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 제4장 강해 - 가인과 아벨

chukang 2011. 3. 11. 20:52

창세기 제4장 강해 - 가인과 아벨

 

  선악과 사건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과 또 다른 자녀들의 모습은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을 통하여 구속사역을 이끌어 가시기로 하셨습니다.

  1-15절은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덴 추방 이후에 첫 세대인 가인과 아벨은 사랑과 화평이 아닌 반목과 질시로 인하여 살인까지 가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불순종의 죄를 저지른 그 순간부터 죄의 씨앗은 무서운 암세포처럼 인간의 심성 깊이 파고들어 인간을 파괴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인이 살해하는 그것은 바로 죄가 밖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동침하다’(야다:ידע)는 ‘알다’라는 뜻이지만, 이 단어는 성경 용례 상 종종 ‘동침하다’는 뜻으로 사용이 됩니다.(17, 25; 삼상 1:19; 왕상 1:4) ‘가인’(קין)은 얻다, 소유하다는 뜻의 ‘카나’(קנה)에서 파생된 말로, 곧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이름은 인류의 첫 열매를 얻은 하와의 기쁨의 고백이자, 그녀의 신앙이 반영된 이름으로, 곧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얻은 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가인을 얻게 된 것이 ‘여호와’로 말미암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구속주’를 뜻하는 것으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소망을 피력했다고 하겠습니다.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아벨’(חבל)은 “허무, 공허‘라는 뜻입니다.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아벨에 태어날 당시에 삶의 괴로움이나 공허함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벨의 죽음을 암시하는 예언적 이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 즉 목축을 하였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 즉 땅을 섬기는 자입니다. 이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땅에 대한 애정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암시합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꽤 많은 시간이 경과된 시점입니다. 이때는 한 해의 농사나 목축을 마무리하는 수확의 때라고 보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어 얻은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아벨은 첫 태생 중 가장 살찌고 기름진 좋은 것을 드렸습니다. 이는 아벨의 정성이 흠뻑 담긴 제물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첫 새끼 중 가장 좋은 것이란 점에서 만물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며(출 13:2), 둘째 화목 제사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장차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목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희생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골 1:20-22). 그러면 3절에서 가인이 드린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그 답은 히브리서 11:4을 보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믿음’이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제물이 농산물이라서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며, 제물이 양이라서 열납하신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정성’이라는 말과도 연관이 됩니다. 즉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하는 정성으로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을 바라는 자세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따라서 가인에게는 겸손과 정성과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믿음이 담기지 않은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주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의 영납 여부를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셨는지는 화실하지 않습니다. 고대에 나타나는 방식을 볼 때에 아마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레위 9:24; 왕상 18:38; 대상 21:26; 대하 7:1).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못하자 가인은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당황하는 것이며 불만과 분노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셨을까에 대한 이유가 무엇인지 찾으려는 자세가 없으며, 반성하지도 않는 모습입니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어찜이며(람마:למה)” 두 번 거듭 반복된 하나님의 질문은 가인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이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배려입니다. 죄인이 망하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없거나 하나님의 긍휼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며, 단지 그 자신의 교만과 강퍅한 고집 때문에 스스로 멸망과 저주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가 있으나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진정 정성이 들어간 믿음의 제사를 드렸다면, 또 네게 허물이 없고 결백하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고개를 떨군다든지 낯을 피하는 모습이 양심의 가책 혹은 죄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낯을 든 모습은 양심상 거리낌이 없는 떳떳하고 결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욥 11:15).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핫타트:הטאת)란 단어가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기본 의미는 궁수가 표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성경적 죄의 개념은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모든 인간의 행동이나 마음 상태에 적용이 됩니다. 죄는 사나은 맹수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벧전 5:8), 곧 인간의 심령 문에 웅크리고 앉아서 호시탐탐 침입의 기회를 노리는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 문에 똬리를 튼 채 숨어서 기습 공격을 노리는 독사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지금 바로 가인의 마음 문 앞에 있는 상황이므로, 가인은 분노를 삭이고 회개하여 강력하고도 악한 죄의 세력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이 아벨에게 무엇을 고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을 아벨에게 기분 나쁘게 전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들로 가자고 말할 수 있지만, 원시상태에서는 거의 모든 곳이 들판이나 아니면 산지이기 때문에 굳이 들을 찾아나가지 않아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둘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은 아벨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는 죽일 의도를 갖고 힘껏 내리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책망과 충고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퍅한 마음으로 기회를 틈타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쳐 죽인 것입니다. 이처럼 죄와 악은 그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도록 만들고 더욱 지배를 받는 노예가 되도록 만들어 악행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죄가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형제를 살해하는 무서운 죄로 급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도 그러하셨든지 가인에게 일단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아벨의 소재를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거짓의 아비(요 8:44) 마귀의 속성을 좇아 가증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짓은 참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장 큰 마귀적 특성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롱하는 패역한 죄입니다.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런 대답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세입니다. 자신의 그 큰 죄를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가인은 이미 죄에 의하여 삼킨바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의 파괴시키고 타인을 파괴시키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원수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살인죄를 범한 가인의 행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즉시 가인을 처벌할 수도 있었지만 가인이 회개하고 고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에 사로잡힌 심령은 가증스러운 마음과 뻔뻔한 변명으로 일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호소하다(차아크:)’는 ‘사람 살려’하고 비명을 지르며 외치는 소이입니다. 억울하게 희생된 아벨의 피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눈물은 악인의 용서를 구한다고 할지라도 그 피는 신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그 핏소리에 귀 기울이사 때가 이르면 반드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사 34:8;51:22;단7:22;계18:20).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살인자 가인의 사악한 범죄는 땅으로 하여금 원치 않는 아벨의 피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부터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듣고 땅을 신원의 집행자로 삼으셨습니다. 땅은 살인자 가인을 토해냈습니다. 이것은 훗날 가나안 땅이 가나안 족속의 가증스러움 때문에 토해 내친 것과 같습니다(레위 18:28). 그 결과 가인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억지로 아벨의 피를 받은 땅이 그 분노로 소산 내 주기를 거절했다는 뜻입니다. 땅을 인간의 고향으로 생각한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특히 농사를 그 업으로 삼고 있는 가인에게 있어 이러한 땅으로부터 처절한 배척과 단절은 아담의 형벌(3:17)보다 훨씬 무서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땅에서 피하며’ 여기에서 피하는 것은 어떤 만족과 행복을 얻어 보려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모습으로 시사합니다. ‘유리하는’ 일정한 안식처를 얻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떠도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가인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땅의 소산물을 얻기 위해 계속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으며, 심적인 측면에서는 땅의 핏소리를 피해 양심의 가책을 안고 불안정한 삶을 영위해야만 했습니다. 일평생 동안 죄책감, 공포, 불안정과 안식이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는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큰 벌을 준 것에 대한 불만과 탄식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흉악한 것인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고통스럽고 부자유스럽게 만든 하나님의 판결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이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손길을 의뢰하지 않으며, 멸망의 길을 갈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에 대한 절규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곳에서 멀리 쫓겨나게 된 것을 체감적으로 깨닫게 된 것에 대한 비명입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보호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신 31:18) 영영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는 영혼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만날 자” 지금까지의 성경에서는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네 명만 등장했는데, 가인이 만날 자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성경은 구속사에서 중요한 사실과 인물들만 기록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3절에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을 근거로 볼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 두 명만을 낳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많은 자녀가 탄생을 했고 이곳 저곳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인과 아벨의 형제와 자매이고, 아벨의 무죄한 피에 대하여 보수(報讎: 갚을 보, 짝 수(갚다, 바로잡다는 뜻)할 권한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것에 대하여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은 죽을까 얼마나 염려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악인은 오직 자기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가인에게 내려진 형벌은 죄를 지으면 얼마나 엄중하고 무서운 벌을 받는가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인의 표에도 불구하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살인죄에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가 첨가되어 가중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칠 배’는 철저하고도 완전한 신적 보응을 말합니다(레위 26:28). ‘표’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인은 이로 인하여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생명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또한 죄의 형벌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자를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26절은 아담의 다른 자녀들과 가인의 후손들은 나름대로 문명을 발달시켜가면서 번성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명은 인간을 위한 세속적 문명일 뿐 결코 여호와를 위한 문명은 아닙니다. 즉 죄의 영향 아래 놓인 교만과 타락과 방종의 문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촛불처럼 미약하기는 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거룩한 씨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게 됩니다.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을 통하여 거룩한 씨를 보존하시며 인간의 구속사를 이끌어 나가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은 점점 더 영적으로 타락하여 여호와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놋(노드:נוד)’은 ‘유리, 방황, 요동’이란 뜻으로 기쁨과 환희의 땅인 에덴동산과 대조되는 도망과 추방의 땅임을 암시합니다. 에덴의 동쪽이라는 외에는 그 위치를 알 길이 없습니다.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가인과 그 아내 사이에 에녹이 태어났습니다. 그 이름은 ‘헌신하다, 가르치다’는 뜻입니다. 학자들은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 가인이 삶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삼고자 애썼던 흔적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이 이름을 통해 하나님 없는 인간 위주의 삶이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 이름은 교만한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독립 선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가인이 쌓은 ‘성’은 천막(tent)과 구별되는 벽으로 둘러쌓은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인이 하나님의 저주 명령에도 불구하고 성을 쌓아 정착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의 교만과 거역의 태도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가인의 도성은 인간 교만과 허영의 상징인 바벨탑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 19: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에녹의 4대 손인 라멕에 대한 내용입니다. 라멕은 ‘강한 자, 힘센 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는 ‘장식한 자’와 ‘딸랑거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통하여 가인의 후손들의 폭력상과 세속적 미와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부일처 제도를 파괴시키고 일부다처제를 만든 장본인이 라멕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문화는 라멕 이후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과 정욕을 좇아 일부다처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야발은 ‘시내, 강, 여행자, 생산자’ 등의 뜻입니다. 이로 볼 때 그의 삶은 물과 목초지를 좇아 끊임없이 여행하는 유목인으로서의 일생이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야발은 양떼를 방목하며 사육하는 기술과 방법을 개발하고 터득하여 후손들에게 전래시킨 목축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수양의 뿔’이라는 뜻의 ‘요벨’과 관련이 깊은 이름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수금은 줄을 튕겨 소리내는 악기(현악기)를 가리키고, ‘퉁소’는 숨을 내쉬거나 바름을 불어줌으로써 소리 내는 악기(관악기)를 가리킵니다. 즉 유발은 인간을 향락과 즐거움의 길로 이끈 사람입니다.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두발가인은 금속으로 각양 날선 연장을 만드는 대장장이의 조상입니다. 금속 기술의 선구자로서, 농기구를 비롯하여 전쟁 도구 등을 발명한 자입니다.

 

23, 24: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이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흔히 ‘검의 노래’라고 하는 라멕의 복수의 노래입니다. 성경의 가장 오래된 노래로서 히브리인들의 특색인 병행과 대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인의 대표적인 후예인 라멕이 두발가인이 만든 칼을 손에 쥐고 오만한 마음으로 부르고 있는 이 노래 속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 심성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살인과 폭력의 악취를 짙게 느낄 수 있습니다. ‘창상(創傷)’ 상처로 인한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내는 자는 가차 없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죄의식의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는 잔학성을 엿보게 됩니다. 라멕은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을까 두려워할 때에 가인을 죽이는 자는 그 벌을 ‘칠 배’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자신이 사람을 죽였지만 그에 대하여 복수를 하는 자는 칠십칠 배나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즉 하나님을 우롱하는 교만과 자만의 극치를 보고 있습니다.

 

25, 26: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인류 최초의 순교자 아벨을 대신하여 태어난 셋과 그 후손의 기록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방종과 타락의 삶을 사는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의 언약을 따라 아벨 대신 셋 계열을 택하고 보존하사 인류 구속을 위한 거룩한 섭리와 역사를 이끌어 나가셨습니다. 셋은 아담이 130세에 낳았으며, 그 뜻은 ‘놓다, 지정하다, 안정되다’는 뜻입니다. 곧 정해진 자, 안정된 자입니다. 셋은 아벨 대신 보상으로 주어진 자라는 뜻이며, 유리하며 피하는 가인과는 달리 안정된 자라는 뜻입니다. ‘에노스’는 ‘사람, 병든 사람, 죽음, 부패로 사라져갈 사람’의 뜻입니다. 이는 인간 지상주의를 표방한 가인 계열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히 허무한 인간의 실존을 간파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에노스는 경건한 공적 예배의 창시자로서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름으로써 그 이름이 경건한 신앙 가문의 조상으로 영영히 소개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더욱이 그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예를 얻기까지 하였습니다(눅 3:38).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공적 예배와 관련하여 종종 사용되는 말입니다(12:8; 13:4; 21:33; 대상 16:8; 시 105:1). 이 말은 셋 시대에 이르러서야 셋의 후손들로 말미암아 비로소 구속주 여호와께 기도와 찬양, 그리고 감사와 간구가 있는 공식적인 예배를 연합으로 드렸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성을 쌓고 악기와 무기를 개발하는 등 세속 문명을 발전시킴으로써 세상 왕국의 기초를 다져가는 동안, 셋의 후예들은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을 연합하여 드림으로써 하나님 왕국의 기틀을 세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