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짐, 모세의 짐, 주님의 짐 신명기 1:9-18
옛 말에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자기가 먹을 것을 가지고 나온다고 합니다. 즉 일단 태어나기만 하면 굶어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참 끈질긴 것이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먹을 것에 대한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평생의 짐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의식주’라는 말에서처럼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은 항상 사람과 모든 짐승이나 식물에게서도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문명 시대에는 입는 것과 잠자는 것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고, 어떻게 먹느냐에 대한 관심입니다. 맛있는 것이 건강에 좋은 것이 아니고, 보기 좋은 것이 건강에 좋은 것이 아님을 밝혀내었습니다. 맛은 없어도 건강에 좋은 식품을 먹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점에서 먹을 것은 우리가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할 하나의 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제각기 가지고 가야 할 짐 보따리가 있습니다. 이 짐 보따리 속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을까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가는 짐은 의식주는 필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학업에 대한 성취욕이나 명예욕과 혹은 권력에 대한 욕구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적인 짐도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에게는 또 다른 짐이 있습니다. 어떤 짐이 우리의 어깨에 올려 져 있을까요? 우리들이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짐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나의 짐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많은 짐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짐 속에는 의식주를 위한 필수적인 것도 있고, 애굽 사람들로부터 받은 귀금속도 있을 것입니다. 소나 낙타나 노새에 싣기도 하고 손에 들기도 하고, 또 양떼, 소떼, 약대 등을 거느리고 고센 땅을 나섰을 것입니다.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 생업을 위한 가축들 이 모두 각 개인의 짐들입니다. 걸어가기만 해도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데 이러한 것들과 함께 가야되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뒤에서 애굽 군사가 쫓아 올 때에는 절망 속에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학생이 학교에 갈 때에 맨 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가방을 가지고 갑니다. 그 가방 안에는 그 날 공부할 책과 노트와 연필과 같은 필기도구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먹을 것을 넣어 오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게임기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해서 전 과목 책을 다 넣어가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거우니까 안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날 필요한 책만 가지고 가도 무겁다고 느껴지는데 필요하지 않은 책은 가져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갈 때에 필요한 것들은 무수히 많지만 다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또 가져가고 싶어도 가져갈 수도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다 가지고 가고 싶어 합니다. 특히 남들이 없는 것은 더 가지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생활에 편리를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사를 자주 다니는 사람은 잔 물건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한 집에 오래 사는 사람은 이런 저런 것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이사하려고 물건을 정리하다보면 뭐가 그리 많은지 모릅니다. 전에는 꼭 필요해서 보관해 뒀는데, 이제는 1년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돌절구나 다듬잇돌과 같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옛날 분들은 이런 것이 다 있었습니다. 무쇠 다리가 달린 큰 재봉틀과 같은 것들도 요즘은 없습니다. 물론 이런 옛날 물건들을 잘 보관해서 화제가 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이 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외에 다른 짐들은 없을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짐 중에 버려야 할 것은 없을까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도 짐입니다. 대인관계, 사회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짐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욕구로 인하여 스스로 짐을 만들어 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짐들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육체의 소욕’(갈 5:17) 혹은 ‘육체의 욕심’(갈 5:16)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곧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더 더하면 교만, 자존심, 어리석음, 미련함 등도 포함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더 큰 짐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며,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본래 정신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 사이의 이웃 사랑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가장 큰 계명과 그 다음 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7-40)
바로 이 크고 첫째가는 계명과 둘째가는 계명이 바로 우리가 영원토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게 지워주신 십자가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성도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짐이 무겁다고 버리는 것은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버릴 수 있지만 십자가의 사랑만은 버리면 안 되는 나의 가장 소중한 짐임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 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요한 사도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버려야 할 짐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버려야 짐을 버리지 못하게 되면, 그 짐의 영향력은 우리의 영혼과 믿음까지 병들게 하고 올바른 분별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으로 이끌어가는 모든 짐들을 버리는 것이야 말로 십자가의 짐을 바로 지고가게 되는 첩경임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모세의 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홀로 너희 짐을 질 수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백성들은 어떤 짐을 가지고 있기에 모세가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모세가 말하고 있는 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여 종교적인 모든 일까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일은 가정 내에의 다툼과 불화가 될 수도 있고, 이웃끼리의 다툼과 불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모두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든지 의견의 충돌이 있을 수 있고, 의견의 충돌이 심화가 되면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잘못했는지 시비를 가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무려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군을 하고, 또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을 하는데 어찌 서로 충돌이 없겠습니까? 힘들다고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하면, 쌍방 간에 다툼은 더 심해지고 사태는 악화가 되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기주의 사회로 변하고 급속히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그의 인생 연륜으로 모세에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혼자서 다 처리하려고 하지 말고 그 권한을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장인의 가르침을 깨닫고 각 지파의 명망이 있는 자들을 택하여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패장으로 삼아서 각기 직책에 따라 권한과 의무를 부여하여 자신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회적인 짐을 덜어낸 것입니다. 이외에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통하여 모세의 짐을 나누어 주셨는데, 그것은 곧 제사에 관한 사항입니다. 모세의 형 아론이 대제사장이 되고 그의 직계손으로 하여금 제사장직을 맡도록 한 것입니다. 모든 레위인을 택하사 성막과 제사에 관한 일을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다만 모세가 나눌 수 없는 짐이 있는데, 그것은 곧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연결해야 하는 귀중한 사 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는 사명입니다. 이 사명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에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사명입니다.
때로는 백성 중에서, 심지어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까지도 모세의 이 선지자의 사명을 탐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허락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모세를 통하여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고, 이적 또한 모세를 통해서만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평생토록 짊어지고 가는 짐이었습니다. 그 짐도 역시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중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짐을 대신 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진 십자가의 짐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모세가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세는 백성들을 모압 평지까지 잘 인도하여 간 후에,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그 직분을 넘겨주고 평안히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이 직분은 오늘날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에게도 이 선지자적인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아론에게 주어진 제사장의 직분도 주어졌습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은 성도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짐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나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던 백성들은 이제 스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짐은 곧 전도의 짐이요, 기도의 짐이요, 믿음의 짐이요, 사랑의 짐입니다.
3. 주님의 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주님의 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십자가의 짐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짊어지실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뜻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지켜야만 하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그 사랑의 율법이 아닌, 행위를 규제하는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 613가지를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천국에 가지 못하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다 지킬 수 있다고 해도 천국에 갈 수 없는 율법인데, 그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강요를 받았습니다. 율법은 모든 유대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백성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그 짐을 벗겨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모든 행위 하나하나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그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가벼운 것입니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니 어찌 가볍지 않겠습니까? 오직 믿음의 짐 하나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모다 더 가벼운 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짐이 너무 가볍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간단하기 때문에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그 사랑의 율법까지도 폐기하시면서 까지 택한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이미 십자가의 짐을 지시기로 하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 제물을 드려야만 했던 백성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 성도라면 반드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즉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강조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고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순간 우리의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용서 받은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죄에게 종노릇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가지고 가야할 십자가의 짐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며, 죄 많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싶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지옥이 그렇게도 가고 싶다면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벗어 던져도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면, 십자가를 벗어버릴 방법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내 어깨 위에 주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를 꽁꽁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벗으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누르는 힘이 가중이 되고 고통만이 엄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난은 십자가를 벗어버리려고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주신 그 십자가는 무거운 것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참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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