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제1장 강해 –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야곱의 장례와 요셉의 죽음으로 창세기를 마감한 후에 무려 400년간의 시공을 뛰어넘어 출애굽기가 시작이 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1-7절에서는 야곱의 권속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기사가 간략히 소개되고 있고, 8-22절에서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난 후에 야곱의 후손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전락하여 학대를 받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심히 번성하여 강대하게 되었습니다.
1-7절 –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권속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며, 야곱의 12아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애굽으로 내려간 권속이 요셉을 포함하여 모두 70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애굽 거주 400년의 기간은 이스라엘의 민족 형성기로 아브라함에서 이삭, 야곱으로 이어진 족장 중심의 구속사가 언약 민족 혹은 언약 국가 중심의 구속사로 확대 출발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권속이라는 말은 ‘집, 가족’이라는 뜻으로 야곱의 직계 손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처음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 70인이었던 숫자가 하나님의 약속대로(창 15:13-21) 심히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그 어떤 환경이나 계획을 초월하여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특별히 부여받은 언약의 이름입니다(창 32:28). 야곱의 권속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을 이루고 출애굽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구속사적인 사건임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4: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야곱 아들들의 이름으로 나이나 출생 순에 따라 기록되지 않고 그 모계를 따라 정실 레아와 라헬의 아들들로부터 시작되어 여종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 이름이 차례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는 적출을 서출보다 더 중요시했던 야곱 당시의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더불어 노예 제도를 인정하던 계급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요셉의 이름이 빠진 것은 이미 먼저 애굽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창 37:28).
5: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 인이었더라.
야곱의 권속이 애굽으로 이주할 당시 요셉은 이미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가게 된 사건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정한 형들의 간계와 질투에서 비롯된 반인륜적인 비극이지만,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기아에 허덕이던 언약 백성을 구원하여 출애굽의 언약 민족으로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며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창 45:7,8). ‘야곱의 혈속’이라는 말은 ‘야곱의 허리에서 출생한 영혼들’이라는 뜻인데, 이는 야곱을 중심하여 이뤄진 가족 구성원을 뜻합니다.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이주했던 정착 제1세대들이 모두 죽고 그곳에서 태어난 세대들로 완전히 교체가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 시기는 모세의 출생 직전으로 출애굽 사건을 B. C. 1446년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정착한 지 350년이 된 B. C. 152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 세대의 마감을 알리는 본문은 곧 다가 올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의 생육과 번성 상태를 ‘중다하고’(생명력이 넘치는 나무가 많은 실과를 맺은 상태) ‘번식하고’(수많은 무리가 우글대는 상태) ‘창성하고’(막강한 팽창력으로 증가하는 상태) ‘심히 강대하여’(육체적, 수적으로 탁월해진 상태)라고 네 번이나 강조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수적 증가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그것이 단순한 물리적, 자연적 증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이며 약속의 결과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창 22:17). 이 같은 이스라엘 자손의 놀라운 수적 증가와 번성은 애굽 인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수난과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온 땅에 가득하게’ 이스라엘 민족의 기하급수적인 팽창을 강조한 말로, ‘온 땅’은 애굽의 고센(창 47:6) 땅에 차고 넘칠 만큼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애굽의 400년 기간은 하나님의 기억에서 잊혀 진 절망의 기간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케 하시는(창 1:28)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와 위로가 항상 함께 한 소망의 기간이었음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8-14: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과 노역
이제 출애굽의 서막이 점점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서론적인 부분으로, 이스라엘의 급속한 증가와 이를 두려워 한 애굽 왕 바로의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로의 박해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개입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택한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연단은 곧 그것을 통하여 더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번성과 고난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이중적인 정황으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복과 번성을 받은 존재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사단의 세력이나 세상의 핍박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동시에, 고난은 성도의 신앙의 성숙케 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살전 5:16).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새 왕은 요셉이 애굽 총리로 재임할 당시의 왕조였던 셈족 계통의 힉소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등장한 제18왕조(B. C. 1580-1314)의 세 번째 왕인 투트모세 1세를 가리킵니다. 이 왕은 애굽 총리로서의 요셉의 치적을 몰랐다기보다는 오히려 요셉이 자신과 다른 종족, 곧 그들이 몰아낸 힉소스 왕조와 같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경멸한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일어나서’라는 단어가 뒤를 잇는다는 뜻이 아니라 ‘반기를 들어 일어나다’라는 뜻에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9: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절대 군주 아래서 왕이 그 백성에 대해 사용하는 명칭으로 당시 바로가 애굽 백성들에게 신(神)과 같은 절대 권력을 행사했음을 암시합니다. 애굽에 내린 재앙과 출애굽의 역사는 자신을 신격화한 바로의 극단적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을 수 있는 참되고 유일한 신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는 말은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보다 많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놀라운 수적 증가에 댄 경계심과 증오심이 표출되어 나온 과장법적 표현으로, 애굽 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과 민족 감정을 부추겨 그들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악한 저의에서 나온 말입니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하노라 하고
‘자’ 이 말은 주변 사람들을 크게 돌격하는 말이며, ‘지혜롭게 하자’는 말은 ‘교활하게 다루자’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엄청난 증가에 위협을 느낀 바로가 그들에게 더 심한 학정을 베풀 것을 시사하는 발언입니다. 본 절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학대하는 3가지 이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민족적 동질성과 단결력이 강한 이스라엘의 급격한 수적 번성에 대한 두려움, 둘째 애굽 북쪽의 군사적 요충지인 고센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이 당시 애굽 주위의 열강들과 제휴하여 애굽을 칠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 셋째 라암셋과 비돔의 국고성 건축 등 애굽에 막대한 노동력을 제공하던 이스라엘이 탈출함으로써 막대한 노동력을 일거에 상실해 버릴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와 뜻에 그 기반을 두지 않은 권력은 아무리 바로와 같은 절대 통치 기반을 가지고 있어도 항상 두려움과 권력에 대한 연연으로 전전긍긍하게 되고,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불의와 살육의 자행이라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감독들은 바로가 히브리인들을 조직적으로 억압하고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특별히 세운 고위 관리로, 이 밑에는 애굽 인으로 구성된 ‘간역자’와 히브리인으로 이루어진 ‘패장’ 등 하급 관리들이 딸려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서운 짐을 지워’ 바로가 계획한 더 큰 학정은 벽돌, 진흙, 물 등과 같이 무거운 짐들을 몸으로 나르게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 괴로움들은 이미 55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일이었습니다(창 15;13). 따라서 그 괴로움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한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이스라엘에게 닥칠 구원의 기쁜 소식이 멀지 않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늦지 않은 때, 곧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백성을 친히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국고성은 전쟁이나 기근 등 유사시를 대비해서 변방이나 전략 요충지에 곡식이나 병기를 대규모로 보관해 두던 창고를 가리킵니다. 이런 성을 세우는데 이스라엘을 동원한 것은, 첫째 가혹한 노동 착취를 통해 히브리인들의 민족적 동질성을 말살하고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바로를 숭배토록 하기 위함이며, 둘째 히브리인들의 육체적 건강을 빼앗아 수명을 단축시키는 동시에 왕성한 출산력을 막으려는 것이며, 셋째 노동 착취와 노예의 삶을 일상화시켜서 영원히 노예로 애굽에 봉사하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애굽의 착취와 억압이 점점 강도를 더해 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수적인 증가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인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히브리인을 핍박하는 애굽 왕 바로는 사단의 세력의 상징으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시도가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자신들마저도 멸망하고 마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고난의 종교로 고난에 대한 긍정적 의미 부여와 그 극복을 통하여 참된 성장과 영적 부흥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마 16:24). ‘근심하여’ 상대를 미워하고, 혐오하며, 두려워한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굽 인들이 이스라엘 대하여 일면으로는 멸시와 조소를 보내지만, 또 다른 일면으로는 떨칠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니는 것입니다(히 11:38).
13,14: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인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엄하게’ 이 말은 완전히 짓이기다, 가루로 만든다는 뜻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의 억압의 상태를 나타낼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애굽의 억압과 착취가 극에 달했음을 묘사하며, 상황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적인 개입, 즉 애굽에 대한 심판과 출애굽을 정당화시켜줍니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고역’은 짐승에게 굴레를 씌우듯 하는 중노동을 통한 출산 억제책의 일환으로 바로에 의해 행해진 가혹한 노동 착취 정책에 대한 언급입니다. ‘괴롭게 하여’ 이 말은 쓰다, 통곡하다, 아파 신음하다는 뜻으로, 바로에 의해 당하는 고통과 억압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는 국고성 건축에 동원된 이스라엘의 노예적인 삶을 보여주며,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은 조상 때부터 해 오던 목축업으로부터 유리되어 농경문화에 종속되어 가는 히브리인들의 문화적 예속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농경문화는 항상 그 속에 풍요한 수확, 자연 조건 등과 결합되는 우상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농경문화에 예속되는 것은 민족적 동질성의 파괴와 함께 우상숭배라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는 간접적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농사일이 중노동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일 강의 범람으로 인해 수시로 전답이 물에 잡기는 애굽과 같은 나라에서는 엄청난 노동력이 요구되는 중노동입니다. 또한 수로(水路) 공사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농사일로 인한 이스라엘의 고통은 일반적인 다른 농사보다 훨씬 가혹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15-22: 바로의 히브리인 말살 정책
바로는 인구 억제 정책의 일환으로 히브리인에게 심한 노역을 부과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습니다(8-14). 이제 탄압의 강도를 더하여 새로 태어나는 히브리 사내아이를 모조리 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런 극악한 정책마저 하나님을 두려워 한 두 산파의 불복종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이에 바로는 더 강력하게 애굽 전역에 걸쳐 히브리 신생 남아 살해를 공개적으로 명하여, 히브리인들은 심각한 생존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죽음과 위경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워지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의 고통과 신음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며(시 50:15; 렘 33:3), 또한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신뢰케 하는 신앙의 촉매제이며, 하늘 가나안으로 더 빨리 가도록 하는 은혜의 풍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욥 42:5).
15,16: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연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애굽 왕이 이스라엘의 유아 살해를 획책하는 장면입니다. 인구증가를 저지하기 위한 첫 번째 계획(극심한 중노동)은 실패로 끝난 것입니다. 권력 유지와 유아 살해 계획은 마치 신약에서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이스라엘의 모든 유아를 살해하도록 명령한 헤롯의 음모(마 2:16)를 연상하게 하는데, 이런 두 통치자의 비인륜적 행위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타락하고 패역한 인간 심성의 단면을 부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 산파’ 산파는 산모의 출산을 돕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들은 히브리인임이 분명한데, 이름 곧 ‘십브라, 부아’란 명칭은 함족 계통이 아닌 셈족 계통의 언어라는 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시 거의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스라엘 가정을 두 명의 산파가 다 돌볼 수 없으므로, 이들은 산파 중에 우두머리로, 명령을 하달 받고 다른 산파들에게 전한 것 같습니다. ‘조산 할 때’ 여인이 출산하기 위해서 조산대 위에 앉아 있을 때라는 뜻으로, 조산대는 고대 이집트에서 여인들의 출산을 돕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의자로 출산 2-3일 전부터 산모 집에 비치해 두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인의 팽창을 두려워한 바로는 산파들에게 내린 히브리인 남아 살해 명령으로 남자이면 죽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의 상징으로 성도들을 향해 이들이 꾸미는 흉계와 음모의 잔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놀라는 것 혹은 단순한 공포심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 또는 참된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입니다. 산파들은 400여 년에 걸친 애굽 생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신앙을 잃지 않았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던 절대 군주인 바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신생 남아 살해 정책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8,19: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여기에서 ‘부르다’는 말은 단순한 호출이 아닌 큰 소리로 외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산파들에 명을 거역한 것에 대하여 바로가 대노(大怒)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산파들은 왜 살렸느냐는 추궁에 대한 답변으로, 히브리 여인들이 건강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해산을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인들은 동양인과 달리 체질이 강해 산파의 별다른 도움이 없이 혼자 출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바로 앞에서도 침착하게 변명을 하는 모습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길과 지혜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고전 10:13).
20,21: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왕성케 하다’는 말은 ‘일으키다, 세우다’는 뜻으로 가정을 이룬다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복으로 말미암아 그 자녀들과 가업이 크게 번영케 되는 것을 뜻합니다(삼하 7:11). 이런 복은 그들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답 또는 은혜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반드시 붙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산파를 통한 히브리 신생 남아 학살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로는 자신의 마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공개적이며 잔인한 유아학살 정책을 시행하게 됩니다.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하나도 빠짐없이 나일 강물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여자는 살리라고 하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여자는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남자의 종속물로 결혼에 의해 애굽 인으로의 동화가 가능하며 출산을 통한 후손의 번식과 가사 노동 등 중요한 노동력의 일부를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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