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지리(漁父之利) 야고보서 4:1-10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쌍방이 다투는 사이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익 챙긴다는 뜻으로 사용이 됩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제(齊)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연(燕)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웃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략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래서 연나라 소왕(昭王)은 종횡가(縱橫家)로서 그간 연나라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온 소대(蘇代)라는 사람에게 혜문왕을 설득해 주도록 부탁했습니다. 조나라에 도착한 소대는 세 치의 혀 하나로 합종책(合縱策)을 펴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의 동생답게 거침없이 혜문왕을 설득했습니다.
"오늘 귀국에 돌아오는 길에 역수(易水:연 조와 국경을 이루는 강)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을 바라보니 조개[蚌蛤(방합)]가 입을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도요새[鷸(휼)]가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화가 나서 조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새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조개도 지지 않고 '내가 오늘도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하고 맞받았습니다. 이렇게 쌍방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운수 사납게 이곳을 지나가던 어부에게 그만 둘 다 잡혀 버리고 말았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도요새이옵니다. 연 조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백성들을 피폐(疲弊)케 한다면, 귀국과 접해 있는 저 강대한 진(秦)나라가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을 다 마셔 버리고 말 것이옵니다."
혜문왕도 현명한 왕인만큼, 소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연나라 왕이 보낸 소대의 말을 과연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여 당장 침공 계획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가까운 사람끼리, 가까운 이웃끼리, 가까운 마을끼리, 가까운 나라끼리 싸움으로 인하여 제3자가 ‘어부지리’를 얻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싸움이 있습니다. 교회와 교회가 싸울 때도 있고, 교단과 교단이 싸우고, 교단의 연합체들이 싸움을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싸움이든지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 있을 수도 있고, 쌍방이 잘못했을 수도 있고, 서로 오해를 했을 경우도 있고, 제3자가 ‘어부지리’를 얻기 위하여 이간질한 것에 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싸움이 시작이 되었을지라도 일단 싸움이 시작이 되고 나면, 멈추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자존심’ 혹은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작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기려고 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자존심조차도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하는 제3세력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세력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악한 마귀의 세력입니다. 이 마귀의 세력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도 하고, 혈기를 부리게도 만들고, 자존심을 내세우도록 만들어서 싸움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성도간의 싸움의 근본 원인에 대하여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신령한 은사와 복을 사모하기보다 개개인의 정욕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자기 죄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신앙생활을 구하게 되면 싸움이 없어진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 싸움의 원인과, 싸움을 없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싸움의 원인: 악한 정욕
1절을 보면 싸움의 원인에 대하여 “정욕으로부터 좇아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모든 교회들과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싸움과 다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싸움은 군사 용어로 장기간에 걸친 전면적인 전투를 말하며, 다툼은 규모가 작은 분쟁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형태의 분쟁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교회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수시로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분쟁은 그 원인을 외적인 것에 미루게 되지만, 실은 인간의 지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육체의 정욕’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정욕이라는 말은 ‘향락’이라고도 번역을 하는데(눅 8:14), 감각적이며 악한 의미에서의 욕심을 가리킵니다.
즉 교회 내의 싸움과 다툼은 권력과 명예 등을 얻으려는 인간의 부패된 본성에서 나오는 욕심이 그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2절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알기 쉽게 다시 고쳐보면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욕심을 낸다는 말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기 위해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살인과 시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시기’는 소유하려는 갈망에서 나오는 투기심을 말합니다. 살인과 시기와 같은 죄악으로는 결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울 수 없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나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마귀가 가인의 영혼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가인은 아벨이 없었다면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아벨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 된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왜 인정을 받지 못했는가에 대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에 대하여 깨닫고 고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후에 화가 치밀어 올랐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단절하고는 아벨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남의 탓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한 것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오직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다툼과 시기와 분냄이 바로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바로 네 자신’의 잘못이라고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즉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 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귀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한 정욕은 마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싸움과 다툼이 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응답이 없음: 구하지 않거나, 잘못 구함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사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의 제사를 드리는 것인지를 하나님께 여쭈어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마음속을 악령이 점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는 가인에게 악령이 역사한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악한 정욕과 시기로 아벨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사람의 방식, 세상적인 방식으로는 무엇을 얻으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며 구하는 자세를 가질 때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잘못 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다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고 하셨는데, 그러면 야고보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에는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라고 하는 기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잘못된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잘못 구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를 ‘정욕으로 쓰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 그 자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일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해하기 위하여 총을 사려고 하는데, 돈이 없거나 혹은 구할 방법을 모른다고 할 때에, 이를 놓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기도에 응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쁜 일에 사용하려고 돈을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므로, 악령에 속한 자를 통하여 돈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구하는 것의 첫째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를 구하는 것으로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구한 것 외에 다른 것까지 더하여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마 6:33). 특히 남에게 베풀기 위하여 구할 때에도 넘치게 주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남에게 생색을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일에 어찌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부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이 말은 실제로 간음하는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신랑이라고 하였고, 성도는 신부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1:1,2; 엡 5:24-28; 계19:7) 신부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언약 관계를 결혼으로 상징화하였습니다(사 54:1-6).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로서 그와 맺은 언약을 잘 지켜야 했는데 그들이 신앙의 정조를 버리고(호 5:7)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했을 때 성경에서는 이를 간음 혹은 행음으로 표현합니다(렘 3:7-10; 호 9:1).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사는 자들은 간음하는 여자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간음하는 것일까요? ‘세상과 벗된 것’이 영적인 간음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위입니다. 세상과 벗된 자는 하나님과 벗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권세를 잡은 사단 마귀와는 원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구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물질과 권세를 잡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에 쓰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사용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세상이 모두 자신의 것인 양 거만하게 굴 것이지만, 그 물질과 권세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영원한 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에게 있는 지혜와 지식과 물질과 권세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더욱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실 줄로 믿습니다.
3. 은혜의 비결: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라.
야고보는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아내 된 성도들은 간음하여 남편 된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벗하였지만, 남편 된 하나님은 아내 된 성도들을 사모하되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는 것입니다(출 34:14). 이런 하나님의 시기하기까지 하시는 사모가 때로 성도들에게 징계로 임하기도 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징계는 ‘은혜’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가장 최선은 ‘순복’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겸손하게 하여 온전한 복종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 아래에 두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복종을 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을 순복이라고 합니다. ‘육사영생’ 육이 죽어야 영이 삽니다. 내 육신의 정욕을 죽여야 내 영혼이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육이 죽어지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순복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잠 3:34).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고, 나의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는 아낌없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이는 정욕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욕망의 밑바탕에는 마귀의 충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 충동을 물리쳐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하고 있던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과 같이 육신의 소욕을 성령의 소욕으로 물리치는 것입니다.(갈 5:16-21)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려 서로 대적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를 물리치지 않고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더 무서운 것은 내가 마귀에게 붙잡혀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회개할 기회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나를 돌이켜 보아야 하는데, 마귀에게 붙들려 있는 자들이 어찌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어려워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돌이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내게 가까이 오십니다. 은혜는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마귀의 충동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성도들은 마귀의 충동을 오히려 즐기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은혜 받고 기도로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즐기고 있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원치 않고 악령이 이끌어 가는 것이 좋아서 즐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내 마음대로 즐기는 것이 마귀에게 이끌려가고 있는 것인 줄도 모르고, 내 영혼이 병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내 육신이 끌리는 대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런 자를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약 1:8)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정욕대로 행하기 때문에 죄인들이며, 하나님과 세상과의 중간에 서 있기 때문에 두 마음을 품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마음을 품은 자가 하나님께로 가까기 가기 위해서는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죄악 된 삶에서 돌이켜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것이 간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간음은 세상적인 웃음이요 즐거움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간음’과 같은 불신앙을 버릴 수 있을까 애통하고 근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교만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만이 없어지게 되면 남들과의 다툼에서도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요, 내가 겸손해 지면 남을 깔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거나 비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연히 싸움이 없어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야고보는 우리의 인생을 가리켜 ‘안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육신의 소욕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육에는 풀과 같습니다. 허무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만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즐거움이나 기쁨은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칭찬 받기를 좋아하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이 모든 것은 마귀의 미혹에 빠져있는 세상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간교한 자는 싸움을 붙입니다. 둘이 싸우는 틈을 타 자신이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간악한 마귀도 우리 성도들을 서로 불화하게 합니다. 서로 싸우게 합니다. 성도가 싸우고, 교회가 싸우게 되면 마귀에만 좋을 것입니다. 싸우는 당사자들도 돌이키지 않게 되면 마귀 좋아하는 일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멸망의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은 죽도록 예수님을 믿으며 주의 일을 해도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성도로 이끌림을 받은 우리들이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순복해야 할 텐데, 서로 싸우고 불화하게 되면 결국 마귀만 좋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들은 뒤에서 성도들을 부추기고 서로 싸울 때에 ‘어부지리’를 얻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대로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은혜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화목한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는 성도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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