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 제5장 강해 - 모세와 바로의 첫 대면

chukang 2012. 4. 21. 12:28

출애굽기 제5장 강해 - 모세와 바로의 첫 대면

 

  본 장은 전반부 1-9절에서 모세는 애굽으로 가서 장로들과 면담 후에 바로에게로 가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킬 수 있도록 광야로 보내달라는 요구를 하자, 바로는 더욱 더 가혹하게 일을 시키게 됩니다. 후반부 10-21절에서는 바로의 탄압 정책으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한 것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2에서는 아직까지 미래의 구원을 생각하지 못하는 모세와 백성들은 당장 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한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이적을 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경배하게 한 후에, 바로에게로 갔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전한 메시지는 여호와로부터 받은 계시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계획의 입안자이며 실행자였던 것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바로에게 명확하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짐승을 희생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희생제사에 사용되는 짐승 중에는 애굽에서 신으로 숭배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어린 양은 ‘암몬신’에게 바치는 거룩한 동물이었고, 나일강 삼각주 유역에서는 수양, 염소, 황소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따라서 애굽 사람 앞에서 이런 동물들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 애굽인들의 종교적 분개와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애굽 경내를 넘어 광야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요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절기를 지킨다’는 말은 본래 ‘원을 돌다: 야호구(יחגו)’라는 말로 당시 종교 예식에서 둥글게 원을 돌며 노래하며 춤추는 형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여기에 나오는 바로는 모세와 왕권 경쟁을 하던 투트모스 3세의 뒤를 이어 바로가 된 아멘호텝 2세로 출애굽 당시의 바로입니다. ‘여호와가 누군관대’ 여호와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은 그이 말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그에게 관심도 없다는 뜻입니다. 설혹 여호와라는 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노예들의 신이 애굽의 신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각 나라, 각 지역마다 다스리는 신이 있다는 범신론 사상에 기인한 것입니다. 자신이 혹시 여호와를 안다고 해도 그 권위와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 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고 모세와 아론이 말한 이유는, 바로의 지역신 개념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 속에는 혹시 바로가 알지도 모르는 과거 요셉을 통하여 극심한 가뭄으로부터 구원하신 것과 부강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사흘 길 쯤 광야에 가서’ 사흘 길은 고센에서 호렙 산까지의 거리입니다. 굳이 그곳까지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려 하는 이유는 2절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애굽인들에게 혐오감이나 적개심을 주지 않기 위함인 동시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온역이나 칼’ 온역은 악성 전염병이며, ‘칼’은 침략자를 가리킵니다. 온역과 칼은 질병과 침략으로, 자신들의 신이 자기에 대한 예배를 게을리하거나 소홀히 할 때 징벌로써 사용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도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해야 할 예배의 당위성을 바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5: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 또 가로되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도다 하고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언이 국가의 기반을 흔들리게 하는 불순한 발언이라 간주하여 이를 중단하도록 명령합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와 애굽의 통치자 사이의 첫 번째 공식적인 면담은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쉬게 하느냐: 타프리우(תפריעו)’는 ‘고삐를 풀다.’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마치 자유를 상실한 짐승과 같이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대 발굴에서 찾아낸 ‘오스트리카’(흙으로 빚어서 구운 판)에는 애굽의 노예들이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잠시 노동에서 쉬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바로는 아론과 모세의 요구가 오래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쉬게 하려는 의도로 본 듯합니다. 당시의 노동력은 국가의 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너희의 역사’는 주로 벽돌 굽기와 무거운 짐 나르기와 농사일을 비롯한 중노동입니다. 결국 모세의 요구는 바로가 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탄압하는 심히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고 말았습니다.

 

6: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잠언 1:16을 보면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1차 대면을 가진 직후에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악인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급한 것입니다. 간역자는 애굽인 감독자(1:11) 밑에서 이스라엘 노예들을 직접 통솔하는 애굽 사람들이며, 패장은 벽돌 굽는 일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특채된 사람입니다(14절). 패장은 히브리어로 ‘쇼테르(שטר)’인데 다른 곳에서는 ‘시기관’이라 번역이 되는 것을 볼 때에 이들은 벽돌의 숫자 하나하나 적어 그 실적을 관리하는 일까지 한 것으로 보입니다.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스스로 짚을 구해야 되고 벽돌도 전과 동일한 양을 만들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벽돌은 불에 굽는 것이 아니라, 나일 강가에서 퍼낸 점토를 개어서 벽돌을 찍어 낸 다음 햇볕에 말려 사용하였습니다. 이 벽돌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하여 잘게 썬 집이나 곡식을 베어낸 뒤의 볏단 밑동 또는 왕겨 등을 섞었습니다. ‘짚’은 ‘테벤(תבן)’이라는 단어로 밀을 베어내고 난 밑동 또는 땅에 놓여있는 지푸라기를 의미합니다. 이런 짚에서는 벽돌의 형태를 보다 쉽게 만드는 고유의 산성 물질이 들어 있어서 벽돌이 오그라드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일 강 주변의 넓은 농지에는 추수 후에 쌓인 볏단이나 짚이 엄청나게 널려 있었으며,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짚을 줍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8: 또 그들의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혹독하게 부리기 위하여 ‘게으르다’고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 시간을 애굽의 노예로서의 부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각자 자기의 땅을 개간할 수도 있었고(신 11:10), 각종 채소류 생산은 물론 생선을 잡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중 집회에도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습니다(4:30,31; 민 11:5).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바로는 희생을 드린다는 핑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요구한다고 여기고, 오히려 더 과중한 부담을 지우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음으로써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 것입니다.

 

9: 그 사람들의 노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힘에 넘치도록 더 많은 노역을 부과하여 일에 얽매이도록 만들어서 모세와 아론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라는 바로의 명령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만들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려는 수작입니다. 이는 진리를 왜곡하는 사단의 전형적인 수단입니다.

 

10-12: 간역자들과 패장들이 나가서 백성에게 일러 가로되 바로의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짚을 얻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

  애굽에는 잡초와 수목이 많아서 가축들의 꼴이나 땔감이 항상 풍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추수할 때에는 이삭만을 따거나 아니면 이삭 밑 부분의 줄기만 잘랐고, 짚은 거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짚을 모으고 또 잘게 썰어서 벽돌을 만드는 과정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벽돌을 만드는 작업은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곡초 그루터기로 짚을 대신한다는 것은 곡초 그루터기를 베어다가 잘게 썰어 짚으로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13,14: 간역자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가로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당일 일을 당일에 마치라 하며, 바로의 간역자들이 자기들의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을 때리며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당된 양의 벽돌을 채우지 못하자 애굽인 간역자들은 이스라엘 패장을 때렸습니다. 이는 짚을 주지 않기 때문에, 짚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벽돌을 생산하는 양이 줄어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주어진 벽돌 할당량이 이미 생산의 한계를 넘어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패장을 때리는 것은 벽돌 양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요구한 것에 대한 정치적인 보복의 성격이 짙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이를 이간시키는 사단의 악한 작전의 일환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려움을 겪게 만들어 하나님과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15,16: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가로되 왕은 어찌하여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더러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종들이 매를 맞으오니 이는 왕의 백성의 허물이니이다.

  패장들이 바로에게 호소한 것은 울부짖음입니다. 당시는 비록 노예라 할지라도 바로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으며, 패장들은 그런 면에서 우선적이었습니다. 패장들이 바로에게 호소하는 것은 간역자들이 자신들에게 짚을 주지 않으면서도 벽돌 양은 그대로 만들어 내라고 계속적으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패장들은 이런 간역자들의 요구가 바로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 간역자들이 바로의 승낙 없이 임의로 괴롭히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왕의 백성의 허물’이라고 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살고 있으므로 노예이기는 하지만 바로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가중되는 노역을 완화시켜보려는 애쓰는 모습입니다.

 

17,18: 바로가 가로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너희가 벽돌은 여수(如數)히 바칠지니라.

  이스라엘 패장들이 벽돌 노역에 대한 고통을 하소연하자 바로는 분노합니다. ‘게으르다,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 엘 패장들에 대한 분노의 질책인 동시에 결코 완화시켜 줄 의향이 없음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만을 신으로 섬기지 않고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고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질투심이 폭발한 것입니다. 바로는 히브리인들의 신인 여호와를 의식하여 히브리인들에게 더욱 짙은 증오심을 표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짚은 주지 않을 것이지만 벽돌은 ‘여수’히 즉 같은 숫자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19: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패장들은 바로가 결코 벽돌의 수를 감할 수 없다는 말에 비로소 모세와 아론의 청원으로 인하여 자신들에게 좋지 않은 상태가 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0,21: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와 아론은 패장들이 바로를 만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패장들은 모세와 아론의 청원은 바로에게 증오와 혐오감을 심어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현실 문제에 요동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심지어는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게 만들었다고 원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불화를 조성하는 일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바로는 모세와의 첫 대면에서 승리한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한 고난보다 현재의 안일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패장들은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셔서 징계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 모든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바로에게 요구를 하게 되면 바로가 즉시 들어줄 것으로 생각을 했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외침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당한 어려움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한 구원(3:8, 20)은 고사하고 오히려 더 큰 고통이 닥쳐왔음에 대한 탄원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선지자로 택함을 받은 모세지만 아직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종의 투정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합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