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지 않으면! 마가복음 13:32-37
한창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어른들은 “이제 그만 놀고 잠을 자거라”하고 말합니다. 정말 듣기 싫은 말입니다. 반대로 지난밤에 열심히 공부하느라고 너무 힘이 들어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막 흔들어 깨웁니다. 얼마나 싫은지 모릅니다.
잠은 잘 시간에 자야하고 일어날 시간이 되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규칙적인 생활입니다. 이 규칙적인 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정된 상태이면 잠을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일정하지만, 불안정한 상태 즉 몸이 아프다든지, 아니면 밤을 새워서 해야 할 중대한 일이 있다든지 하면 규칙적인 생활은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칙적인 생활은 행복하고 평안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깨어 있다”는 말에는 3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육체가 잠을 자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 일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셋째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잠을 자서 피로를 풀어야 하는데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제가 어릴 때에는 다음 날 소풍을 가게 되면 잠이 잘 안 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좋은 일에 대한 설레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몸이 몹시 아파서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비염이 아주 심해서 잠을 자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코가 막히니까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입으로 쉬어서 목도 아프지만, 비염이 심하면 코 속이 얼마나 따가운지 어떤 때에는 코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날 정도로 정말 괴롭습니다. 밤이 괴로우니까 빨리 아침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비염 때문에 기도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늘 괴로움을 주던 비염이 많이 나아서 가을의 문턱에만 발생을 하였었습니다. 우연히 한약방하는 집사님을 통하여 무료로 비염약을 2년 정도를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거의 막혀있던 코의 구멍이 거의 완전할 정도로 다시 넓혀졌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 약 한통에 15만원을 하는데, 길게 먹으면 2달입니다. 두 달에 한 통씩 2년이라고 계산을 해도 12통이 되는데, 금액으로 환산을 하면 180만원어치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좋은 집사님을 만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의 깨달음을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너무 약을 의지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코를 주장하시어서 고통 받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지독한 페인트 냄새, 신나 냄새, 먼지 등 속에서도 비염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반대로 잠을 자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잠을 자는 것은 괴로움을 지나 큰 고통이나 고난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군대는 전투를 잘 해야 하기도 하지만, 보초를 잘 세워야 합니다. 이 보초가 잠을 자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혹시나 적군이 침투하지 않을까 경계를 잘 해야 합니다. 낮에 피곤한 일을 한 이유로 꼬박 꼬박 졸고 있는 사이에 적군이 침투하게 되면 그 한 사람만 해를 당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부대 전체가 파괴되고 몰살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의 경우에 해당이 됩니다. 즉 보초라는 일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하는 큰 재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축구 경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축구에서나 어느 경기에서든지 아무리 공격수가 잘해도 수비를 잘해야 하고,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경기에 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놀고 있다면 예상치 못했던 어려운 일들을 생겨나게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면 다음에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왜 또 되풀이될까요? 문제가 터지면 그때만 대책을 세운다고 말로만 동분서주하다가 실제 행동으로까지는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동일한 인재가 또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고가 나면 책임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 서로 빠져나가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만 그런가! 재수가 없으니까 터진 거지” 이러한 직업의식으로는 절대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육신과 영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영혼이 피곤하게 되면 육체도 따라서 피곤해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육신이 피곤하고 지치게 되면 영혼도 함께 피곤하고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과 육이 함께 강건해져야합니다. 영육간에 강건한 것은 성도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영혼은 깊은 잠이 든 상태입니다. 육신적인 일에는 깨어서 잠도 안 자고 세상일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 반대로 영혼만 깨어 있고 육체적으로는 죽어있는 것과 같이 되는 경우도 없습니다.
간혹 성도들 중에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도하지 않고, 말씀도 보지 않고, 예배도 빠지고 그래서 영혼이 병이 들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육신적으로는 아무리 깨어 있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 경우가 되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둑이 뚫고 들어 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시편 127:1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재물과 관련시켜 해석을 하면, 사람이 제 아무리 뛰어난 재주와 수완을 가지고 있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치더라도, 그 돈을 지키지는 못하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도 결심을 아무리 단단히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변할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잠언서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웠어도 한 순간 마음이 변하면 잘 진행이 되던 일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99%를 잘 해 왔는데, 마지막 1%를 남겨 놓고 마음이 틀어지게 되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도 생각까지도 지켜주시는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영적인 각성”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주인이 하인들에게 권한을 위임한 후에 타국으로 간 후에,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하인들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비유로 교훈하셨습니다.
주인이 저물 때에 올지, 밤중에 올지, 닭 울 때에 올지, 새벽에 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로 하인들이 잠도 자지 않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자는 것을 책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깨어 있으므로 여호와를 간절히 바라는 경우에는 세상적인 일들도 잘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생명과 관련된 사례가 있습니다. 지난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 한명이 그 열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이는 열차에 불이 나고 연기로 가득 차자,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기도하고 난 뒤에 머리에 이런 생각이 번쩍 들더라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어른 허리띠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에 가는 몸을 낮추면서 어떤 사람의 허리띠를 잡고 따라 나와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불이 났을 때에 허리를 낮추는 것을 학교에서 배웠는데 그 것까지 생각이 나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하는 기도까지도 들어주셨습니다. 그 어린이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무엇보다도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불을 지른 사람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그로 인해 2개 편성 12량(6량×2편성)의 전동차가 모두 불탔으며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했습니다. 사고 뒤 열차는 불에 타 뼈대만 남았고, 중앙로역도 불에 탔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안전 불감증이 여전히 심각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범인인 김대한(당시 56세)의 방화사유는 지적장애로 생긴 판단력 상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판단조차 못할 정도로 그의 머리는 망가져 있었습니다. 그 자신의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전혀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학적 용어로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잘못된 사람이 아닐까요? 그와 비슷하게 양심이 실종된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의 정신력, 그의 마음, 그의 영혼은 악한 것이 틈타려고 해도 방어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우리의 마음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의 비유는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죽는 날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깨어있어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죽은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천국으로 가는 의의 판결을 받지만, 영혼이 죽어있어서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은 지옥의 영벌의 판결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를 내 줍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숙제를 잘 해간 학생은 숙제 검사시간이 기다려집니다. 반대로 하지 않은 학생은 선생님이 숙제 내 준 것을 잊어버리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면 언제 하나님께 불림을 받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기다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 반대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불신자들이 왜 그토록 죽음에 대하여 무서워할까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영혼이 지옥에 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영혼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자신을 방어하는 파숫군과 같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만 살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130:6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영혼이 죽어 있는 불신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이 공포요, 멸망의 시작이 되지만, 우리 성도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영혼이 잘 되면,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잘되고 강건해 진다고 요한 3서 2절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 살기를 원합니다.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형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 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로운 나봇 (0) | 2009.07.29 |
---|---|
태양아 멈추어라! (0) | 2009.07.26 |
그리스도의 사랑 (0) | 2009.07.22 |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 (0) | 2009.07.22 |
구경하는 성도 (0) | 2009.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