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세기 13:14-18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잘 된 선택을 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 선택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돌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평소 생각이나 인생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평상시에 신앙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택을 하게 되며 투쟁적인 사람은 분쟁을 일으킬 결정을 하기 쉬운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도 성공과 실패로 이끄는 두 가지 유형의 선택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다툼은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에게 재산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 재산은 대부분이 가축입니다. 따라서 다툼의 원인은 좋은 목초지와 물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목초지는 재산을 보존, 증식시키는 결정적인 근거이기 때문에 이 목초지 확보를 위해 목자들 간에 치열한 쟁투가 가끔 발생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 가나안, 그리고 가나안에서 애굽으로의 이주와 출애굽 후 다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험난한 과정과 유랑 속에서도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는 아무런 다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가나안에서 부유함을 영위할 이 시점에서 오히려 이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즉 가난과 고생보다는 오히려 부요와 평안함이 이들 둘 사이를 갈라놓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부유해지려는 지가 빠지기 쉬운 물질의 유혹이 얼마나 위험하며, 하나님 또는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등의 사악한 잘못을 유발시키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물질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물질은 분쟁을 야기 시켜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헤어지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게 됩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선택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타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쟁을 없애기 위해 확보할 수 있는 이익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조카 롯에게 ‘골육’임을 강조했는데 이를 직역하면 ‘형제 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손아랫사람 롯을 자기와 동일한 위상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친밀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친삼촌입니다. 그러나 일찍 부친을 여윈 조카 롯을 데리고 머나먼 객지에서 동고동락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롯은 한 골육이며 형제간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또한 롯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이들 간에 다툼은 이방 족속들에게 수치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방지할 목적으로 그들의 목장들에게 서로 다툼을 멈추게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도 때로는 불화의 분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감정이 격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태방의 잘못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요구되는 것은 솔선해서 다툼의 원인을 제거할 줄 아는 지혜와 분쟁을 조절할 줄 아는 겸양과 양보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투지 말자’란 말 앞에도 원문에는 ‘제발’, ‘청컨대’에 해당하는 단어가 붙어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지극한 겸손을 보여줍니다. 이런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롯에게 제안을 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원칙대로 하면 가나안을 유업으로 받은 자는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먼저 거처를 결정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조카 롯에게 거처의 우선 결정권을 양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화평을 위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양보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현세 뿐 아니라 내세에게까지도 영원한 상급으로 채워준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자기를 낮추었을 뿐 아니라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줌으로써 역사에 남을 이타적 삶의 모본을 보인 것입니다.
롯은 이기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롯은 땅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조금의 양보심도 없었습니다. 삼촌을 따라 나그네로 왔다가 자기의 소유가 많아지자 헤어져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땅을 눈앞에 두고 선택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삼촌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적인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롯에게 있어서 선택의 중요한 요소는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제안대로 롯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냥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탐심의 눈으로 모든 형편들을 조목조목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갈 바도 알지 못한 채 가나안을 향해 믿음의 행보를 옮긴(히 11:8) 숙부 아브라함의 생활 방식과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그 소망을 단지 이 세상에만 두고 살아가는 유한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앙하는 영혼은 보이는 것으로 자기 판단의 준거로 삼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오히려 대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요? 중요한 문제를 선택해야 할 때에 우리 마음에서 솟구치는 욕심은 무엇입니까? 사실 선택의 문제에 직면할 때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이기심입니다.
롯의 선택은 안목의 정욕이었습니다.
롯이 요단들을 보라보았습니다. 물이 넉넉했습니다. 따라서 초목도 울창했습니다. 너무나 좋은 땅이었습니다. 마치 애굽 땅과 같아 보였습니다. 애굽은 연례적으로 발생하는 나일강 범람으로 홍수 후 많은 자양분을 지닌 층적토가 강 주변에 쌓이게 됩니다. 이것은 농사가 잘 되는 역할을 합니다. 또 다시 바라보니 애굽 땅에 비할 정도가 아니라 마치 에덴동산과도 같이 보였습니다.
롯은 숙부요 보호자인 아브라함의 거처 우선 결정권 양보에 한 마디의 대꾸나 감사의 인사도 없이 요단 들을 택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최소한의 인간적 신의마저도 저버린 롯에게 어떤 선한 일이 따를 수 있을까요?
그의 생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자신의 눈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소하게 생각될지는 몰라도 우리의 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나중에 롯의 결과를 보면 낯모르는 침략자들에게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자신과 가족도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14:12). 물질이 풍성한 오늘날에 우리의 눈을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는 마침내 소돔 성으로 이사를 하였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소돔 성이 불과 유황불로 멸망을 당할 때에 모든 재산을 잃고 몸만 간신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좋은 목초지를 양보한 후 이제 척박한 땅으로 나아갈 상활에 처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거대한 비전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조카와 헤어진 후 마음이 허전하고 허무하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은 다시 새 힘을 얻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소망과 확신을 주시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비록 세상의 것은 롯에게 넘겨주었지만, 그는 하늘 기업을 물려받을 하나님의 후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너무 지나치게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해 타산적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및 친척과의 화평을 위해 아브라함처럼 희생과 양보의 삶을 살 때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 기쁨과 약속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만물의 주인이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자는 거대한 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비전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비전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라’는 분명한 말씀에 근거해서 비전이 주어졌습니다. 롯은 탐욕의 눈으로 멸망의 도시를 소유하였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의 눈으로 보이는 땅, 곧 약속의 땅 가나안을 영원히 차지할 수 있는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롯은 눈으로 보면서도 잠시 후 멸망하게 될 도시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채 요단 들을 택했짐KS,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후손들이 차지하게 될 땅과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주의 나라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결국 그 나라를 차지하는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야망과는 달리 비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비전을 심으시고 그 비전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품고 있습니까?
2. 하나님께서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식언치 않으시며 그 약속하신 바는 영구불변합니다.(민 23:19). 이처럼 신실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당신 앞에 영원히 존재하게 하실 것이며, 또 가나안도 영원한 그들의 소유가 되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비전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이 16, 17절에 명백히 보여 집니다. 먼저 후손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녀를 생산치 못하는 아내 사래를 통해 그의 후손들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아지게 된다는 주님의 언약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아브라함에게는 어쩌면 터무니없는 약속으로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약은 거듭 확인되었으며, 마침내 이삭이 태어나고, 그 후손이 점차 번성하고 마침내 솔로몬 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의 모레와 같이 많아짐으로서 성취되었습니다(왕상 4:20). 뿐만 아니라 이 언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는 엄청난 영적 후손들이 지금도 증가하고 있음으로써 여전히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도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는 하나님의 약속조차도 하나님은 당신이 한번 하신 약속을 변개치 않으시고 끝내 성취하고야 마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 신실한 은혜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은 약속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종과 횡으로 행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얻게 될 약속의 땅의 범위를 실제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에게 주어졌지만, 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믿음의 후손들에게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가나안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상급으로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이 육적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인 모든 성도의 조상이 되는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약속은 모세에게서 정치적으로 성취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비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비전은 무엇입니까? 온 세상이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세상을 향해 우리의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이 비전을 품고 있는 사람일까요? 우리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이 비전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거대한 비전을 품고 일할 때 하나님께서 이 비전 또한 성취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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