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 제21장 강해 - 이삭의 출생과 이스마엘의 추방

chukang 2011. 7. 9. 14:16

  창세기 제21장 강해 - 이삭의 출생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이삭이 출생하였습니다. 이삭의 출생과 함께 이스마엘과는 엄정한 분리가 초래되었으며, 이는 구속사의 원리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인정한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은 언약이 최초로 주어진 뒤 25년이나 지난 뒤에 주어졌는데, 육신적으로는 후손을 얻을 수 없는 노쇠한 부모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여호와’라는 성호는 언약과 구속사에 관련될 때에 사용이 되는데, 여기에서는 이삭을 주신다는 언약이 이루어졌으며, 이삭을 통한 구속사를 이끌어 가실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성호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권고하셨고’라는 말은 우호적인 목적으로 방문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18:10)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사라를 찾아오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2: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한이 되어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언약은 후사에 대한 구체적 언급(17장)이 있은 지 무려 13년 만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16:16; 17:24,25). 이처럼 오랜 시일이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언약을 성취하신 이유는 이삭의 탄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당시의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로는 절대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노쇠한 육체였습니다. 인간의 불가능한 상황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마침내 얻은 이삭은 장차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처녀의 몸에서 약속을 따라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사 7:14).

 

3: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이삭은 ‘웃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노년에 얻게 될 후사에 대한 언약에 크게 기뻐하며 웃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17:19).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늙은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자조적인 웃음을 웃기도 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으로 지었습니다.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되는 외적인 증표로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것이며,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17:9-14).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준행하였습니다.

 

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 세라.

  후사에 대한 최초의 언약이 있은 지 25년(12:1-4), 이미 90세 된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로 믿음을 지킨 아브라함은 마침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을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6: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을 들은 사라는 불신과 의심의 웃음을 웃었지만(18:12-15), 이삭을 출산한 뒤에는 기쁨과 찬양을 돌리며, 이삭의 출생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감사하며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7: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그 어느 누구도 사라가 자식을 낳을 줄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기적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大宴:큰 잔치)을 배설하였더라.

  동양의 관습으로는 적을 때는 날에 종교 의식과 함께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이 행사는 대게 3살 경에 이루어졌는데(마카베오하7:27), 이로 미루어 당시 이스마엘은 17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9: 사라가 본 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희롱하다’는 말은 상대방에게 멸시와 조소 등으로 자극을 주는 행위입니다. 이는 17살이나 되는 이스마엘과 3살 난 이삭의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이삭에게 상속권을 빼앗긴 데 대한 평소의 불만이 잔치를 계기로 표출된 핍박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장차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의 압제를 당하게 되는 것과 성도들이 불신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을 예표한다고 하겠습니다.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영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사라의 요구는 아브라함과 사갈의 법적 혼인관계를 파기하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는 것입니다. 사라는 잔치 자리에서 이삭을 희롱한 이스마엘이 상속권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하여 이런 조치를 요구한 것 같습니다. 이런 요구는 표면적으로는 한 여인의 질투나 재물에 대한 욕망으로 보이지만, 택한 자와 불신자를 분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비록 후처에게서 나기는 했지만 아들임에는 분명합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들로서 많은 애정을 쏟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의 요구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을 통하여서도 ‘분리’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만이 유일한 언약의 후사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위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는 단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그 후손들이 구속사의 택한 백성으로서는 아니지만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의 번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17:20) 이스마엘의 후손도 12방백으로 번성하여, 그의 후예들이 중근동과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체하지 않고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만을 주어 하갈 모자를 내어 보냈습니다. 이는 가정의 불화이기도 하며, 그러나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배려가 있는 동시에 이스마엘도 역시 다른 방편으로 보호해 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적인 방편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결과가 고통과 슬픔의 이별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나 브엘세바까지 갔으나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살 길은 오직 고향인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오랜 객지 생활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15: 가죽 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하갈은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고 갈증이 심해지는 절망적 상태에게 아들 이스마엘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애절한 심정으로 그늘이 있는 떨기나무 아래서 그 아들을 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이스마엘 앞에서는 울지 못하고, 살 한 바탕 즉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아들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하나님(엘로힘)’이라는 성호는 절대 주권자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으로 언급된 것은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언약의 후손으로서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속에서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의 고통과 우는 소리를 보시고 들으셨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천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이스마엘을 잘 보호하고 돌봐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사막 가운데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그가 반드시 큰 민족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막 한 가운데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 고통 속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과 확신으로 위로하고 계십니다.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하갈은 아브라함을 떠나 절망 속에서 사막을 방황하는 가운데, 배고픔과 갈증과 슬픔으로 인하여 판단력이 매우 흐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 영혼과 마음이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비록 육체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으나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안정을 되찾고 주변을 자세히 둘러 볼 수 있는 힘을 회복하게 되어 샘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절망한 영혼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육신 또한 강건해 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하갈은 물을 떠다 아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이는 거칠고 메마를 사막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님만이 생명수가 되심을 알게 합니다.

 

20,21: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이스마엘은 장성하여 활 쏘는 자가 되었으며, 그 자손들도 활 쏘는 부족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거하는 곳은 바란 광야로, 동으로는 아라비아, 서쪽으로는 애굽의 술 광야, 북으로는 팔레스틴 남부와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는 들나귀 같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16:12) 이곳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에게 신부로 애굽의 여인을 택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이스마엘이 더욱 약속의 후손에서 멀어져 가게 되었습니다(25:12-18). 결국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거친 광야에서 유랑하는 전사(戰士)로서 이름을 떨이며 전쟁과 파괴를 일삼는 민족이 되었지만, 이삭의 후손들은 인류 구속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켜 나가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22-24: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멩세하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보낸 후에 아비멜렉과 비골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을 방문한 목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점차 강성해 가는 아브라함과 동맹 관계를 공식적으로 맺기 위해서입니다.(31) 그들이 먼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그랄 지역으로 찾아왔을 때부터 시작하여 이삭의 출생과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는 모든 과정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즉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강권적으로 보호하고 계심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아브라함을 두려워하여 상호 우호조약을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처음 만났을 때에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적인 사람임을 알기 때문에 공식적인 우호조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그의 요구를 수락하였습니다. 이는 신앙인은 이웃을 배타시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25,26: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우호조약을 맺기에 앞서 우물의 소유권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당시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대부분이 물과 관련이 있으며, 물이 생명의 유지에 필수적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물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우호조약을 맺는 것은 언제든지 파기될 소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자신들이 판 우물을 강제로 빼앗은 일에 대하여 책망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의 백성들은 그곳에 나그네로 온 아브라함 일행으로부터 기득권을 행사했을 것이며, 아비멜렉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은 조약체결을 위하여 계약 당사자에게 예물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관례는 일반적인 것으로 (왕상 15:19; 사 30:6; 39:1)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8-30: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상호 우호조약 체결과는 달리 아브라함이 우물의 소유권을 확정짓기 위해 또 다른 계약을 맺기 위하여 암양 새끼 일곱을 따로 주는 것입니다. 분쟁 상태에 있는 우물의 소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함입니다.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브엘세바는 ‘일곱 우물’이라는 뜻으로, 일곱 암양 새끼로 우물의 소유권을 확정지은 것에 개념하여 붙여진 지명입니다.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브엘세바 역시 당시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블레셋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비멜렉이 계약 체결 후 돌아간 곳은 자신이 거주하며 통치하는 곳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33,34: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에셀나무는 주로 시내 반도에서 서식하는 상록수로 재질이 단단하며 키가 커서 넓은 그늘을 만들며, 사막에서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나무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작별한 뒤 이 나무를 심고 여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를 드린 것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은혜를 베푸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기념하고 또 아비멜렉과 맺은 계약이 오래 지속되기를 원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그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이는 단지 명멸해 가는 수많은 이방신들과는 달리 영원히 살아계셔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평안을 주시며, 언약을 신실히 준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매우 깊이 알고,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내면적 신앙이 성숙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삭이 장성할 때까지 거주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