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기본은 알아야 데살로니가전서 2:1-12
영유아들 앞에 책을 가져가서 펼쳐 놓으면 읽을 수 있을까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 앞에 곱셈, 나눗셈 문제집을 가져다 놓으면 풀 수 있을까요? 전혀 보지도 못한 외국 글자를 보고 읽을 수가 있을까요? 이처럼 배우지 못하고는 읽지도 못하고 풀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도 나이에 알맞게 해야 합니다. 고전 3:2에서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칠 때에 ‘젖으로 먹이고’ 즉 그들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기본적인 것이 있고, 조금 더 장성한 성도에게는 조금 더 깊이 있는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외적으로는 성장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지금도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처음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도 젖을 먹이는 것처럼 했고, 지금도 그것이 변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적 성장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장을 하지 못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잘 자라지 않았다고 할 때에 그 원인을 규명하여 성장하도록 진단을 하게 됩니다. 아파서 크지 못한 아이, 먹지 못해서 크지 못하는 아이, 혹은 늦게 성장하는 유전자를 가진 아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원인을 분석해서 고쳐야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영적인 성장도 동일합니다. 이 성도는 어떤 점 때문에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찾아내어 고쳐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에 따라서 아무리 고쳐주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본인이 고치려고 하지 않을 때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사주어도 안 입겠다고 하는 데는 어찌하겠습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주어도 먹지 않는 데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복 받는 방법을 가르쳐 준들 본인이 하지 않겠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처음에 잘못 배웠기 때문에, 옳은 것을 가르쳐 주어도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 알게 된 어떤 지식이 잘못된 것임을 모르고 습득하였는데, 나중에 그것이 잘못된 지식임을 지적을 받게 되면 얼마나 기분 나빠하는지 모릅니다. 셋째는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떠하냐고 하는 사람은 결코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대충 사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진리나 원칙은 완전히 무시하고 간신과 같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넷째는 아무리 고치고 싶어도 이제는 완전히 고착이 되어서 고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악한 유혹에 현혹이 되었거나, 좋은 것인 줄로 알았다가 너무나 깊이 빠져서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나쁜 것을 알면서도 고치려고 하지 않거나 포기해 버립니다.
이처럼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초를 잘 다지지 않고는 바로 설수도 없고 튼튼한 영적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게 되면 색도 바라고 삭아서 약해지기도 하고 더러운 것들이 달라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보수하며 씻어내는 작업들을 해야 더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 생활도 그렇습니다. 기초를 잘 닦아 놓았을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적인 많은 것들이 들어와서 쌓이게 되고 변색시킵니다. 악한 영의 더러운 것들이 들어와서 믿음을 덮게 되면 올바른 분별력을 잃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나를 살펴보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을 우리는 늘 되새겨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 인격 자체가 의인이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즉 거룩함의 정도에 발전과 퇴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라고 하는 자체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 교제의 통로가 바로 기도입니다. 시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하루 종일 기도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호흡과도 같은 것이며 생명과도 같은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실제로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정한 형식을 갖춘 기도 외에도 성도들은 생활 속에서 수시로 마음을 하나님께로 열고 기도를 생활화해야 할 것입니다. 수시로 내 영혼을 청소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늘 내 자신을 가장 기초, 가장 순수한 믿음으로 돌려놓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하지 않게 되면 내 마음, 내 영혼에는 세상적인 지식이나 악한 영의 유혹이 쌓이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적인 것들을 혼합시키게 됩니다. 혼합은 거룩함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는 것이 성도입니다. 거룩은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하게 된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 생활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과 동일해 지기를 바라고 있으니 어찌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되기 전에는 세상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악한 것들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늘 기도하는 성도는 이런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대적하여 믿음의 길을 지키게 되지만,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맙니다. 넘어가면서도 깨닫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적인 방식이 지혜로운 것 같고, 성경적인 방식은 어리석고 무능하게 보입니다. 귀찮고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1. 복음을 지켜라.
어떤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가장 기초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공회에 끌려가서 협박을 당하고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들은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1) 스데반은 공회에 붙잡혀 왔어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하였습니다(“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6:15)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고난을 당한 내용이 나옵니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 들려 점을 치던 여종 하나를 고쳐준 일이 발단이 되어, 그 여종을 통해서 경제적 이익을 가로채던 주인이 더 이상 점치는 장사를 하지 못하게 된데 대하여 분을 품어 바울과 실라를 부당하게 고소하면서 두 사람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옥중에서 기도하며 찬송할 때에 기적이 일어나 간수가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으며,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정당하게 풀러 나와 곧바로 데살로니가로 오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는 데살로니가에서 가까운 도시였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과 실라가 고난을 받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투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격렬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런 목숨을 건 싸움이 데살로니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사람들도 바울 일행이 전하는 복음을 강한 물리적인 힘으로 반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대하는 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 주변, 즉 아프리카, 소아시아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살면서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교신앙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기독교가 변질된 이단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에덴에서 쫓겨날 때에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것(창 3:21)을 ‘원시 복음’이라고 합니다. 양을 잡았다는 것은 피를 흘린 것을 말합니다. 양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그 흘린 피는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그 뒤에 가장 기본적인 복음의 말씀으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친히 주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이 말씀을 지키기 못했기 때문에 변질이 되어 유대교라고 하는 이단 교파가 되었고, 끝내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그 뒤에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바로 지키지 않은 자들은 유대교처럼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세상과 혼합될 수 없습니다. 이단 사상과 혼합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세상 속에 살던 사람들을 구분하여 꺼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지옥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이 복음을 통하여 죄악과 멸망의 길에서 꺼내서 천국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의 길을 걸어가게 된 성도가 어찌하여 또 다시 그 죄악의 길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말씀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죄의 근원이 내 영혼을 덮어 버려 올바른 분별력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또 다시 세상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를 비롯한 각종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킵니다. 복음의 본질을 벗어나게 만듭니다. 복음의 본질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성도가 아닙니다. 무늬만 기독교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변질된 복음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 힘이 바로 성경을 읽는 것과 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또 한 부류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이 들어가게 되면 망하게 되기 때문에 결사반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우상을 중심으로 경제생활을 하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서 우상을 척결하게 되면 이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될 수밖에 없으니, 복음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육신을 살리는 것에 더 나아가 영혼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바울 일행을 비롯한 복음증거자들은 자신의 목숨의 위태롭게 되어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도 귀신문화와 관련이 깊기 때문에, 특히 장례식을 보면 귀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든 절차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 제사 절차 속에는 ‘돈’이 관련됩니다. 귀신을 섬기는 자나 혹은 귀신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데, 사람들은 정말로 그런 줄로 알고 돈을 내고 있습니다. 속으면서도 속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불쌍합니다.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장례식에 가서도 향도 피우지 않고, 술도 따르지 않고, 절도 하지 않습니다. 제사상을 차리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귀신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주지 않기 때문에 저들이 기독교인을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려고, 기독교인들을 미혹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차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4절)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교제를 해야 하고, 때로는 사업도 같이 해야 하고, 그런 중에 같이 식사도 해야 하고, 때로는 단체로 회식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목하자, 화합하자는 핑계로 술을 권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분위기 망친다고 싫어하며 강요하기도 합니다. 받아만 놓으라고 말합니다. 딱 한 잔만 하라고 유혹합니다. 받아 놓으면 제사지내냐면서 마시라고 재촉합니다. 한 잔을 억지로 마시면, 그렇게 잘 마시면서 왜 뺐냐고 하면서 또 한 잔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성도라도 세상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어 주어야만 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저들이 아무리 기분 나빠해도 거절할 것은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해치는 것은 결단코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일, 복음을 변질시키는 일, 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사코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직장 생활을 하고, 어떻게 경제생활을 합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을 지키려고 할 때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성경에서 금지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지, 지금 당장 세상 사람들에게 ‘야 참 너 대단하구나, 참 착하구나, 일 잘하는데!’ 이런 말 한마디가 듣고 싶습니까? 그 칭찬 한 마디 듣기 위하여 말씀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화목이 가능한 것입니다.
3.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8절) 바울은 복음의 근거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즉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기초로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은 죄 지은 자들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우상 속에 갇혀 있던 자들을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로 만드신 것은 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죄악에 빠진 우리를 건져내시고 성도라는 귀한 이름을 부여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후에 변화 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화평을 이루는 것이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들과 타협하는 것, 저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화평한 것 같으나, 저들은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해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양보하면 두 가지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하여 성도는 점점 믿음의 길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내가 믿음의 길을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저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저들을 지옥의 길에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합니다.
세상 구석구석에는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하는 수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파 놓은 함정이 이 있습니다. 우리를 잡으려고 하는 올무가 놓여 있습니다. 믿음의 눈, 복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만 볼 수 있고, 피해 갈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신앙, 말씀을 지키는 것,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 기본적인 틀만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틀은 결코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악한 것을 혼합시켜도 안 됩니다. 믿음은 말씀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줄을 굳게 믿고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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