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또 어떤 일이 열왕기하 4:17-37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10년 후 한국 경제를 책임질 10대 미래유망기술’을 선정해 발표했습니다. 10대 기술로는 암 바이오마커(bio-marker·생체지표) 분석 기술, 실시간 음성자동통역 기술, 스핀 트랜지스터, 미생물 연료전지, 슈퍼 독감백신, 초전도 송전 기술, 디지털 홀로그래피 기술, 바이오 플라스틱, 4G+ 이동통신 기술, 친환경 천연물 농약이 꼽혔습니다. 슈퍼 독감백신은 한 번만 맞으면 되는 전천후 독감백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독감백신의 수명이 1년이기 때문에 매년 한 차례씩 맞아야 합니다. 독감백신은 특정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항체 한 종류만으로 만드는데, 매년 바이러스의 종류가 달라지다 보니 백신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슈퍼 독감백신은 바이러스가 변해도 예방 효과가 같아지도록 ‘범용 항원’을 이용해 한 번만 맞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암 바이오마커는 정상세포에는 없고 암세포에만 나타나는 물질입니다. 혈액에서 암 바이오마커만 찾아내면 암에 걸렸는지를 간편하고 신속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암 바이오마커만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는 약물을 개발하면 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표적항암제’가 됩니다. 은행, 살구씨, 고삼 등 식물에 들어 있는 천연 항충·항균 성분을 이용해 병충해로부터 작물을 보호하는 천연물 농약과, 살아 있는 미생물을 촉매로 쓰는 미생물 연료전지도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로 꼽혔습니다. 또 10년 뒤에는 초전도 케이블을 꽂아 집에서 간편하게 전기자동차를 충전하고, SF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집에 놓고 3차원 영상을 생생하게 즐기거나 손목에 자동 통역기를 차고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게 흔한 일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과학기술이 어떻게 발전하고 또 어떤 모습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할지를 예측하고, 그 예측은 상당부분 맞아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변수는 반드시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기술이 최고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기술이 개발이 되기도 합니다. 범용 항원을 이용한 수퍼 독감백신이나, 암 바이오마커와, 천연항충, 항균 농약과 같은 것들은 더욱 변수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변종 바이러스나 알지 못했던 병균들로 인한 생명의 위협이 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 농업을 위해서 천연 농약이 매우 중요하지만, 농약으로 인한 피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급작스러운 자연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불어온 태풍이나, 한파와 같은 것들은 농작물을 수확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형까지도 바꾸어 놓을 정도로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기상이변은 물론이며, 새로운 강대국의 탄생으로 인한 나라들의 멸망들도 기록이 되어 있지만, 이런 것들까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며 마음에 와 닿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주신 말씀에는 예측할 수 없는 매우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가까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서 많은 공감이 될 것 같습니다.
한 가정이 있습니다. 이 가정은 매우 부유한 가정이었지만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후사 즉 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가정에 귀한 늦둥이가 태어나게 되는 과정과 이 귀한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다시 부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했기에 이 가정에서 아들을 얻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사무엘을 낳은 한나와 같은 기도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아들은 왜 갑자기 죽게 되었을까요? 이런 일련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신앙의 자세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그 기적의 역사는 어떻게 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아들의 잉태와 출산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극적이면서도 매우 존귀한 것입니다. 1개의 난자와 1억 개의 정자 중 가장 튼튼하고 빠른 것 단 1개가 만나서 생명체가 탄생한다 하니 얼마나 극적이며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아들 중에서 가장 극적으로 출생한 것은 아마도 ‘이삭’이 아닐까 쉽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100세에 태어났고, 믿음 가운데 제물로 바쳐질 뻔 한 극적인 상황까지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또 정실부인이면서도 아이가 없어서 후처로부터 멸시를 당하던 한나는 서원한 끝에 그 훌륭한 선지자 ‘사무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사실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태어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극적인 탄생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은 두말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한 ‘귀한 여인’이 있습니다. 귀한 여인이라는 말은 ‘큰 여인’이라는 뜻인데, 재산이 있는 부유한 여인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늙었다고 하는 표현(14절)으로 볼 때에 이 여인이 적지 않은 나이인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그런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이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엘리사가 수넴이라는 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에서 엘리사는 한 ‘귀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귀한 여인은 선지자를 알아보고 간권(懇勸: 정성스럽게 권하는 것)하여 자신의 집으로 와서 음식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엘리사는 그 동네를 지날 때마다 그 여인의 집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와 수넴 여인이 알고 교제를 하게 된 기간이 얼마인지는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일정한 기간 동안 상호 간에 깊은 신뢰가 쌓이게 되었고, 엘리야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종에게 무엇인가 봉사를 하고 싶은 갈망이 생기게 되었고, 남편에게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제안은 엘리사가 자신의 집에 올 때에 편히 쉴 수 있는 방을 하나 만들고 그 안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갖추어 놓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엘리사는 그 집에 올 때마다 그 방에 들어가서 쉬기도 하며 명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도 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을 알아보는 뛰어난 영적 분별력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엘리사를 위하여 방을 만들고 가재도구를 마련하도록 남편을 설득하였다는 것도 큰 각오와 헌신의 마음이 없이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수넴 여인의 열심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최대한 발휘하는 모범적인 신앙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의 헌신이 오늘날 교회에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 수넴 여인의 헌신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누군가가 나에게 잘해 준다면 왜 잘해줄까? 어떤 흑심이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한동안 지켜보기도 하고 자세히 관찰해 보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서 아무런 이해타산이 없이 정말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봉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는, 나도 그 여인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게하시를 시켜서 여인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고 묻게 됩니다. 이는 이 여인이 선지자인 엘리사에게 경외심이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소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게하시를 통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소원을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부름을 받고 와서도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는 엘리사에 대한 겸손과 존경의 표시로 방문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매우 영특하였기 때문에 그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마 여인의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 즉 ‘아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물론 이 수넴 여인은 아들이 없음으로써 고통을 받고 있다든지,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주지 않았느냐고 불평이나 원망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모든 여인들은 아들이 없게 되면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게하시는 그녀가 자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간파하여 엘리사에게 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내년 이맘때면’이라는 뜻입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소망을 알게 되자 주저없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늙어서 받은 그 은총을(창 18:10-15) 이 여인에게도 허락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수넴여인은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뜻은 ‘당신의 종을 어떤 거짓 소망으로든지 설레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엘리사의 말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사라가 그랬던 것처럼(창 18:12,13) 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말대로 잉태를 하고 돐이 돌아오매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2. 아이의 죽음과 원인
이 아이가 자라서 정확히 몇 살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아이’라는 단어를 볼 때에 말 그대로 ‘아이’라고 번역하는 ‘엘레드’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5,6세 정도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아이가 그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었다는 표현으로 볼 때에도 크게 장성한 나이는 아닌 것으로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추수 때에 아버지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아버지에게 ‘내 머리야 내 머리야’합니다. 아기가 자기 머리가 매우 아픈 것을 고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아버지는 즉시 엄마에게로 데려가도록 했습니다. 이 아이는 낮까지 엄마 무릎에 앉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기절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은 것을 말합니다. 학자들은 이 아이가 죽은 이유를 무더운 때에 추수하는 밭에 나갔다가 일사병에 의한 뇌염으로 죽은 것으로 봅니다. 당시 일사병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매우 흔한 것이었고(시 121:6; 사 49:10), 추수기는 일 년 중 가장 무더워 일사병이 빈번하였고, 이 일사병은 치명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늦둥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찰 노릇입니까! 그런데 이 수넴 여인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겠지만 매우 냉정할 정도로 이성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은 아이를 일단 엘리사가 사용하던 침상에 눕힌 후에 문을 닫았습니다. 아마도 아들의 시신이 엘리사가 올 때까지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이 여인의 행동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점은, 아들의 죽음을 끝이라고 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이 말은 엘리사 선지자라면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갔다 오겠다는 아내의 말에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질문에서 아들이 죽은 이유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하루, 안식일’도 아닌데..... 이 말은 당시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초하루, 즉 월삭과 안식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수넴여인이 월삭과 안식일에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갔으며, 그 때에만 엘리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제사를 드리는 날도 아닌데 왜 선지자에게 급히 나가려고 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수넴여인은 남편의 묻는 말에 다만 ‘샬롬’이라고 했습니다. 아무 일 없다, 걱정하지 말라는 보통 안부의 물음에 대답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도 자기 아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믿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왜 아들이 죽었는지 그 이유를 눈치를 챘습니까? 지혜로운 성도는 아이의 죽음이 부모의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이를 갖기까지 여인은 주의 종을 어떻게 섬겼습니까? 자기 집에 선지자의 방까지 만들어 놓고, 유하게 하면서 은혜로운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는 주의 종을 잘 받들어 섬겨야만 복을 받는다는 편협한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사탕발림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진실된 주의 종을 주님 안에서 잘 섬길 때에 복을 받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복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월삭과 안식일에만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것은, 아이가 생기기전의 그 헌신적인 신앙의 모습을 상실했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수넴여인이 엘리사에게 나아가서 염치도 체면도 팽개치고 그의 발을 부둥켜 앉았습니다. 왜 울고불고 살려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을까요? 안겨도 그의 무릎이나 가슴에 안겨서 응석도 부리면 될 텐데 왜 하필이면 발을 껴안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목사님은 선지자의 발걸음이 그녀의 가정으로 향할 때에 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엘리사가 더 이상 수넴여인의 집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신실한 종의 발걸음이 성도의 가정으로 향할 때에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의 종들이 성도의 집에 들어가야만 복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신실한 주의 종이 그 집에 가서 축복 기도를 해 줄 때에 은혜를 받고 복도 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수넴여인이 전에 하던 헌신적인 봉사가 아들을 낳은 후에 끊어졌음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봉사의 은사를 받은 수넴여인으로 하여금 다시 그 은사를 통한 봉사를 회복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경고의 메시지가 아들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3. 아들의 부활
자신의 발을 앉은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엘리사가 물었지만 여인은 다만 ‘샬롬’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발을 붙잡고 매달리는 것은 도움이 절실하다는 요청입니다. 엘리사는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는 것을 간파하고는, 떼어놓으려는 게하시를 말렸습니다. 여인은 엘리사에게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안니하더이까?’(28절) 이는 직접적으로 아들의 죽음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에 빠져 순간적인 감정을 표출한 것입니다. 이런 행동이 불신앙은 아닙니다. 가장 신뢰하는 사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숨김없는 슬픔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엘리사는 사태를 파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앉은 그대로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아무하고도 인사도 하지 말고 대답하고 하지 말고 가서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져야 합니다. 선지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물건에 능력이 있을까요? 모세의 지팡이나 바울의 손수건과 같은 능력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물건일지라도 그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즉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만 어떤 일이든지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게하시는 엘리사가 시키는대로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팡이에는 아무런 효력도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그 지팡이를 통해서 어떤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도 않았고, 사실 그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게하시는 그 지팡이에 어떤 마술적이거나 주술적인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왜 그럼 시켰을까요? 두 가지의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게하시로 하여금 미신적인 신앙은 아무런 이적도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며 전적으로 의지할 때에만 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며, 이런 과정을 보며 수넴여인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하여 스스로 깨닫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집에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사용하던 방에 죽은 아이가 침상에 뉘여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문을 닫고 기도했습니다. 그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입과 입, 눈과 눈, 손과 손을 대고 엎드렸더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졌습니다. 내려와서 방안을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올라 엎드렸더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떴습니다. 부활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기에서 왜 엘리사가 그 아이의 몸에 올라갔느냐고 물을 것은 없습니다. 그런 행동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의미에 대하여 집착하게 되면, 나도 그렇게 하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착각하게 되고, 따라서 하게 되면 그것은 미신적, 주술적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의 행동은 다만 자신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아이에게 전달되어 회생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과 기원의 모습입니다. 엘리야도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회생시킬 때에 그 아이 위에 3번이나 엎드린 적이 있습니다(왕상 17:21).
자 아들이 부활 회생한 것에 대한 답을 찾으셨습니까? 답은 엘리사가 그 발을 옮겨 수넴여인의 집으로 갔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수넴여인과 주의 종 사이의 교제가 다시 연결되었음을 뜻합니다. 주의 종과의 관계의 회복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믿음의 회복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떠나서는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은 그 발걸음은 교회로 다시 옮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는 그 어떤 응답도 없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수넴여인과 같이 헌신하다가 의무적으로 주일에만 얼굴만 살짝 비추고 돌아가는 그런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이 안개 같기도 하고 풀과 같기도 하여 짧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만,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날이 매우 긴 것이기도 합니다. 이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십년 뒤에는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내일, 한 달 뒤, 일 년 뒤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내가 5년 뒤에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를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아름다운 소망을 가진 꿈을 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최대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최대의 노력 위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좋은 일만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수넴여인에게 닥친 그 무섭고도 어려운 일이우리에게 닥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 답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 속에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충성과 봉사만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고, 또한 우리의 앞날도 주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이끌림을 받을 때에 내 삶, 내 앞 길이 열려질 것입니다. 이는 다만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복은 물론이요, 대인관계의 복과, 가정의 모든 복들도 포함이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만 우리의 앞길이 대로와 같이 열려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0) | 2012.03.25 |
---|---|
그를 인정하라 (0) | 2012.03.18 |
어부지리(漁父之利) (0) | 2012.03.04 |
혹세무민하는 자들 (0) | 2012.02.19 |
최소한 기본은 알아야 (0) | 2012.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