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현재에 충실하라!

chukang 2009. 7. 1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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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충실하라! 창세기 31:38-42

 

야곱이 가나안 땅 브엘세바의 아버지 집을 떠나 하란 땅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거한 햇수가 무려 20년이나 되었습니다. 두 아내 라헬과 레아를 위한 14년을 봉사하였고, 라반과의 정식 고약 계약 기간 6년입니다. 이제 이 밧단아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던 터에, 라반과 그 아들들은 양털을 깎으러 갔습니다. 중동의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양털 깎는 일은 연례행사 중 큰 해사입니다. 양의 수에 따라 며칠씩 계속해서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때는 친구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며 즐겼다는 기록이 나옵니다(삼상 25:4; 삼하 13:23). 따라서 외삼촌 라반의 야곱에 대한 감시도 소홀해졌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때를 노려 가나안 귀향을 결심하고 출발하였습니다.

밧단아람을 출발한지 3일 만에 외삼촌 라반이 이 일을 알게 되자, 즉시 추격에 나섰습니다. 7일을 추격한 끝에 야곱을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라반은 야곱에게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야곱과 라반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 20년 동안 야곱은 정말 죽을힘을 다하여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수많은 양떼를 돌봄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겠습니까? 어떤 양은 아파서 죽을 수도 있고, 어떤 양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맹수가 와서 물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의 재산에 축이 날 때에 라반은 가차 없이 야곱에게 변상하도록 하였습니다. 야곱은 그대로 순순히 다 물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떠한 변병을 하지도 않고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라반은 야곱과의 정식 고용계약 6년 동안 품삯을 10번이나 변역하였습니다. 자기의 편리에 따라 자꾸 바꾸거나 어겼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열심히 양떼를 돌봤습니다. 야곱은 낮에는 폭염 속에서, 밤에는 추위 속에서 양떼를 돌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외삼촌의 재산에 축이 날까 염려하여 그토록 열심히 일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야곱에는 신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신념은 무엇일까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현재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형편과 처지에 맞게 최선을 다하여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일이 하기 싫어서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습니다. 핑계 댈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만들어 내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꾀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우직하게 일을 했습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라반은 어쩌면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런 바보가 있을까? 하라는 대로 다 하는구나~ 실컷 부려 먹어야겠다. 이런 라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묵묵히 힘이 들고 괴롭고 아파도, 아무리 더워도, 아무리 추워도 자신이 맡은 일을 게을리 하거나 핑계대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차피 6년만 지나면 지긋지긋한 이곳 생활도 끝인데, 그저 내 편한 데로 일하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지 이런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 사람들은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포기는 하지 않을지 몰라도 자신의 몸을 위하여, 자신의 편의를 위하여 요령을 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목동과 어울려 지내면서 재미있는 놀이를 하면서 양떼를 돌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일은 내게 맡겨진 일이므로, 반드시 내가 해 내겠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이왕 일하는 것, 열심히 일해서 내 재산을 최대한으로 불려보겠다는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이러한 품성이 그 11번째 아들 요셉에게도 유전이 된 것일까요? 요셉은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지만, 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낙담하여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애굽까지 팔려와서 종이 된 처지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주인이 시키는 일이나 대충 대충하면서 목숨이나 유지하면 되는 것이지. 이런 자세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니 주인의 눈에 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모든 모습을 살펴보던 보디발은 그를 가정의 총무로 세우고, 가정의 모든 대소사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이런 요셉을 보디발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 아내까지 좋아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정직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종으로 팔려갔죠, 또 옥에까지 갇혔습니다. 이제 인생을 포기할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요셉은 그 옥중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종으로 팔려왔을 때에는 그 충직함으로 인하여 가정 총무가 되었고, 심지어 감옥에서까지도 인정을 받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전옥이 감옥의 어찌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요셉이 자신을 포기했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어디에서든지 현실이 어떻든지 최선을 다하는 요셉으로 인하여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신약으로 가 볼까요? 신약의 대표적 인물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에는, 유대교를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는 데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총인구 중에서 70명만 들어갈 수 있는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공회의 회원이 되었다면, 그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공부는 말할 것도 없이 잘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어디 공부만 잘한다고 인정을 받습니까? 공부만 잘하고 생활 전반에 걸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빈정거리고 오히려 무시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면에서도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사울은 그렇게 현재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자신을 있게 한 버팀목이자 유대인을 살리는 생명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면서 합당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가 하루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입니다. 홀연히 하늘에서 강한 빛이 그를 향하여 비추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무섭고 놀랍고 눈까지 보이지 않게되어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눈이 먼 그는 일행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으나 3일 동안 먹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주님께서 준비해 놓은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보내어 사울에게 안수하였고, 그제서야 사울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뽑으셨나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가 잘했던 잘못했던 간에 그가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 것에는 최선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큰 일을 계획하고 계셨던 주님께서는 그를 뽑으셨고 그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렇게 변하여 새사람이 된 후에는 사울은 바울로 이름을 바꾸었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유대인을 위하여, 또한 율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토록 열심히 하던 바울이 이제는 도리어 잡으려고 하던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가 찰 일입니까? 유대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주님의 일만 했습니다. 감옥에 갇혀도 찬송하여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매를 맞아 살이 터져도 또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주님을 위한 삶만이 최고의 삶이고, 최고로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현재의 삶에 충실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 나는 안 그런데 상대방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돈만 있으면 할 수 있었는데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냐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현재에 충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현재 있는 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여도 안 되면 그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서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최선을 다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보상을 해 주셨을까요?

 

첫째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의 아내 라헬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올 때에 그 집에서 수호신으로 섬기는 ‘드라빔’이라는 우상을 몰래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수호신은 가정을 지키며 부자가 되게 해 주는 신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없어진 것을 안 라반은 야곱의 모든 짐을 샅샅이 찾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찾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라헬에게서 찾아내었다면, 그를 기화로 야곱을 죽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훔쳐 온 것은 비록 잘못된 일이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과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를 지켜 주셨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루스에서 잠을 잘 때에 돌을 베게삼아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그는 꿈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 야곱이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평안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 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줄곧 야곱의 모습을 관찰하고 계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하는가도 보셨습니다. 저렇게 충실하게 난관을 뚫고 나가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고 그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의 가족을 지켜주셨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나오기로 결심한 것은 라반의 변덕이 심한 성격과 이기주의적인 면모 때문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수도 없이 괴롭혔습니다. 그의 이익을 위하여 종으로 부린 것입니다. 게다가 품삯도 열 번이나 변역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은 야곱은 이렇게 살다가는 언제도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이 마음을 바꿀지 모르고, 자신의 앞 날에 큰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이 사위이자 조카이지 그는 종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아내들을 빼앗아갈지, 또 자신이 품삯으로 받은 양들도 빼앗아 갈 것이 분병하기 때문에 그는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혼자만 떠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속한 온 가족 라헬과 레아와 두 시녀 첩과 자신이 받은 모든 가축을 이끌고 벧엘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목에는 그의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에도 최선의 방책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군대 400명을 이끌고 마주 오던 에서와 화해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야곱을 지켜 주셨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현실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념만으로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의 신념을 굳게 지킬 수 있도록 한 또 다른 원동력이 있지 않았을까요?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고생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소망”입니다. 우리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다 고민이 있기 마련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소망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힘이 들지만 반드시 좋아질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없는 소망은 헛된 것입니다. 바울이 매를 맞아 죽을 뻔하면서도 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살해 위협을 수없이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다른 성도가 주님을 만나서 어떻게 했다는 것을 듣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내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경 말씀 속에서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헛된 형상을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로 볼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만 주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허황된 꿈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계획도 허황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목표는 높게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당하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그 목표를 해 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 변화를 위하여 현재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분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꿈만 크게 꾸면 끝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목표만 세우면 무엇하겠습니까?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 하루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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