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하는 성도 사도행전 20:7-12
사도 바울은 "드로아"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니는 가
데 복음이 아시아 전역에 급속하게 확산되어서, 바울이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곳에도 성도들이 있었
니다. 그래서 바울은 드로아에 7일 동안을 머물면서 열심히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떠나기 전날인 주일
는 성도들과 떡을 떼면서 밤이 늦도록 강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 밤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즉 성도 중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도
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고, 사람들은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창문에 걸터 앉아 설교를 듣다가 그만 떨
져 죽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은 안식 후 첫날에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현재의 주일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이날은 "매주일
첫날"(고전 16:2) 또는 '주의 날'(계 1:10)로도 불리웁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교도들과는 달리
식일이 아닌 주일에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확실한 증거이자 최초의 언급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요 20:1-8), 성령의 강림하심(행 2:1-4)이 안식 후 첫날에 있었으므로 성도들이
이 날을 거룩히 구별하고 기념하여 새롭게 하나님께 대한 예배일로 지킨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또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사도 시대 이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규칙적인
배일이 된 것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이요,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명을 감당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에, 성도들은 당연히
신 그리스도 즉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날은 바로 "주님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은 그림
요, 신약의 복음은 실체입니다. 따라서 구약 대로 예배는 안식일에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아직도 그림
에 매달려 있는 것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안식 후 첫날 저녁에도 설교를 듣기 위하여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모인 곳은 3층 집입니다. 여
에서 '윗다락'이라는 곳은 3층을 말합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등불을 많이 켜서 환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배를 위한 준비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주의한 점은 바로 아무도 창문에 걸터앉아 있는
유두고라는 청년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은 '복되다', '다행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당시 헬라 사회의 하층민들 가운데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두고는 비천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처럼 비천한 사람이나, 집 주인처럼 3층 집에 살고 있는 사
이나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것이므로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유두고라는 청년은 밤이 깊어지므로 졸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졸다가 깊이 졸게 되고, 그
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아주 잠에 완전히 골아떨어졌습니다. 환기를 위하여 뚫어 놓은 작은 창에 앉아
있다가 결국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서 보니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바울도 설교를 중단하고 급하게 유두고에게로 달려 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유두고가 죽었다고 우왕
왕하는 것을 진정시키고, 그의 몸 위에 엎드려서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실 것을
응답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성도들과 함게 올라가서 떡을 떼어 먹으면서 밤이 새도록 담소를 하였습니다. 떡을 떼는
에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유두고를 데리고 올라왔습니다. 할렐루야!
여기에서 유두고를 "살아난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이는 나이어린 소년 뿐만 아니라, 종을 가리키는
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유두고는 아마도 집회를 연 그 집의 아이이거나 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아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대변하는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드로아의 성도들은 그를
볼 때마다 그 날 밤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회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나 성도들
게 당신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권념하심과 돌보심을
게 믿는 가운데 낙심하지 말고 신앙의 인내를 경주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렇게 사도 바울의 사역에 일대 큰 혼란을 야기시킬 뻔 하였던 유두고의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
까요?
1.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유두고가 떨어져 죽은 일의 원인은 졸다가 깊이 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다
씀을 잘 듣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유두고만 졸다가 떨어져 죽기까지 하였을까요? 유두고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없는 요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 요인으로는 그가 너무나 피곤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이름에서 보여 주듯이 낮은 신분의 사람
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면서 노동에 시달린 나머지 너무나 피곤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저녁에 조용한 가운데 말씀을 듣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곤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은 예배에 방해가 될 만한 일은 사전에 없애야 한다는 교훈을
을 수 있습니다. 전날에 아주 심한 운동이나 놀이로 인하여 예배에 지장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밤 늦게
지 일이나 공부를 함으로써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에 지장을 주는 것도 옳은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일이라도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적인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 예배를 위하여 준비할 줄 아는 자세가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유두고에게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따라서 졸음이 찾아 왔고,
졸음이 깊어져 잠이 들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
인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유두고라는 청년은 상당히 믿음이 좋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저녁 시간에
쉬지 않고 말씀을 들으러 왔다는 그 자체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데 저녁 예
에 참석할 수가 있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배에 빠지기 위하여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안 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핑계 대는 사람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좋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인적인 일이나 가정적인 일이라도 다음으로 돌리고 먼저 교회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유두고가 바로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유두고가 믿음이 있었다는 근거는 사도 바울이 유두고가 떨어져 죽은 것에 대하여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두고가 존 것도, 잠이 든 것도 다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왜
졸았는가에 대하여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음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유두고가 저녁에
씀을 들으러 온 것 그 자체만으로도 믿음이라고 인정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요인으로서는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때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인정할 것입니다. 말씀에
집중하지 않게 되면, 누구에게든지 졸음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피곤해서 말씀에 집중이 안 될
도 있지만,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배는 내가 잘 드려야 합니다. 내가 은혜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남이 은혜받는 것 쳐
보면 무엇하겠습니까? 교회가 어떻게 꾸며져 있는가 구경하러 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
을 듣는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구경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편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유두고가 어디에 앉아 있었습니까? 창문에 걸터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성도도 창문에 걸터 앉아 있었
니까? 유두고 한 사람만 창문에 걸터 앉아 있었습니다. 그 혼자만 깊은 잠에 빠졌다가 창문을 통하여 아
로 떨어져서 죽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왜 창문에 걸터 앉았을가요? 편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방 바닥에 함께 앉아서
불편한 것도 참으면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성도들도 편한 것이 좋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편한
것을 참고 인내하는 것은 말씀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왜 나옵니까? 집 안방에서 편히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든지,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불편하게 앉아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1 시간동안
한 것보다 말씀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긴장해서 들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님 눈과 마주쳐야 더 긴장이 되고 은
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강의를 들을 때에도 교수님의 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긴
이 되고 공부하는 것이 머리에 잘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자세는 비스듬히 반쯤 누워 있는 자세를 가지고 강의를 들어 보십시오. 그 강의가 머리에 들어
겠습니까? 예배 시간에도 편한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말씀이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딴 생각이
들어 오고, 일주일 동안 유지해야 할 영적인 힘을 받지 못하고 패배하는 한 주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한 시간, 편해도 불과 한 시간이요, 불편해도 불과 한 시간이 아닙니까? 몸이 편해지면 딴
각이 들어오는데, 예배 시간에 다른 생각한다는 것은 곧 마귀의 궤계에 넘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
는 편한 사람에게 더 자주 옵니다. 바쁘고 긴장된 사람은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귀울 일 시간이 없습니다.
편한 사람이 이런 저런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몸이 편하게 되면 졸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편한 사람이 바로 유두고와 같은 큰 잘못을 범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여하는 예배는 긴장된 마음과 바른 자세를 가지는 것이 기본이며, 구경하는 예배는 편한
자세와 흐트러진 마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3. 사탄의 간계
유두고의 졸음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이것은 분명히 드로아에서 복음의 열기를 식히려는 사탄의 집요한
간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편한 자세를 가진 유두고는 결국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를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두고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죽었다고
어 있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즉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마귀의
장난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도 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전문적인 관찰을 통하여7 유두고는
분명히 죽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실제로 3층 다락에서 졸다가 길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이 살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바울은 유두고의 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릴 때 자기
품에 그 아들을 안고 그의 거처인 다락으로 올라가 침상에 눕혔던 것이나(왕상 17:21), 엘리사가 수넴 여
의 죽은 아들 위에 올라 업드려 그의 입과 눈, 손, 몸에 자신의 것을 대었던 것과(왕하 4:34, 35) 유사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릴 때의 행동(행 9:40)과도 비슷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행동을 흉
냈다기 보다는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당한 자에 대한깊은 연민의 정을 나타낸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하겠습
다. 이것은 또한 저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쓰는 진지한 자세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 하면서 떠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침착하게 진정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
의 딸의 죽음 앞에서 흐느끼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라고 (막 5:39) 말씀
셨습니다. 즉 이들은 구경꾼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죽은 유두고를 생각하고, 또한 이 일로 인
여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방해가 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드로아 교회를 와해시키려는 사단의 간계는 유두고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히려 드로아 교회가 더욱 강성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부활과
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안한 자들의 간계까지도 그의 선한 계획을 성
하는 방편으로 삼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항상 긴장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다면
욱 큰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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