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봇과 아합 열왕기 상 21:1-10
아합 왕은 그의 궁전 가까이에 있는 포도원을 그 주인 나봇으로부터 사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이세벨이 악한 꾀를 내어 나봇을 죽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봇은 불의에 굽히지 않는 삶을 살다가 악한 권력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도 신앙생활을 거룩히 하려할 때,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반대 세력이 있습니다. 그 세력이 우리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봇처럼 그런 방해들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나봇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아합 왕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런 거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봇은 왜 거절을 했을까요?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이방 백성들처럼 토지를 자기 마음대로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레 25:23-28; 민 36:7). 그러나 이런 원칙은 왕정 시대로 접어든 이후 이웃 이방 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흡수하면서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특히 아합은 우상 문화에 깊이 젖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의 조항이 어떠한 것이든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그의 땅과 궁궐을 넓혀가는 것만이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이용하여 나봇에게 토지를 달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그 땅을 ‘나물 밭’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물 밭은 채소를 기르는 밭이라기보다는 ‘정원’ ‘뜰’을 의미합니다. 즉 그의 별궁의 정원을 확장하여 자신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땅을 팔 것에 대하여 ‘합의’하라고 말합니다. 나봇의 의사를 매우 존중하는 듯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북이스라엘이 비록 타락하기는 했으나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왕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토지를 합부로 빼앗거나 또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토지는 영원히 매매될 수 없으며, 혹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매매되더라도 희년에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토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요, 자손 대대로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유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토지법을 들어 거절한 것을 볼 때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신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근심하는 왕을 보고 왕비 이세벨은 꾀를 내었습니다. 매우 기분이 나빴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사람이 아니라 시돈이라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서 시집을 왔기 때문에 율법에 대하여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만 일개 백성이 왕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에 대하여 불쾌하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한 꾀를 내었는데, 그것은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누명을 씌우는 것입니다. 왕과 이세벨의 권력에 아첨하는 성의 장로와 귀인들이 이에 동조하였고, 결국 나봇은 끌려가 돌에 맞아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알게 된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경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죄악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물론 인간이 인간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은밀한 곳이라도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아마도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가면서 아무도 자기의 죄악을 알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짐짓 기뻐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쁨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엘리야에 의해 그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심판의 선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결코 죄를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의인의 억울함을 신원하사 갚아주시며, 악을 행하는 자를 노와 분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소망이 있으며, 인내로써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에 대하여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질책을 받아들이며 회개하였을 때 당대에 내리려고 예비 된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써 죄를 심판하시되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바른 길을 모색하는 사람에게는 또 한 번의 사랑으로 또 한 번의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을 수 있는 자만이 구원의 대열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반면 아합과 같이 이러한 회개가 지속적인 행위로 결실 맺지 못할 때에는 결국 그 인생은 실패하며 역사에 악명을 남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경험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아합에게 어떤 경고를 하였을까요? 19절 하반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왕상 22:38의 기록에 의하면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은 곳은 ‘사마리아 못’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들에서 떠돌아다니는 개들에게 자신의 피를 핥게 한다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더욱이 왕은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왕의 묘실에서 장사되어야 할 하나님의 대리자였습니다. 그런데 왕의 최후가 개의 밥이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비극일 것입니다.
왕상 22장을 보면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와 화평조약을 맺었고, 여호사밧 유다 왕이 이스라엘을 도우려 참전하였습니다. 유다 왕은 왕복을 입고 전쟁에 임하였고, 아합은 병사로 변장을 하고 전쟁에 임했습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 아합만 잡으면 전쟁은 끝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을 좇았는데, 여호사밧이 생명의 위험을 느끼자 자신은 이스라엘 왕이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스라엘 아합 왕이 아닌 것을 보고, 좇기를 그쳤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아람 군사 한 병이 활을 들어서 이스라엘 병사를 쏘았는데, 그 화살이 아합의 갑옷 솔기에 꽂혔습니다. 전쟁은 계속되고 아합 왕은 병거를 의지하여 아람 병사들과 싸우다가 저녁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합의 시체를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하고,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므로,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 못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활약하던 선지자 ‘미가야’가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아합 왕과 여호사밧 왕은 선지자들을 불러서 전쟁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으나, 다만 미가야만이 패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평소에 자신에게 바른 말을 하고 충고하는 미가야가 미웠던 아합은, 여호사밧 왕에게도 미가야는 흉한 소식을 줄 것이라고 미리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미가야가 와서 예언을 할 때에 아합 왕이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에서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아합을 누가 죽게 할 것이냐는 하나님의 말씀에, 한 영 즉 거짓을 말하는 영이 나서서 모든 선지자들 꾀이겠다고 하였고,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거짓말하는 영은 곧 사단입니다. 사단은 선지자들에게 거짓 예언의 증언을 하게 하였고, 우상숭배에 물들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아합은 그대로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미가야의 예언은 불길하므로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참 선지자였습니다. 아합에 고용된 400명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며 왕이 듣기 좋은 예언을 하였지만, 이들의 낙관적인 예언에 의심을 품은 여호사밧 왕은 그들 외에 다른 선지자를 불러오게 하였는데, 미가야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이 전쟁에서는 소망이 없고 아합 왕까지 죽는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아합은 전쟁에서 자신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미가야를 골방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고 명하였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만 주라는 뜻입니다. 즉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국가의 질서를 문란케 한 반국가적 사범으로 몰아 옥에 가두게 함은 물론, 거기에 신체적 고통을 가하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는 참 선지자의 모습과 거짓 선지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있고, 광명의 천사로,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여 성도들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참 선지자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고 미가야를 데리러 간 사자가 미가야에게 말하기를 ‘다른 선지자들과 같이 길한 말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관원도 아합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하나님의 지시하신 말씀밖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권력과 이권, 그리고 그 어떤 위협 앞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십계명에서도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손해나 고통이 온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직분에 충실했습니다. 미가야는 선지자라는 직분에 충실했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아합 왕이 불러 모든 400명의 선지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즉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을 하는데 비하여 참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예언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직분은 주의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전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나봇은 일종의 선지자의 역할까지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하고 조심하며 멀리해야 하는 거들 중의 하나가,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모든 불의에서 떠나 거룩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악을 도모하고 합당하지 못한 것들을 행하는 악한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거나 모방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말하기를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아합은 왜 스스로 팔려 여호와께 범죄하였을까요? 재물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무수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이 얼마나 불의한 마음입니까? 자신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을 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그가 탐한 포도원은 이스라엘 사람 나봇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으로서 나봇에게는 아주 소중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아합은 이렇게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고작 자신의 나물 밭을 하려고 나봇이 조상의 유업으로 소중히 여기는 포도원을 탐내는 불의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다른 사람의 재물을 가리지 않고 탐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탐하는 마음 자체가 불의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보다는 재물이나 지위 등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저울질해 보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재물을 다스리고 그 재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되는데 도리어 재물의 지배를 받는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을 탐하는 마음을 근절시켜 탐욕으로 인한 범죄를 막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합은 이렇듯 자신의 재물 욕에 팔려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아합은 이세벨의 흉계와 타협했기 때문에 죄를 범했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자 하였으나 처음부터 빼앗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합 자신도 나봇이 조상으로부터 받은 유업은 지켜야 된다는 신앙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저 혼자서만 근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의 근심을 눈치 챈 이세벨이 흉계를 꾸몄습니다. 모략을 세워 나봇을 돌에 맞아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이 모든 악한 일과 행동들을 문제 삼지 않고 오직 포도원을 빼앗을 수 있었다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의한 행동입니까? 아합은 이세벨의 불의에 대해 질책하기는 커녕, 그 불의에 타협하여 포도원을 취하는데 급급하였으니 이 어찌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판자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주위에서 악한 계략을 행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혹시 이러한 계략에 참여하여 무엇인가를 얻은 적이 있다면 그것은 불의와 타협하는 죄악입니다. 우리는 불의와 타협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물론 모든 불의를 계획하는 자들을 질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합처럼 스스로에게 팔려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타락의 길로 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아합은 재물에 눈이 멀어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으며, 포도원을 취하려는 이세벨의 모략에 타협함으로 나봇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이는 죄악에 스스로 팔린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재물을 탐하거나 불의와 타협하는 모습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도우시는 힘으로 더욱 거룩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에게는 타락의 길이 아닌 영광의 길이 펼쳐질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