 것이든지 아니면 잘못된 행위든지 간에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행동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행동 중에서는 제일 먼저 말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에는 자신의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아이들의 마음이 순수합니다. 순수하다는 말은 때 묻지 않고, 교만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성장할수록 마음에 나쁜 것들이 스며들게 됩니다. 이 나쁜 것들이 처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자꾸만 싸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옳지 않은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상대방이 교만한 모습을 보이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다음에 또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상대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상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구원의 길에서 탈락한 사람입니다. 지옥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이나 세상 사람들이 더 옳고 바르다고 생각하여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큰 잘못을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잘못 중에서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서 이미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종인 것은 누구나 인정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행한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강행한 적이 있습니다. 요압 장군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말라고 충고를 하였지만, 이미 그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에 인구조사를 강행했습니다. 당시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는 칼을 잡을 수 있는 장정, 즉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즉 자신이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음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했는데, 다윗 자신도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것을 체험했지만, 나라가 강건하게 세워지니까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으로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 내었을 때 자만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 지혜가 출중해서, 내 재능이 특출나서, 내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혜, 재능, 열심 이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마음,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요일 5:3)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데, 복 중에서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이 바로 ‘샬롬’ 평화입니다. 주님 품 안에서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2.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눈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 영적 상태를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지은 후에 나타난 현상이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창 3:5,7) 그들의 눈은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죄를 지은 후에는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악한 것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악해진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눈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마 5:8)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마음이 청결하게 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 속에 하나님의 형상(image)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는 모든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나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셨나요? 그렇다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는지를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 어떤 자세로 교회에 나왔는지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부르짖는 성도를 왜 만나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못 들은 체 하시겠습니까? 왜 복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정상적인 상태라면 내 신앙이 어떤 줄을 자신이 더 잘 압니다. 그러나 내가 악한 영에게 미혹이 되어 있다면 나는 옳은데 너는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 정도 기도했으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야 하는데 왜 안 들어주시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겨우 이 모양, 이 꼴로 살도록 만들어 놓으셨나보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교만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끝내는 다른 성도들에게 그 화살을 돌리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성도가 교만하게 되면, 그 교만을 꺾으시기 위하여, 꺾일 때까지 징계가 끊임없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의 방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은 높은 눈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내 마음을 늘 살피는 눈입니다. 하나님 앞에 낮은 자가 되어 사랑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큰일, 기이한 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말합니다. 또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는 설교를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지 못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그런 일이 나타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이 산들로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 21:21, 막 11:23)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기도한다고 정말로 산들이 들려서 바다에 던져질까요? 하나님께서 능치 못하실 일은 분명히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그런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큰 일과 기이한 일은 어떤 것이 해당이 될까요? 해서는 안 될 기도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거스르는 일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들은 그런 악한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의학의 힘을 빌고, 과학의 힘을 빌어서 하지 못할 일들, 하면 안 되는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원시 신앙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우상숭배를 공공연하게 행하려고 합니다. 귀신을 숭배하려고 합니다. 사탄을 섬기며 지옥으로 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서는 거짓 그리스도의 모습과 천사로 가장한 모습으로 은밀하게 신앙을 파괴하고, 밖에서는 공공연하게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하고 있는 양면 공격을 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과 미신 또한 동일한 사탄의 양면전략입니다.
한 인간 개인으로서 큰 일과 기이한 일은 자신의 뜻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면 사람들로부터는 대단하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품에서는 자꾸만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부인하는 자들, 십자가의 구원을 부인하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부정하는 자들,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자들은 모두가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세하는 교만하고 또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겉보기에는 매우 훌륭해 보입니다. 자신도 사람들 앞에서 으스댑니다. 그러나 돌아서서 혼자가 되면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쫓아오는 것 같고, 나를 초월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걱정을 넘어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욕망을 표출 뒤에는 항상 불안과 초조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을 밟고 일어선 사람, 남을 뒤에서 비방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강한 체하고, 자신이 옳은 체 하지만, 스스로의 마음과 양심은 찔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보이려고 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각 개인에게 말하듯 하던 것을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각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인 동시에, 교회 공동체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때로는 각 개인은 못하는 일을 단체를 앞세워 행할 때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 개인보다 단체가 나서는 것은 좋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단체가 나서는 것은 그 단체와 그 속에 속해 있는 개개인 모두가 함께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직 여호와만 바라야 할 것입니다.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과 같이, 우리도 어린아이의 순전한 심령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주님 품 안에서는 근심 걱정 모든 염려가 없습니다. 십자가 아래 모든 짐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품 안에서 사랑 받는 성도가 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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