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 제2장 강해 - 에덴동산과 선악과

chukang 2011. 2. 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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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2장 강해 - 에덴동산과 선악과 언약

 

 

  본 장에서는 천지창조의 대략과 인간 창조에 대한 구체적 내용,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곳에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두시고 먹지 못하게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제1장의 총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의 모든 것이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천지 즉 무생물과 만물 즉 모든 생물이 포함 되었습니다. ‘만물(체바암:צבאם)’은 전쟁을 위해 잘 조직된 집단을 가리킵니다. 모든 피조물이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하게 잘 배열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니라’는 말은 단순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뜻대로 온전히 성취되어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성, 충족성, 무결성, 합리성 등 모든 것이 완벽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일곱째 날이 이를 때라고 하였으므로 아직 6일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째 날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안식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와 전혀 상관이 없지만, 창조 사역의 완결이라는 측면에서 그 안식의 날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의 전체 맥락 속에 포함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안식하다’는 말은 피곤함으로 쉬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일을 뜻과 계획대로 다 마친 후 기쁨과 평화 중에 휴식을 취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안식일은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례로 제정이 됩니다(출 20:8-11). 이로써 인간들도 역시 하나님의 안식에 근거하여 엿새 동안 힘써 일한 후 제7일은 안식을 취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 사역은 6일 동안 이루어졌지만 만물에 대한 공식 인준과 성화(聖化)는 일곱째 날에 이루어졌습니다. 일곱째 날의 복을 주신 것과 성화는 안식을 통하여 서로 사랑의 창조 행위를 되새기면서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신 날이며,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는 친교와 기쁨, 경배와 찬송, 그리고 복 받으며 사랑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을 거룩한 목적으로 특별히 성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날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만 참 안식을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יהוה)’는 ‘야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호를 감히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은 언약과 연관되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일컬을 때에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엘로힘:אלהים)’ 능력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으로 인간들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도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대략(톨도트:תולדות)’은 ‘낳다’라는 말에서 나와서, 출생, 탄생, 계보, 가족이란 뜻입니다. 사른 곳에서는 ‘사적’(6:9) ‘후예’(10:1) ‘약전’(37:2) 등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의 실제 기록, 곧 역사(history)란 뜻입니다.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3일 창조에서 풀과 채소와 과목은 이미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초목과 채소는 다른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들과 밭에 해당하는 ‘사데(שׂדה)’는 일정한 장소, 곧 경작하기 알맞은 땅을 가리키며, ‘초목(시아흐:שׂיח)’과 ‘채소(에셉:עשׂב)’ 역시 비를 받고 인간의 손에 의해 경작됨으로 성장하는 식물을 가리킵니다.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땅이 물로부터 분리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 태초의 지고 상태를 생각할 때, 충만한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온 지면을 가득 적시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안개는 넷째 날 창조된 태양의 열로 인한 증발 작용의 결과로 대기에 수증기 상태가 충만해질 때 비가 되어 다시금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순환적 기후변화를 통해 새로 형성된 지표면은 단단하고 건조한 상태로 만들어졌을 것이며, 그 결과 이 땅이 인간 생존에 적절한 상태로 조성되어 간 것입니다.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흙으로 번역된 언어는 “아파르 민 하아다마(אפר מן ־ חאדמה)‘는 직역하면 ’땅으로부터 (취해진) 티끌‘이라는 뜻으로 곧 인간 육신을 구성하는 땅의 원소를 가리킵니다. ’인간(아담:אדם)‘과 ’땅(아다마:אדמה)‘과의 불과분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로, 인간 육신의 근원 및 한계를 시가합니다(3:19; 욥 4:19; 10:9; 시 139:15).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생기(니쉐마트 하이임:נשׁמת חיים)는 은 ’생명의 호흡‘이란 뜻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 창조의 특수성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께로부터 나온 생명의 호흡을 인간의 육신에 불어 넣으셨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인간 호흡(생명)의 그원이며 주관자이십니다(단 5:23; 행 17:25).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호흡을 취하시면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시 104:29). 그러므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시 150:6).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네페쉬 하야:נפשׁ חיה)‘는 살아서 호흡하는 생명체입니다. 사람이 일반 피조물과는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코에 불어 넣는 인격적 상호교감을 통해서 ’생령‘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1:27의 말씀과 부합하며, 이러한 독특한 창조의 원리와 방법을 통해 ’생령‘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 동물들과 구별되는 존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령’이 영혼을 가진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며 일반 생명체 전체를 가리킨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주신 생기가 곧 영혼이라면 결국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혼을 모델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되어 결국 숱한 이방 신화나 철학이 갖고 있는 ‘유출설’의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또 성경 어디에서도 인간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왔다고 말한 곳은 없습니다. 인간이 영혼을 갖게 된 연유와 기원 그리고 그 기본 속성을 가장 강력히 보여주는 곳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1:26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 구조인 영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직접 육체의 모양의 빚으시고 그 안에 영혼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애정 어린 방법으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한 인간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동방’은 10-14절을 고찰할 때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동산은 울타리로 둘렀다는 뜻입니다. 즉 울타리로 둘러싸인 보호 받는 안전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일정한 장소를 택하시고 안전하게 울타리를 치시는 것과 같이 보호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낙원(파라다이스:paradise, 파라데이소스:παραδεισς)’이라고 하는 것은 70인 역으로 이 번역본은 신약시대에 그리스어로 만들어진 구약 성경이며, 많은 오류가 있는 번역본입니다.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보기에 아름답고’ 시각적 측면에서 모양과 빛깔이 아름다웠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아름다우 열매가 맺히는 것은 그만큼 창조의 완벽함 속에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먹기에 좋은 나무’ 이것은 인간의 생존과 건강에 매우 좋은 실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에덴동산은 인간 생존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 에덴동산의 중앙에 위치한 생명나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의미에서 이 생명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만일 인간이 계속적으로 따 먹게 될 때 인간의 육적 생명을 강건케 함으로써 삶을 영존시키는 특별한 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즉각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이유가 그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사실(3:22)에서 뒷받침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신천신지 천국에서는 다시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는 것이 성도들에게 허용된다는 것(계 2:7; 22:2)에서도 근거가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상징적 의미로 이 생명나무 실과는 인간이 이것을 따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는 징표, 곧 성례적인 역할을 하는 나무라고 해석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복과 은혜의 삶으로 작용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죽음과 좌절 및 저주의 삶으로 작용하는 나무라고 해석을 합니다. 따라서 구속사적으로 오늘 이 땅의 우리들에게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생명의 과실(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영생의 복이 주어지지만,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심판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선(善)과 악(惡)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지식의 나무’로 이 나무의 열매를 선악과라고 합니다. 생명나무와 더불어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뜻으로 아담과 하와의 순종을 시험(test)하기 위해 특별히 구별해 놓은 나무로, 하나님의 주권이 담긴 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존재 의의는 자유의지를 지닌 도덕적 인격체로 피조 된 인간이 이 나무의 열매, 곧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도덕적 자유를 주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나무가 없었다면 인간은 아무런 주관적 생각이 없이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만을 받는 애완동물이나 혹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에덴에는 솟는 샘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샘물이 흘러나와서 에덴동산을 비옥하게 만들고, 또 네 곳으로 갈라져 흘러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의 네 강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강의 정확한 위치는 에덴동산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알 수는 없습니다.

 

 

11,12: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비손’은 풍부하게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로 이 지역에서는 금과 은 및 각종 보석류가 많이 생산이 되었습니다. ‘베델리엄’(데돌라흐:בדלח)은 70인역에서는 ‘안드락스’ 즉 석탄(coal)으로 번역했지만, 민수기 11:7에서는 ‘진주(pearl)'로 번역되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를 향기 나는 값비싼 수지(樹脂)로 보고 있습니다. ’호마노(쇼함:שׁחם)‘는 ’창백한, 희미한‘이란 의미로, 희미한 녹색을 띤 ’녹주석(beryl)' 또는 다양한 색채를 띤 ‘줄마노(onyx)'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보석은 후일 대제사장의 흉패 장식용 보석으로 사용되었습니다(출 25:7).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넘침’ 또는 ‘깊이 흐르는’이란 뜻입니다. 바벨론 지역에 있는 ‘샤트엔 닐’ 운하로 추정을 합니다. 기혼 강에 의래 둘려진 구스는 아프리카 지역의 구스(에디오피아)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구스를 가리킵니다.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힛데겔은 ‘티그리스(Tigris)강’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의 고대 명칭(단 10:4)입니다. ‘화살처럼 빨리 흐르는’ 뜻입니다. 다리오 왕의 비문에는 ‘티그라(Tigra)'라는 명칭으로 나타납니다. ’앗수르 동편‘으로 흐른다고 했는데, ’동편‘이라는 말은 동쪽(east)란 뜻 외에 ’앞쪽(forward)'이라는 의미도 강합니다. 따라서 앗수르 전면으로 흐르는 강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유브라데’ 서아시아 최대의 강으로, 티그리스 강과 더불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큰 영향을 끼친 대운하입니다. 잘 흘러간다는 뜻과 좋은 비옥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비문에는 ‘우프라타(Ufrata)라고 나타납니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흙과 생기로 생령이 되게 하신(7) 바로 ‘그 사람(האדם)’으로, 곧 인류의 시조 아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곳에 이르도록 잘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거하면서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1:28에서 주어진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으로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을 청지기로 부르시고 모든 만물을 관할토록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는 천지창조 시 삼위 하나님의 신성한 노동에 그 근거를 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낙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한 한 그루의 열매를 제외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에게 단 한 가지의 금령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명령을 어기고 먹을 경우에는 정녕 죽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해석을 하면 이것을 먹지 않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용어로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 죽음과 영생이 결정되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선악과 그 자체에 죽음과 영생의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혹은 불순종하는 인간 내면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같은 행위언약을 만드셨을까요? 그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그 자유의지를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활용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지를 결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스스로 전인격적인 독립체가 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대상으로 하여 매은 행위 언약의 목적은 결코 인간을 속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이 그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법을 깨달아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만 홀로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것은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좋았더라’는 최종평가를 내리기 전의 상황입니다. 인간의 자연 발생적인 고독과 완전한 만족의 결핍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아직 창조사역을 완성하기 전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적 갈망을 만족시킬 ‘돕는 배필’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돕는 배필’은 ‘적합한 반려자’ ‘응답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품과 신분에 있어 남자와 같고 언제나 그 곁에 살면서 상호 위로와 기쁨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짝(companion)이란 뜻입니다. 동시에 이 말은 남편과 책임을 나눠지며, 이해와 사랑으로써 남편의 본성에 대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섬기는 데 남편과 혼연일체가 되어 협조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란 의미입니다. 더불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역할을 암시하는 말로 아내의 일반적 기능이 ‘조력(助力)’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 1장의 창조 기사에서는 ‘말씀으로’ 지으셨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본 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모든 생물의 근본은 흙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움직이는 생명체를 아담의 앞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은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는 모든 생명체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아담이 부르는 이름은 그 생명체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이롤 볼 때에 창조 당시의 아담의 지혜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알 수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체에게 각기 특성과 모양에 알맞은 이름을 주저 없이 지어준 것입니다. 또한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그 생명체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지으시기 전에 이처럼 각종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도록 한 이유는 아담에게 배필을 주시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기도 한 것입니다.

 

 

21,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잠이 들게 하셨습니다. 갈빗대는 ‘첼라(צלע)’라는 단어로 구부러진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한쪽 편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필 많은 부분 중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남자의 옆구리 부분에서 취하여 만든 것은 남자와 여자가 인격적으로 상호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고전 11:11,12).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다리뼈로 여자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머리뼈로 만들지 않으신 것입니다. 둘째, 남녀는 상호불가분의 존재로 특히 여자는 남자에게서 소중히 여김을 받을 위치에 있음을 보여줍니다(엡 5:25-33). 하나님께서는 보호를 받도록 팔 밑에서 취했으며, 사랑을 받도록 가슴 근처에서 갈빗대를 취하사 여자를 만드셨던 것입니다(벧전 3:7). 이로 인하여 여자는 남자를 의지해야 하는 필연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남자를 떠나서는 결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의존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남자도 역시 잃어버린 갈빗대인 여자를 떠나서는 완전치 못한 존재입니다. 두 독립체는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여 마침내 창조의 기쁨과 영광이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장차 둘째 아담으로 오신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 하와는 그의 신부인 교회를 예표합니다(엡 5:32).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로부터 흘러내린 십자가의 물과 피로 말미암아 신부인 교회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취하게 하사 그의 옆구리로부터 흘러내린 대속의 물과 피로(요 19:34) 그의 배필 되는 신부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엡 5:26).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잠에서 깨어난 아담이 하나님께 인도되어 오는 여자를 보고 즉각 그 여자가 자신의 뼈와 살로 지음을 받은 존재임을 깨닫고, 기뻐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노래입니다. 아담은 이름을 ‘여자’라고 지었습니다. 여자는 ‘이솨(אשׁה)’인데, ‘남자’의 ‘이쉬(אישׁ)’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어원적으로도 여자는 남자의 뼈와 살로 지음을 받은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남자와 여자는 상호 결합되어 있는 불가분의 존재로서, 본질상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단지 질서와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는 구별이 됩니다.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결혼 제도의 창시자요 최초 결혼 예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주례사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결혼의 3대 원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육체적, 인격적으로 책임 있는 존재로서 이제 상호 부모로부터 홀로 서는 ‘독립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혈연의 단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사랑과 성숙과 편의와 경제와 거주의 관점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유기적 두 인격체가 상호 협력함으로 같은 뜻을 이루는 연합성으로 상호 이해와 신뢰와 인정과 인내와 헌신을 바탕으로 할 때에 가능합니다. 셋째 구별 된 두 존재가 성숙한 사랑과 이해로 영육 간에 하나가 되는 일체성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만큼의 강한 결집력을 암시합니다(마 19:6). 안식일과 더불어 인류 타락 전에 주어진 현재 상태대로 결혼 제도는 장차 신약 시대에 신랑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보혈로 형성된 신부 교회간의 연합과 일체를 예표하고 있는 사랑과 생명의 제도이며 계시적인 비밀이라고 하겠습니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태초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서로 나신(裸身)이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무죄 상태의 특징입니다. 타락 정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형상으로서 온전히 창조된 아담과 하와의 순결한 영육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부끄러움, 곧 수치심은 타락과 더불어 곧 느끼게 되었는데(3:7, 10). 이는 하나님의 명령(16,17)을 어기고 육체적 충동과 감각적 소욕을 좇아 금지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순결한 인간의 영육 상태가 오염되고 파괴된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은 인간 타락의 결과로 원초적 성결(聖潔)의 상실감에서 오는 부자연스럽고 불안정한 정신 상태의 한 양상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