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루살렘 계시록 21:1-8
지난 4월 11일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각 정당과 후보들마다 제각기 공약을 내걸며, 국민을 섬기며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정권들은 새 시대 새 역사를 이루어가자고 외칩니다. 이전에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말합니다. 지난 정권은 부패하였으니 심판을 해야 된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그 어떤 정권도 부조리와 불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지 싶습니다. 어느 정당이나 더러운 모습을 감출 수가 없는데, 서로 깨끗하다고 주장하고 진흙탕에서 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성도로서 좀 더 분별력을 가지고 택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악한 세력을 경계하는 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중국, 몽고, 거란, 또 일본에게까지 침략을 당했습니다. 한 왕 아래서도 신하들은 싸워야 한다는 편과, 화친해야 한다는 편으로 항상 갈려서 당파 싸움을 했습니다. 지금은 정당끼리 나누어져서 동일한 입씨름을 하면서, 정권을 잡는 편에 따라 화친을 위해서 물자를 제공하기도 하고, 공갈협박 등 위험 요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도 합니다. 어느 쪽이 정답일수는 없지만, 최소한 국가적 자존심은 세워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악한 사탄 마귀가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전쟁과 기근이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도 기독교 정당 2군데가 선거에 나섰지만 한 명도 당선을 시키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이 800만 명이나 되는데, 기독교인들마저도 기독정당을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정당을 만든 기독교 지도자들을 성도들이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독교인들이지만 역시 세상적인 판단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너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패한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로 부패를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의무가 있는 것은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이라고 칭함을 받고는 있으나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어져가고 있는(엡 2:22) 과정에 있습니다. 그 마지막 완성이 되는 것을 가리켜 완전한 성화라고 부르고, 그 성화를 이루는 것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에서만이 우리의 영혼이 완전히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는 있어야 하는데, 요즘 기독교계의 흐름을 보면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오히려 세상에 자신들을 맞추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계도해야 할 사람들이 악하고 추한 세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도 즉 거룩하게 구별된 신도의 모습은 사라지게 되고, 오히려 말씀을 따라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 성도를 향하여 비웃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고 하였습니다. 고통이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교만, 훼방, 부모 거역, 감사가 없음, 거룩하지 않은, 무정, 원통을 풀지 않음, 참소, 절제치 못함, 사나움, 불의를 좋아하고, 배반하고, 자고하고, 쾌락을 즐겨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성도입니다. 즉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 속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즉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적인 유혹을 이겨내려고 노력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따라가고 즐기고 있는 오늘날의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우리부터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실한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바로 주님의 때, 재림의 때, 천국의 생활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삶 속에서 나를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하였으니 멀리해야 합니다. 당장에는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은 내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삶이므로 물리쳐야만 하는 악한 것입니다.
마지막 그 때는 오늘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일곱 천사를 보내어 이 땅의 모든 악을 소멸시킨 후에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예루살렘 성은 그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과 같이 맑다고 하였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은 벽옥을 쌓았고,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열 두 문이 있는데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지만 그 성전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죽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얼마나 밝고 아름다운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가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햇빛과 달빛보다 더 밝기 때문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이 되시는 곳입니다. 그 예루살렘 성은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오직 성도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의 눈에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고 곡하는 것도 없고 아픈 것도 다시는 없습니다.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 속에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사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천국에 없는 것이 3가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사망이 없습니다.
사망은 죄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롬 5:12). 그러므로 죽음은 죄의 문제를 일으킨 사단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최대의 비극으로 우리 인간들이 짊어져야할 최고의 슬픔과 고통입니다. 죽음이야말로 우리 인간 삶의 불안과 고통을 만들어 내는 근원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피해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보았습니다. 진시황의 불로초, 이집트의 미라가 바로 그런 노력들의 일환이요, 불교에서는 이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고 윤회설을 만들어 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며, 이 세상에서 죽음이란 것을 배제할 수는 절대로 업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망이 두려울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 뒤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하면 캄캄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귀신들이 우글거리고 한 치 앞도 제대로 내다볼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둘째는 내가 세상에 살면서 지은 죄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것 때문에 벌을 받지는 않을까? 내가 세상에 살면서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서 해코지를 당하면 어떻게 하나?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무서운 곳으로 끌려가서 형벌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 세상에 떠도는 지옥에 대한 소문들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사모하고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러한 사망이 없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성도는 영원에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더 이상 사망이 지배할 수 없고, 오직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이루신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일만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한 불안함도 없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도 없고, 가족을 여윈 슬픔도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존재도, 천사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떤 것도 없고, 오직 주님의 보살핌과 사랑만이 넘치는 그곳이 우리가 앞으로 갈 곳임을 믿기 바랍니다.
2. 고통이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장차 온전히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에는 고통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희로애락이 번갈아 오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슬픔과 고통이 더 많이 연속되는 삶입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눈물과 한숨과 신음 소리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육 간에 질병을 가지고 있고 그 질병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병원이 수없이 많아도 병원마다 환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병원에 가지 않을 정도의 병이라도 고통은 따를 것입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들을 보면 육체에 찾아오는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온 몸을 비틀고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신음을 합니다. 못 배워서 무시당하는 고통, 가난해서 멸시당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못생겼다고 차별을 당하는 고통, 인종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무시당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고통이 없는 곳을 상상하기도 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노력을 해 보기도 합니다. ‘유토피아’라는 가상의 천국도 있습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토머스 모어경이 〈국가의 최선 정체(政體)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1516)라는 라틴어 제목으로 출판한 〈유토피아 Utopia〉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의 '아니다'(ou)와 '장소'(topos)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아무 데도 없는'(nowhere)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어는 1515년 플랑드르에서 대사로 지내는 동안 이성에 의해 정책과 제도가 전적으로 지배받는 이교도의 공산주의 도시국가를 그린 〈유토피아〉 제2권을 썼습니다. 이 책에 묘사된 국가의 질서와 위엄은 자기이익과 권력 및 부에 대한 탐욕으로 분열된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비이성적인 정책과는 눈에 띄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유토피아에 대해서는 신비에 싸인 여행가 라파엘 하이슬러디가 공산주의만이 사적·공적 생활에 만연해 있는 이기심을 없애는 유일한 치유책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토피아를 언급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 Politeia>가 유토피아의 모델입니다.
이뿐 아니라 종교지도자나 실업가는 실제 이 땅에서 이상향을 만들어 보려고, 공동체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의 특출한 예언가나 재력가가 만들지만 이들이 죽은 후에는 그 공동체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이상향이라 하는 곳은 없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 세상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아픔과 괴로움이 치유되고 슬픔을 위로받은 복된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은 기쁨과 희락이 영원히 계속되며 하나님의 영광만이 가득 찬 곳입니다.
3. 악인이 없습니다.
27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 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과 불의한 죄인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죄를 씻고 의롭게 된 자들만이 모이는 의로운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에 가는 사람들이 전혀 죄를 지은 적도 없고, 평생 의롭게 산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이 세상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하여 용서를 받기 날마다 성화된 삶을 살고자 노력한 자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인정해 주시고 그들의 부족한 의를 사랑으로 감싸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가시고 완전히 성화된 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죄 가운데 거하기를 고집하고 악을 좇아 살던 자들은 결단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 불에 떨어지고 맙니다. 악인은 살인, 강도, 사기, 폭력 등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악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이들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에 그들은 선한 사람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악인은 주님을 믿지 않는 자를 뜻합니다. 교회를 비판하고 성도를 괴롭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장래가 없습니다. 그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고,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망하도록 그들의 길이 작정되어 있습니다(시 1:4; 사 17:13).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를 좇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으며, 그 나라에는 결코 어떤 악한 세력도 없기에 완전한 평화와 안식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해함도 상함도 없습니다. 그곳은 다투는 소리나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평화로운 곳입니다. 사망과 고통, 악이 없는 참된 안식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굶주리는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 악을 행하며 의인을 핍박하는 자들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런 복되고 평화로운 나라에 우리가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지금은 다소 무겁게 느껴지고, 힘들게 느껴지고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만을 대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에 마음이 천국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에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귀를 막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은혜가 시작이 됩니다. 순종할 때에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맡겨주신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더욱 능력이 생기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가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품에 안기는 그 날까지 우리 모두 힘을 합하여 내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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