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 29장 강해 - 야곱의 결혼
벧엘에서 여호와를 만난 야곱은 확신을 갖고 밧단아람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우물이 있는 들이었습니다. 마치 이삭의 결혼을 위하여 밧단아람으로 향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과 같은 경우로 여호와께서 발걸음은 인도하셔서 목적지에 곧바로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중혼(重婚)을 하게 되고 자식을 낳게 됩니다.
1: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야곱이 에서의 보복을 피하여 부모가 있는 브엘세바를 떠날 때에는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겠습니까? 앞이 캄캄하다는 말을 이럴 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벧엘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언약을 체결한 후에는 소망이 마음속에 가득하게 되었고, 하란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매우 가벼웠을 것입니다. 야곱은 드디어 하란에 도착하였습니다.
2,3: 본 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웠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물을 양떼에게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구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양에게 물을 먹이고는 여전히 우물 아구 그 자리에 돌을 덮더라.
‘본 즉 들에 우물이 있고’ 이 말은 “보라! 우물이 들판에 있도다.‘라는 뜻입니다. 우물이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하던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 우물을 발견하고 기쁨을 외치는 장면입니다. 이 우물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났던(24:10-27) 그 우물과는 다른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난 우물은 마을 근처에 있던 식수용 우물인 것에 반해, 야곱이 도착한 우물은 양떼를 위에 들판에 파놓은 목축용 우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양 세 떼‘ 아마도 주인이 각기 다른 양 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그 지역에서 목축을 하는 모든 목자와 가축이 모인 후에 합력 우물을 덮은 돌을 들어내고 물을 마신 후에 다시 덮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막 지대에 물은 매우 귀하기 때문에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물을 덮은 돌은 매우 크고 넓은 것으로 장정 몇 명이 모여야만 움직일 수 있는 무거운 것으로 보입니다.
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형제여 어디로서뇨. 그들이 가로되 하란에서로라.
구약에서 ‘형제(아흐: אח)’라는 말은 비단 친 형제 뿐만 아니라 먼 친족 간에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13:8; 민 16:10). 더 넓게는 같은 동족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레 25:46). 야곱은 낯선 지역의 목자들에게 친근하게 건네는 인사말로 사용하였습니다. ‘어디로서뇨?’ 들판에 있는 우물과 성읍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목자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이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하란에서로라.’ 당시 하란 지역에는 아브라함의 동생인 나홀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은 친족 마을을 제대로 찾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5: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가로되 아노라.
데라에게는 세 아들 하란, 아브라함, 나홀이 있었습니다. ‘브두엘의 아들 라반’이라고 하지 않고 ‘나홀의 손자 라반’이라고 묻는 이유는, 그 지방에서 나홀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기 때문이며, 나홀은 그 지방에서 상당히 유력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반은 브두엘의 아들이며, 리브가의 오라비입니다. 본래 야곱에게는 외삼촌이었는데, 나중에 장인이 되었습니다.
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가로되 평안하니라. 그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평안’에 해당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샬롬(שׁלם)’인데 평화, 구원, 완전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샬롬은 육신의 평안뿐만 아니라 영적인 평안까지 생활 전반의 모든 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목자들은 라반의 딸 ‘라헬’이 지금 우물을 향해서 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을 합니다. 당시 베드윈 족과 아랍 족들은 여자가 양떼를 치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합니다. 후일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그 딸들에게 양떼를 맡긴 것과 같은 것입니다.
7,8: 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 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아직 해가 많이 남았으니 짐승을 우리에 넣을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통 짐승은 하루 종일 들에서 풀을 뜯게 하다가 해가 질 무렵 경인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에 가둡니다. 그래서 물을 먹이고 가서 또 풀을 뜯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야곱의 심중에는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서 친족끼리 조용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속셈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란의 목자들이 그리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우물의 공동 이용 규칙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9: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침이었더라.
라헬은 ‘암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반의 둘째 딸로 후일 언니 ‘레아’와 함께 야곱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은총으로(30:22)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30:24). 그러나 야곱과 브엘세바로 오는 중에 베냐민을 낳은 직후 죽고 말았습니다(35:16-20).
10,11: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야곱은 목자들이 돌을 옮기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물을 떠서 라헬의 양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물을 다 먹인 후에야 비로소 야곱은 라헬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경우에는 입 맞추는 여러 경우가 있는데, 야곱의 경우에는 가까운 친족에 대한 기쁨과 애정 표현입니다. 야곱이 큰 소리로 운 이유는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를 잘 찾고 또 친족까지 만난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히브리인들은 기쁠 때나 슬픈 때나 울 때에는 조용히 울지 않고 큰 소리로 우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12: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생질(아흐:אח)은 앞에서 ‘형제’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친척, 자손 등도 ‘아흐’라고 부르는데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가리켜 ‘형제’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골육’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13:8). 야곱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더니, 라헬은 즉시 달려가서 아버지 라반에게 알렸습니다.
13,14: 라반이 그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매, 라반이 가로되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하더니
라반은 멀리서 온 야곱을 매우 기쁘게 맞아들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감정 표현에 있어서 대체로 직설적이면서도 솔직했다고 합니다. 라반은 아브라함의 종에게 여동생 리브가를 딸려 보낸 후(24:59,60) 대략 97년 만에 리브가의 아들인 조카 야곱을 만나게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야곱을 맞는 라반은 기쁨과 벅찬 감회 속에 젖어들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란으로 오게 된 연유를 자세하게 말하였습니다. ‘골육’ 뼈와 살이라는 뜻으로 부모 형제를 비롯한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삿 9:2; 삼하 5:1). 야곱이 라반과 한 달 동안을 같이 지낸 것으로 보아, 라반은 야곱의 세세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확실한 골육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 내게 고하라.
야곱은 한 달 동안 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힘 닿는 대로 열심히 외삼촌의 일을 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곱과 정식 계약을 맺고 오랫동안 머물도록 할 계획을 가진 것 같습니다.
16,17: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안력(眼力)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레아는 라반의 장년이며 야곱의 첫째 부인으로 6남 1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동생 라헬만큼은 미모가 뛰어나지 못해 야곱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후에 야곱과 더불어 가나안 땅에 와서 그곳에서 죽어 선영(先塋)인 막멜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49:31). ‘안력이 부족하고’ 이 말은 ‘눈이 유악하고’라는 뜻으로, 시력이 약하다는 뜻 외에 눈에 총기가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아가 여성적인 매력이 부족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렇다고 용모가 못생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라헬은 우아하고 모양이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여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출중한 미인입니다. 야곱은 외모로 인해서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레아의 아들인 유다 혈통으로부터 메시아가 태어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18: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연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신부 측 부모에게 신부 몸값(결혼지참금)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자의 집에서는 딸이 출가하면 그만큼 노동력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출 2:16). 그런데 결혼지참금은 돈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노동력도 가능했습니다(삼상 18:25). 따라서 당시 결혼지참금이 없었던 야곱은 돈 대신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신부 몸값을 대신하려한 것입니다.
19,20: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고대에서는 인척간의 결혼은 흔하였습니다. 인척 결혼은 통하여 그만큼 더 세력을 확장하고, 공고한 동맹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관습은 동양의 여러 부족들, 특히 아랍 유목민들인 베드윈 족 중에서는 여전히 시행되고 있습니다. 7년은 매우 긴 세월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였고, 라헬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작은 소망으로 지루하지 않고 짧은 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헬의 몸 값 대신 계약한 7년의 노동력 제공 기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약혼한 아내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구로 보아 라반은 7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지났음에도 야곱을 라헬과 혼인시키지 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2-24: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라반은 혼인 잔치를 벌였는데, 일반적으로 이 잔치는 7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관습상 결혼식 날 낮에는 신랑과 신부가 같이 있지 않는다고 합니다. 밤중에 동침할 때 비로소 둘이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라반은 약속대로 ‘라헬’을 신부로 들이지 않고, 대신 언니 ‘레아’를 야곱에게로 들여보냈습니다. 나중에 라반은 핑계로 동생을 언니보다 먼저 시집을 보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레아에게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7년이나 연애를 한 라헬과 언니 레아를 구별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① 당시 풍습을 좇아 신부는 얼굴뿐만 아니라 온 몸 전체를 베일로 가렸기 때문입니다. ② 레아가 야곱을 맞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입니다. ③ 야곱은 결혼 잔치의 주인공으로 축하를 받으며 술에 취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 사전에 라반의 계획을 듣고 레아가 라헬처럼 치밀하게 처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로 이를 묵인했을 것입니다. 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있으셨습니다. 레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를 이루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야곱의 눈과 귀가 정상이 아니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딸에게 몸종을 붙여주는 일은 당시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고대 유물인 ‘누지 토판’에 의하면, 여주인에게 딸린 시녀는 만일 여주인이 임신하지 못할 경우에 대신 아이를 낳아 여주인의 소생으로 돌렸다고 합니다. 후일 레아의 시녀 실바와 라헬의 시녀 빌하는 이런 관습에 따라 야곱에게 아들들을 낳아 주었습니다(30:3,4,9-13).
25,26: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야곱은 라반의 속임수에 빠져 라헬 대신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이 무효라고 야곱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라반은 하란 지역의 풍습을 들어서 언니 레아를 먼저 시집보내야만 했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그 핑계는 사실이며 오늘날에도 인도나 이집트 등지에서는 관행으로 지켜지고 있다고 합니다.
27-29: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 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여기서 칠 일은 레아와의 결혼 잔치 기일을 말합니다. 그런 후에 라헬도 아내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조건은 또 다시 7년 동안을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순순히 라반의 말에 따랐습니다. 그것은 타향살이하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일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7일 후에 라헬도 야곱의 아내가 되고, 라헬의 시녀 ‘빌하’도 시녀로 함께 주었습니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 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야곱은 처음 하란에 왔을 때부터 라헬을 만났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니 결혼 후에도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할 것은 자명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또 다시 7년을 라반에게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총’이 없다는 것은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레아는 라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야곱의 사랑을 적게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모든 사정을 감안하시고 레아를 불쌍히 여겨 출산의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무자하였습니다. 이는 라헬만을 편애하는 야곱에게는 책망의 뜻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라헬에게는 언니 레아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겸손을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32: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레아가 처음 낳은 아들은 ‘르우벤’입니다.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의 의미로 미루어 볼 때 동생 라헬로 인해 야곱으로부터 상대적 무시를 당했던 레아가 얼마나 자식 낳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아들을 낳았으므로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는 자신이 아들을 낳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며, 자신이 당하는 괴로움을 갚아주신 것이라고 깨닫고 있습니다.
33: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레아는 르우벤을 낳고도 여전히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아는 오직 하나님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들을 주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으로 둘째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시므온’입니다. 이는 레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34: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아들을 둘씩이나 낳았지만 여전히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셋째 아들을 이름을 ‘레위’라 하였습니다. 이는 이제 남편과 진정한 부부로의 연합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35: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넷째 아들 유다를 낳은 레아의 기쁨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유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도 이제는 레아를 전보다 더 사랑해 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넷째를 낳은 후에 레아의 출산은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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