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 제6장 강해 - 홍수 대 심판과 구원의 방주

chukang 2011. 3. 26. 14:38

창세기 제6장 강해 - 홍수 대 심판과 구원의 방주

 

  6-8장은 대홍수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인류를 멸망시켜야만 했던 당위성으로 인류의 극심한 타락의 내용이 먼저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려 120년이라고 하는 방주 건립 기간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대홍수는 인류에게 모든 죄악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홍수 후에도 인류는 계속 타락의 길을 걷고 말았으며 종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이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최후의 유일한 방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받은 인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딸들이 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여자로 인한 인류의 타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류 중에서도 경건한 ‘셋’ 계열의 믿음의 자녀들이 불신자들의 딸들로 인하여 올무에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들의 딸들이라는 표현에 대하여는 대략 세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❶ 지체 높은 집안의 청년과 미천한 집안의 처녀라는 유대 랍비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무시해도 좋은 견해입니다. ❷ 선한 천사들과 인간의 딸들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기한 성경의 용례(욥 1:6; 2:1; 38:7; 단 3:25)와 유다서 1:6, 7절에 근거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고 있으며(신 32:5; 시 73:15; 80:17; 호 1:10), 유다서의 내용도 역시 천사들의 결혼 행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견해는 발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만일 이 견해를 받는다면 후일 타락과 구속 역사가 천사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될 것입니다. ❸ 경건한 셋 계열의 후손과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들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가 성경 용례 상 경건한 성도들을 가리켜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과, 셋의 후손들에 의해서 비로소 여호와께 대한 경배가 행해졌다는 점(4:26)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신학적 의미와 구속사적 맥락에 가장 부합합니다.

  딸들의 아름다움은 인격적인 면이나 종교적인 경건성과는 무관한 육체적 미모와 향락적 채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좇아(요일 2:16) 배우자를 취하는 당 시대의 세속성 및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흐름은 믿음의 자녀들의 신앙까지 흔들어 놓을 정도로 강한 타락의 유혹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움 때문에 아내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결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라는 주장은 그 의미와 논리상 합당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혼인을 할 수 없는 영체이기 때문입니다(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나의 신’은 일반적으로 성령을 일컫습니다. KJV나 NIV에서도 Spirit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Whitelaw나 Keil은 이를 ‘생령’으로 해석을 하여 홍수로 목숨을 거두어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삶 그 자체는 이미 죽음이라는 것과 직결이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대홍수로 말미암아 육적, 영적으로 모두 죽음의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대홍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육체(바사르:בשר)’는 헬라어로 ‘사르크스(σάρξ)’입니다. 이는 단순한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의 오염으로 말미암아 심히 타락한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이 말은 120년 후에 홍수 대심판을 집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홍수는 노아 600세에 있었으므로(7:6) 당시 하나님의 경고는 노아 480세 때의 일입니다. 이 기간은 인간들에게 회개의 시간인 동시에 하나님께는 인내와 긍휼의 기간입니다. 하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홍수의 대심판은 임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미 경고가 주어졌지만 최후의 날은 홍수의 대심판과 같이 급작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네피림(נפלים)’은 ‘떨어지다’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하늘로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 혹은 그 후손들로 보기도 하고, 괴물이나 신동(神童)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70인역이나 벌겟역, 흠정역에서는 ‘거인’으로 번역하여 이들의 신체적 장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타락한 자’로써 ‘압제자, 난폭군, 훼방자’ 등으로 봅니다. 이는 당시대의 도덕적 타락상과 잘 부합이 됩니다. ‘용사(깁보림:גברים)’는 ‘강하고 힘센 자’이며, ‘유명한 사람(아네쉐 하쉠:אנשׁי השׁם)’은 ‘그 이름의 사람’으로 타락과 방종과 전쟁과 압제 및 약탈의 시대에 그 이름을 떨친 전쟁 영웅이나 부호 또는 귀족을 의미합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타락해 가는 모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관찰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에 근거하며, 오래 참고 기다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 죄악은 단순한 허물 정도가 아니라 고착되고 증폭되어 가는 그리고 그 전존재를 함몰시키는 죄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어긋나 있어서 회복이 불가능한 죄입니다. 이로 볼 때 당시 인간의 부패상은 광범위하고 내적이며 습관적이며 지속적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더 이상 선한 것을 찾을 수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로 볼 때에 마땅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한탄하사(인나헴:ינחם)’는 “헐떡이다, 신음하다, 숨이 차다‘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 자신 또는 타인의 아픈 현실로 인해 고통 가운데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비통해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근심하시고(아차브:עצב)‘는 ’심령이 찢어지다,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으로 짓눌리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의 타락상에 극한 심정 고통을 겪으시는 하나님의 지고하신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다는 그 자체를 후회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나 실패가 없으신 분입니다(민 23:19; 삼상 15:29). 이 표현은 다만 인간의 타락이나 배반, 또는 불순종 등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감정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한 것입니다.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타락의 중심인물이었다면 이번 심판 대상에 올라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만이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쓸어버리되” 이는 얼룩지고 오염된 부분을 깨끗이 씻거나 닦아내는 것입니다. 홍수의 심판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동식물까지 해당이 됩니다. 물속과 하늘의 새까지도 포함이 됩니다. 이는 인간이 모든 피조계의 주권성과 대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22)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우리 인간의 완전한 구원의 때에 만물 역시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이 될 것입니다(계 21:5).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한탄과 심판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한 줄기 소망과 회복의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노아의 의로운 성품과 행실은 여호와의 눈에 꼭 들었습니다. ‘은혜’는 호의, 용납이라는 뜻 외에도 자비, 사랑, 보호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이고도 충만한 호의와 후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숱한 타락의 무리들 중에서 특별히 노아를 구별해 내사 그에게 사랑과 은총을 흠뻑 쏟아부어주셨습니다.

 

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제는 노아를 정점으로 한 구속사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고 있음을 봅니다. 노아가 의인이라는 말은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당시대의 타인들에 비해 선하고 정직하며 덕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완전한 의인이 아니라,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의 의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았다는 의미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뜻과 동일합니다.

 

10-12: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이 부분은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길 없는 당시대의 극한 타락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비록 노아가 그 가정은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당시의 전체 시대 풍조는 하나님 앞에서 ‘패괴와 강포’ 일변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패괴하여’ 이는 썩다, 타락하다는 의미로, 거역, 불순종, 방종 등 온갖 악으로 인해 악취가 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면밀하게 살리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대로 둘 수가 없는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앞으로 있는 홍수의 대심판을 노아에게 미리 계시하셨습니다. 후일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을 미리 계시해 주셨습니다(18:17-2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자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시 25:14). 이제 멸망과 심판의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후로도 120년을 더 인내하셨습니다. 이는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악인들이라도 그 중에서 한 명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애절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잣나무는 소나무 과에 속하며 재목이 단단하고 치밀하고 내구력이 뛰어납니다. 색깔이나 향기도 좋아서 선박, 성문, 관 등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나무입니다. ‘방주를 짓되’ 이는 물의 심판임을 암시합니다. 이 방주는 추진하거나 제동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일반적인 선박이 아니라, 단순히 물 위에 뜰 수 있는 큰 상자 모양의 배입니다. 배 안에는 ‘간(켄:קו)’ 즉 방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는 노아 식구를 비롯 각종 짐승들을 종류대로 구분하여 각각 유치하기 위함입니다. ‘역청’(코페르:כפר)‘은 송진과 같은 수지로 만든 아스팔트로, 도로포장이나 방수 등의 재료로 사용이 됩니다.

 

15: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방주의 모양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 규모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길이는 136.8m, 넓이 22.8m, 높이 13.68m 가량의 배로, 오늘날의 32,800톤 정도입니다. 이런 크기는 노아 가족과 모든 암수 한 쌍 씩의 동물들과 1년 치의 먹이를 산적하는데 충분한 규모라고 합니다.

 

16: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방주의 모습을 대략 엿볼 수 있습니다. 위에는 안에서 여닫을 수 있는 격자 창문이 여러 개 있었고, 옆쪽으로는 사람과 짐승이 오르내릴 수 있는 큰 문이 있으며, 내부는 3층 갑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홍수(맙불:מבו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심판하실 때에 사용된 단어로 노아 홍수를 가리키는 고대어입니다. ‘땅에 있는 자’는 모든 생명체를 가리킵니다. 다만 물고기는 죽음의 심판을 벗어났습니다. 추측할 때에 물고기는 죄로 오염된 저주의 땅(3:17; 6:11,12)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게 그 방주로 들어가고

  언약(베리트:ברית)은 당사자 간의 엄숙한 계약의 표시로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갠 후 그 사이를 지나면서 맹세를 하던 고대의 계약 관습을 반영하고 있는 단어입니다(15:10,17). 따라서 계약 당사자는 계약 불이행 시 희생된 짐승처럼 죽음을 담보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 언약’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곧 은혜의 약속입니다.

 

19-21: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 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진노의 심판을 선언하시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구체적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홍수의 심판 목적은 세상의 모든 생명을 멸절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 중심이므로 거룩한 씨와 그에 딸린 생명체의 보존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를 지으며, 모든 짐승들이 먹을 양식을 준비하였습니다.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이후부터 홍수가 땅에 임할 때까지 노아는 120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성실하고도 착실하게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는 노아의 믿음과 순종과 인내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당시대 사람들은 구름 한 점 없는 창창한 날씨 속에서 홍수를 대비하여 거대한 배를 만들고 있는 노아의 모습을 보면서 홍수가 언제 임하느뇨? 하면서 조롱하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매 홍수는 임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과 불신자들에 반드시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의 재림의 때가 언제 있느뇨?” 하면서 멋대로 살아가는 악인에게 불 심판은 홍수의 임함과 같이 창졸간에 임하고야 말 것입니다(마 24:38, 39; 눅 17:27; 벧후 2:5; 3:10).

  하나님의 명령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양식을 좇아 방주를 건조할 것, 둘째 모든 생물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들일 것, 셋째 노아 가족과 생물을 위해 식물을 비축할 것입니다. 다만 방주의 크기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크기이기 때문에 과연 노아와 그 가족들만의 힘으로 건조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방주가 특별한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닌 단순한 구조이며, 건주 기간이 무려 최장 12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며, 또한 고대 인근 원시림에서 풍성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넷째 어쩌면 경제적 능력을 갖춘 족장으로서 노아는 필요한 기술과 노동력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방주의 건조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