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 제3장 강해 -모세를 부르시는 여호와

chukang 2012. 4. 7. 12:43

출애굽기 제3장 강해 - 모세를 부르시는 여호와

 

  1-12절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여호와께서 출애굽의 인도자로 모세를 택하시고 부르시는 장면이며, 13-15절은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시는 장면이며, 16-22절은 모세에게 출애굽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12: 미디안에서 목동으로 생활하고 있던 모세가 여호와께로부터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여호와께서는 학대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모세에게 전하시고, 그 일을 담당할 자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는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양 무리를 돌보고 있는 가운데 목초지를 찾아다니던 중 호렙 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호렙 산은 시내 산으로도 불리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산’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내리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 산을 성별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2,3: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사자’는 히브리어로 ‘말라크:מלאך)로 ’보내다, 파견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나 선지자 등에게 ’사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 곧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시내 광야 전역에서 흔하게 자라고 있는 아카시아 종류의 키 작은 가시덤불이라고 합니다. 이 키 작은 가시덤불은 애굽에서 노예로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히브리 민족을 상징하는데, 떨기나무에 여호와의 사자가 임한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상징적 묘사입니다. ’불꽃‘은 마치 그 끝이 날카로운 창날과 같은 모양을 한 화염(flame)입니다. 이 불꽃은 흔히 죄악을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 공의로운 심판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사 10:17; 딤전 6:16; 요일 1:5). 그런데 일단 나무에 불이 붙으면 나무가 타야지 되는데, 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발견한 모세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어쩐 일인가 확인하기 위해 떨기나무를 향하여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였는데 여기에서 ‘여호와’라고 바뀌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 두 존재가 완전한 하나의 속성을 지니신 분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표현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엘로힘:אלחים’으로 일개 민족에 국한된 지역신 또는 민족신이 아니라 절대 지존하시며 전능하신 만유의 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거듭하여 2회를 부르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거나 시급한 상황일 때입니다. 사태가 매우 긴급하고 사명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모세를 거듭 부르셨고, 이 거듭 부르심은 모세로 하여금 잘못을 범치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모세의 겸손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사이에서 처음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이후로 모세는 죽는 순간까지 근 40년간을 시종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겸손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 불꽃에 대하여 강한 호기심으로 다가가던 모세에게 접근 금지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금지명령은 지극히 거룩하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위엄을 나타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편에서 주도적으로 가까이 하시기 전에는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19:12)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 같은 분리의 아픔을 극복하고 나아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서 피흘린 제사제도를 마련하셨고, 피의 제사의 궁극적 완성으로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 십자가 제단에 희생제물로 사용하셨습니다(요일 4:10).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찢으심으로써 인간이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히 10:20).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가 선 땅이 거룩한 곳이라는 뜻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이지, 그 땅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신’ ‘발’이라는 것은 인간 삶의 전체적 영역, 곧 내적 품성과 외적 행동의 총체를 상징합니다. 더욱이 먼지가 많은 근동 지방에서는 신발에 더러운 먼지나 오물이 묻게 됩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신발은 흔히 죄악에 오염된 온갖 더러운 행위와 성품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의 임재 앞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❶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본질적인 차이’이며, ❷‘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죄악 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보여주며, ❸‘거룩하신 하나님께 참된 경의를 표하는 행위’인 동시에, ❹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죄악 된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죄악과의 단절,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덧입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노예 계층의 사람들은 신발을 착용하지 않고 맨발로 다녔는데 바로 이 같은 취지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명하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통해 모세가 당신의 종이 된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이는 앞으로 진행될 출애굽의 역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요, 계속적이며 일관적인 속성을 나타냅니다. 모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죄인 된 인간이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본능적인 심상의 포현으로서 단순한 공포의 차원을 넘어서는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거나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부정한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죽임을 당한다는 사고방식은 얼굴을 가리게 하였습니다.(삿 6:22, 23; 13:21,22; 왕상 19:13)

 

7,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정녕히 보고’ 즉 보고 또 보아왔다고 하셨습니다. 지속적이고도 세밀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현장 깊숙이까지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동시에, 백성들의 간구에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환난과 고통 중에 있는 성도는 불평과 절망 속에서 원망과 탄식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행 27:20-24). 간역자는 애굽의 고위 관리인 감독(출 1:11)과는 달리 일선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노역에 대한 감동의 임무를 직접 담당하던 애굽인 하급 관리입니다. ‘우고를 알고’ 우고는 재난, 슬픔, 말로 할 수 없는 비애라는 뜻으로 애굽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려와서’ 즉 친히 개입하셔서 애굽을 파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역의 땅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나안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입니다. 비옥해서 사람과 짐승이 살기에 매우 적합하며, 광대하다는 것은 고센 땅에 비해 매우 넓고 자유스럽다는 뜻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는 자연적으로 비옥한 토지를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실 은혜가 풍성하며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9,10: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반드시 출애굽을 시키셔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제’ 지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백성의 부르짖음에 결코 외면치 않고, 불의한 자에 대하서는 공의의 심판을 반드시 행하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반드시 구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책임자로 선정하신 것에 대하여, 자신의 무능과 부족함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거 40년 전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 것처럼 행동하던 것과는 반대로, 이제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어찌 막강한 힘과 권력을 쥐고 있는 바로 앞에 설 수 있겠느냐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세와 같이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자신의 무능함께 주저하는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임마누엘’을 뜻합니다. 이는 모세의 무능을 채워 능력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출애굽의 사역은 단순한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해방이며 구속사적 사건으로 그 주체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출애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출애굽 한 후에 바로 이 장소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3-22: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당신에 대하여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시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모세가 여호와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확고한 믿음으로 출애굽 시에 닥쳐 올 여러 가지 환난들을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어떤 인격체에 붙이는 일정한 칭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그 사람의 본성과 활동상 및 신분이나 가문 등 그 생애 전반을 반영합니다. 왕이 사신을 파견할 때는 왕의 패나 자신의 이름이 적힌 도장을 찍어줌으로써 임무를 위임하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여호와의 성호를 확인한 것은 자신의 출애굽 사역이 여호와의 위임을 받은 대리 사역임을 확인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신이 8개가 있었던 애굽인들은 신의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 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생활 습관 전반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들로부터 당연히 있게 될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모세가 하나님의 성호를 물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예흐웨 아쉐르 예흐웨: אהיה אשר אהיה) ‘나는 존재한다.’는 뜻의 ‘예흐웨’와 인칭관계  대명사 ‘아쉐르’가 결합된 말로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으시고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자유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자존(自存)적 특성에 강조점을 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달리 완전 독립, 초월적인 분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I am who I am.)으로 이 세상 모든 피조계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그들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자존자‘라는 말씀 속에는 언약과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신실성과 영원불변성이 부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애굽에 있던 여러 우상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참 신이심이 강조되어 잇습니다.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여호와’는 거룩하신 존칭어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여호와’란 말은 ‘야웨’ 혹은 ‘야훼’로 발음이 되는 말의 자음에다 ‘주(主)’라는 뜻을 가진 ‘아도나이’의 모음을 첨가하여 부른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란 성호가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언약을 맺을 때 사용된 이름이라면(6:3; 창 17:1), '여호와‘는 언약을 성취하실 시점에서 사용된 성호입니다. 따라서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 이스라엘 조상들과 맺은 언약, 즉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영원한 이름‘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 가장 적절한 이름이므로 결코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성호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영원불변하시듯 ’자존자‘라는 이름 역시 영원할 것입니다. ’나의 표호‘ 표호는 기념, 기억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하셨고 또 그 이름을 통해 피조물들로부터 영원자존자이신 당신께서 기억이 되며 경배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6,17: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이스라엘 장로들은 나이가 많은 자라기보다는 각 집단의 대표자로 인격과 덕망이 있는 자들입니다. 정치적인 체계나 행정 체계를 갖추지 못한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들 장로들의 존재야말로 각 혈연 집단 간의 의사소통의 역할을 담당하며 연대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권고하여’는 ‘만나다, 방문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출애굽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말하였거니와’ 하나님께서 이미 언약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출애굽 및 가나안 땅 정복에 관한 내용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창 15:13-21).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식언치 않으시며 한번 약속하신 바를 끝내 이루고야 마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민 23:19). 우리의 구원이 영원한 이유는 바로 여호와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여기에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장로들로 모세의 전하는 말에 신중히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혹시 백성들이 자기를 멸시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불식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이는 우상과 죄악의 도성 갈대아 우르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만나셨지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는 것은 이 만남이 모세 개인이 아닌 히브리 민족 전체의 구원과 관련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희생’ 출애굽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의 박해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노예적 굴종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의 여호와 신앙을 파괴하고 신앙공동체를 괴멸시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신앙은 히브리 민족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구속사와 직결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단순한 제사 의식의 차원을 넘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사흘 길’ 쯤 가라는 것은 고센 땅에서 호렙 산까지 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단순한 거리의 문제를 떠나 애굽의 우상 문화와 압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거리라는 영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9,20: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아노니’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무한하신 지식으로 아신다는 뜻인데, 사람 편에서 보면 ‘경험하여 확실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강한 손’ 은 하나님의 권능 또는 이적을 가리킵니다. 출애굽의 역사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신적인 역사 즉 구속사임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신다고 해서 그들은 이스라엘 보내기를 꺼려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즉 강한 손으로 여러 가지 이적을 보이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보낼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적들은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애굽 신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 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갈 때에 노예처럼 비참하게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귀한 손님처럼, 전쟁에서의 승리자처럼 당당하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갈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12:35,36).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취하는 재물은 그동안 당한 노동 착취와 억압에 대한 대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과 불의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을 행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이 당한 아픔과 고통을 반드시 신원하시고 보상해 주시는 분이는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하나님께 드릴 희생 제물과 성막 건축을 위해 미리 준비된 것으로 ‘여호와 이레’의 차고 넘치는 은혜입니다. ‘이웃 사람’은 애굽 사람으로 비록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노예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애굽 사람들과의 교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 히브리인들 중에 어떤 사람은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을 지닌 애굽 사람들의 가정에 우거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구할 때에 그들은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과 같이 반드시 주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외형적으로 볼 때에 애굽 사람들이 자발적인 태도로 재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불평등과 불의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한 성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