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5장 강해 - 아담에서 노아까지
본 장은 역사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서부터 대홍수 이후 새 역사의 시조가 되는 노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족보 형식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족보는 특별한 원칙이 없이 주요 인물 중심으로 시간의 경과에 따른 전개를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신약 교회의 구약적 예표인 이스라엘 지파의 기원, 곧 야곱의 12아들의 출생에 이르기까지 대략 7부분의 중요한 족보가 나오고 있습니다. 족보는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에 초점을 맞추어 일관성 있게 그 범위가 좁혀져가는 특징을 보입니다. 아담, 셋,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택한 자들을 중심으로 그 태한 자의 혈통의 범위가 좁혀져 가는 것입니다. 이 족보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즉 족보는 구속사를 중심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신약 교회’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에덴동산에서부터 약속된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속사가 줄기차게 진행되어 우리 성도들에게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계보는 보통 한 인물이나 가문 혹은 족속이나 민족의 간추린 역사를 가리킵니다. 성경에 나타난 계보의 특징은 어느 한 시기의 구속사적 흐름을 제시하기 위한 것인데, 첫째 아담의 후손과 둘재 아담(그리스도)의 조상들에 관한 이름과 나이와 죽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여기에서 형상은 1:26에서 ‘모양’으로 번역된 단어로 구체적인 ‘유사성(resemblance)' 또는 ’닮음(likeness)'를 가리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신체는 영이신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가장 적절하고도 아름답게 피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고전 3:16, 17).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사람의 성을 구별하여 ‘남성(male)과 여성(female)'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곧 살이 있는 생명체로서 ’생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계심이요, 또한 주권(主權)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3: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거룩하고 고상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1:26,27). 하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형상과 모양이 훼손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자신처럼 훼손된 형상의 아들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 죄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으로서, 결국에는 죽어야할 운명(3:19)을 지닌 존재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명은 둘째 아담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극복될 때까지(고전 15:47-49) 첫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것입니다(롬 5:12). 하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죽을 운명을 지닌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뜻일 뿐, ‘영혼 유전설’을 뜻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인간 개개인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께서 창조하십니다.
4: 아담이 셋을 낳은 후에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초기 인류가 이처럼 건강하며 장수할 수 있었던 견해들에게는 ❶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오래 살았다는 견해 ❷ 초기 인류의 탁월한 능력과 경건성으로 인하여 오래 살았다는 견해 ❸ 비록 죄의 오염으로 훼손되기는 했지만 영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 시 받은 영원불멸의 복으로 인해 오래 살았다는 견해 ❹ 초기 인류가 생존할 당시의 이상적 자연 환경과 탁월한 음식물 및 식사 습성과 그들의 육체가 지닌 원래적인 건강으로 인해 오래 살았다는 견해 ❺ 비록 범죄했지만 인류를 향해 변함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오래 살았다는 견해 등이 있습니다. 4,5번의 가장 가까운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5: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아담을 비롯하여 매 인물의 생애 끝에 이 말이 반복 사용되는 것은 인간 타락 이후 죽음이 불변의 법칙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혈통 상 아담에 속하는 모든 인류는 인간 타락 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는 하나님의 형벌 선언대로 죽었고 또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죄의 무서운 결과 및 인간의 연약함과 그리고 말씀의 엄정함을 새삼 깨달아 오직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6-20: 에노스를 낳은 후~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낳았고’ ‘죽었더라.’ 이 두 단어를 통하여 비록 초기의 족장들이 장수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인간의 죽음은 피하지 못할 무섭고도 비참한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낳았고’라는 단어를 통해 선명하게 시사하듯 생명의 계승으로 극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죽었더라.’란 말이 8번만 언급된 반면, ‘낳았고’는 20번이나 언급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죽음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직 은혜로서 그 생명을 붙들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죽음의 부활로 승화시키고자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21-24: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계속해서 생과 사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이 되다가 갑자기 한 인물 즉 에녹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드렸고,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지극한 복을 누렸습니다. 특히 그는 점차 타락해 가기만 하던 시대 속에서도 역류하는 용기와 지고한 신앙 및 경건을 지녔습니다. 그의 언행은 한결같이 여호와의 뜻에 합한 것이었으며, 그를 만드신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것이었습니다. ‘동행하다’는 말은 ‘걷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종종 뜻을 좇다, 삶을 살다는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즉 에녹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올바른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당 시대의 부패상과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결의 삶을 산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후일 에녹의 증손인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한 자’(6:9)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데려가시므로’ 이 말은 선지가 엘리야의 승천 기사에도 나타납니다.(왕하 2:3, 5, 9, 10)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은 그의 존재 자체가 멸종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생존의 터전인 지구상에 더 이상 남겨지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에녹을 이 지상에서의 생존 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늘로 들어 올리셨다는 의미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그의 나이 36세 때에 승천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5,6에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경건한 삶으로 주위의 불경건함을 책망한 자라고 유다서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유 1:14,15). 에녹 승천 당시 수명이 다해 죽은 자는 아담뿐이었습니다(즉 시기상 에녹 승천은 아담 사후 57년에, 노아 탄생 69년 전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분명히 아담의 후손들에게 보이신 후, 에녹처럼 믿음과 경건의 삶을 사는 자는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소망을 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의 승천은 모든 성도들에게 오직 믿음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하게 보여준 예표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27: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그는 구백 육십 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대 확장, 창을 던지는 사람)는 969세를 향수함으로 세상 모든 인간 중 최고의 수명을 누린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 후손들의 평균 수명은 승천한 에녹을 제외하고 912세입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명입니다. 장수의 원인은 자연적인 원인으로서 대홍수 전 창조 직후의 지구 상태(대기, 밀도, 기후, 음식, 토양 등)가 인간 생존에 매우 적절했기 때문일 수 있으며, 종족 번식과 전승에 의한 말씀 계승이라는 섭리의 목적상, 하나님께서 죄로 인한 형벌 집행을 어느 정도 유예하셨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여하튼 근 천년에 이르는 초기 족장들의 장수의 삶은 본래 불사(不死)의 존재로 창조된 인간의 원형을 회고하게 하고 장차 신천신지에서는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게 될 소망을 갖게 합니다.(요일 2:25; 계 22:5)
28-31: 라멕은 일백 팔십 이 세에 아들을 낳고~ 그는 칠백 칠십 칠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녹의 손자요 므두셀라의 아들인 라멕은 가인의 후예인 난폭자 라멕(4:18-24)과는 동명이인으로 셋 계열의 경건한 인물입니다. 그의 아들 ‘노아’란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라멕은 하나님의 도움과 위로를 바란 신앙인이었습니다. 노아는 ‘한숨 돌리다, 휴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곧 뒤에 나오는 ’안위하리라‘는 말과 그 의미를 같이 합니다. 당시 라멕이 아들에게 이러한 이름을 지어 준 이유는 아마도 삶의 고달픔과 인간의 유약함을 절실하게 깨닫고 아들의 탄생을 계기로 하나님의 신령한 위안을 간절히 소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 이 말을 통하여 타락 이후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벌 선언대로 의식주 해결을 위해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범죄한 인류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죄의 쓰라린 맛을 절실히 체험해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노아란 이름이 갖는 의미는 지대합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시 현실의 거센 세파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아’란 이름은 하늘의 위로와 안식을 소망하게 해 주는 신앙 고백적인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32: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노아가의 여생과 향수한 나이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음으로써 족보는 여기서 일단락이 됩니다. 셋을 시조로 하는 족보가 마감되고(6-31), 이후 역사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시조로 새롭게 전개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필두로 향후의 구속사를 새롭게 펼쳐 나가신다는 거룩한 뜻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셈’(이름, 명성, 유명한의 뜻)은 노아가 500세에 낳았습니다. 그 아비 노아의 수치를 가림으로써 다른 형제들에 비해 탁월한 축복을 받았습니다(9:23-36).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 대열에 기재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습니다. ‘함(검은, 뜨거운의 뜻)’은 그 아비 노아의 실소를 조롱함으로써 저주를 받게 되었고(9:20-27), 그로 인해 그 후손의 비극적 현실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야벳(하나님의 넓히심, 아름다움의 뜻)’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했을 때 셈과 같이 조심스런 수습으로 인해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벳은 광활한 영토를 얻어 자유를 누리되 셈의 장막에 거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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