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쟁력은? 야고보서 1:12-18
내가 가지고 있는 경쟁력은 무엇일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자신에 대해서 누구나 다 한 번씩은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때에는 어느 때보다 경쟁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잘하는데 남도 나와 같은 분야에서 잘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한 또 다른 장점이 내게 있어야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남보다 월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자격증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로 나누어 질 것입니다.
미술을 전공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정말 미술을 잘 해서 동양화과를 졸업하였고, 또 한 사람은 미술에 소질이 있기는 했지만 특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원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한 초등학교에서 만났습니다. 전공한 사람은 특기적성교사로 방과후에 미술을 지도하는 임시직이 되었고, 교원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학교 정식 교사가 되어 부수적으로 특기적성교사들을 관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미술 실력은 소질이 있어서 전공한 사람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교원자격증은 가진 사람은 실기 실력은 부족했으나 자격증이라고 하는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책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누가 더 성공했느냐를 판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한 학교 내에서의 지위로 볼 때에는 실력은 모자랐지만 자격증을 가진 정식 교사가 우위를 점한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실력 있는 전공자는 자존심이 매우 상했겠지만 현실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토플, 토익, 텝스 등 어학 관련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 휴학을 하기도 하고, 졸업하고도 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토익이나 토플 등 시험을 보지 못해서 인정할 만한 증명이 없으면 채용하는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운전은 참 잘하는데 면허증이 없으면, 도로에 차를 끌고 나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자격증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받는 증명서인 동시에 남을 관리하는 위치에 올라가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자격증이 없으면 제일 아래에서 시키는 일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자격증은 모두 시험을 통해서 취득할 수 있습니다. 즉 Test를 통해서 합격 여부가 결정이 되고 자격증이 발급이 됩니다. 따라서 Test라는 것은 일정한 자격을 주어서 책임지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성도들을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Test하고 계십니다. 이 Test에 통과해야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세상적인 복도 받고, 종국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복을 받을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 시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Test가 어떤 모습으로 내가 찾아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잘 판단하고 깨우쳐야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인지, 사탄의 유혹인지부터 먼저 판단할 수 있는 영적분별력이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시험에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순종의 시험, 둘째 고통의 시험, 셋째 믿음의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생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 그 답이 나옵니다.
1. 순종의 시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왜 가라고 하셨습니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심지어는 ‘복의 근원’으로 만드시려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갈대아 우르를 떠나가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려고 하면 첫 번째 시험인 순종을 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은 단지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인적 자원과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우르는 당시로서는 매우 문명이 발달된 도시였으며, 아브라함의 집안은 매우 유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브라함의 집안이 우상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상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많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우상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당시로 보아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권력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수 24:2)
왜 아브라함이 돈 잘 버는 아버지 밑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야합니까? “왜 가라고 하십니까?” 이렇게 따지지 않았습니다. 절대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가라고 하실 때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와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여 가나안으로의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에 대하여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종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는 어떤 요구를 하실까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쉽게 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나 모세와 같이 선지자들에게 하시는 것처럼 일일이 친히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어떤 구절이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내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의 설교를 통하여 내게 말씀하십니다.
순종만이 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복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 28:2-14) 이렇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모든 복들을 받게 되지만, 반대로 불순종하게 되면 이 모든 저주가 임한다고 하였습니다(신 28:15-46).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9,2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사람을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며,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와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다만 악한 것에는 결단코 순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롬 6:12) 죄와 몸의 사욕은 반드시 물리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2. 고통의 시험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에서 시험은 Trial로 믿음의 연단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발생하는 시련과 고난을 이길 때에 복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험은 당할 때에는 괴롭고 슬프지만 그것을 이기고 승리할 때에 복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주님께서는 이런 시련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0)라고 하셨습니다. 시련이 없으면 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렵다고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은 결코 아닙니다. 마귀에게 붙들린바 될 때에도 시련은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인지, 어떤 것이 마귀에게 농락을 당하는 것인지는 쉽게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동일한 것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이든 이겨낼 수 있다면 연단을 받고 믿음이 강해지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지만, 주저앉게 되면 믿음에서 떠난 자가 되어 더 큰 고통과 슬픔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큰 은혜를 받아 음성을 들었지만, 은혜로운 강한 빛으로 인하여 눈이 멀기도 했으며, 그 뒤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아 눈을 떴지만, 아라비아로 가서 6년 동안이나 시련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이 바울이라는 사도로 재탄생하여 평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갈 1:17).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낸다.’(약 1:3)고 하였습니다. 조급해 하는 믿음은 또 다른 시련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인내입니다. 믿음의 성장, 강한 믿음은 인내를 통하여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시험
아브라함의 최종 시험은 ‘믿음’이었습니다. 과연 네가 얼마나 나를 믿고 신뢰하는지를 Test 해 보아야겠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어떤 시험입니까? 100세에 낳은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이니 얼마나 귀한 아들입니까! 그런 아들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왜 그런 하나님께서 또 다시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성도들 같으면,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은 순종의 시험인 동시에 최종 믿음을 판가름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귀에게 실었던 땔감을 이삭에게 지우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하인에게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고 말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 아브라함이 알지 못했던 것은 이삭을 잡고 제물로 드린 후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 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갈 때에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것처럼’, 이번에도 제물로 드릴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가운데 이삭을 포박하고 나무 위에 올려놓고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급하게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할렐루야! 이에 아브라함이 사방을 둘러보니 수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양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후에 그 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알지 못하지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주어진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면,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모르는 가운데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니! 내가 어떻게 하든지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은 믿음이 결코 아닙니다. 그저 될 대로 되라 하는 그런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할 때에 비로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탕이 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신앙생활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경외는 존경하되 두려워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하심에 대한 공경과 두려움을 나타내는데 쓰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은 신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자기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일은 지당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하는 말씀은, 하나님은 경외할 것을 함께하고 있습니다(신 6:4-).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지는 때, 하나님은 영광과 광채 가운데 친히 나타나, 이 경외심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심어주셨다(신 4:10).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응답입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만이, 이 경외심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은 사람(시 14:1,53:1,잠 1:7)에게는 경외심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경외함의 결과이고(고후 7:1),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없이 구원은 달성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빌 2:12).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이 말씀은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성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시인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위로는 부인하는 것, 즉 입술로는 ‘네’하고 행동으로는 하지 않는 것은, 가증한 자이며, 복종치 않는 자이며,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선한 일’이라고 했는데, 성경에서 ‘선’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련이 되는 말입니다. 즉 믿음과 관련된 것으로, 모든 믿음과 관련 된 일들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입술로는 ‘네’하나, 마음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이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 ‘경외’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베드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약 4:7; 벧전 2:13,18; 3:1,5,22; 5:5) 순복은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은 온전한 ‘순종’을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을 받고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안 되면, 복종이라도 해야 합니다. 나보다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소위 ‘일진’이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순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서우니까.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니까 할 수 없는 복종하게 됩니다. 세상적인 권세에 대하여는 복종하면서 왜 하나님께 복종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까? 믿음 가운데서 순종하는 것이 최상이지만, 복종이라도 하면 나쁜 것은 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마귀의 권세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자들도 세상 권세를 쥐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들은 마귀의 지혜를 받았기 때문에 매우 명석하며 사람들을 깜짝 놀랄만한 발명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적면에서는 성도가 제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불신자의 지혜를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불신자보다 못하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불신자의 지혜를 뛰어 넘을 수 있나요? 하나님의 지혜, 말씀의 지혜, 성령의 지혜가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에 붙들릴 때에, 내가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할 때에, 말씀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세상을 이길 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내 지혜로는 할 수 없으되, 성령께서 저 악한 자들의 꾀를 이용하여 스스로의 꾀에 빠져들게 만들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복을 받는 길, 세상에서 잘되는 길, 불신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은 바로 믿음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것이 속히 시련의 시험에서 벗어나서 믿음의 열매로 보상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시험을 잘 통과해서 복을 받는 성도로 새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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