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 골로새서 3:1-5
모름지기 사람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신분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느새 시간이 흘러서 몇 년이 지나가고, 또 몇 십 년이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혹은 젊을 때의 짧은 시간,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원대한 꿈을 가꾸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되지만, 한 날 한 날 육신적이 쾌락에 몰두하게 되는 사람은 패배자의 인생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소년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5 달러짜리 지폐를 줍게 되었다고 합니다. 공자로 5달러가 생긴 재미에 행여 이런 일이 또 있을까 하여 그는 길을 걸을 때마다 땅만 보고 갔습니다. 이렇게 계속되는 이 일이 그의 습관이 되어 그는 평생 땅만을 보고 걸어 다니면서 길에서 물건을 주었습니다. 그가 평생 주운 것들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와 수천 개의 동전, 그 외에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이런 것들을 줍느라, 평생 푸른 하늘과 꽃과 새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기회를 많이 잃고 결국 넝마주이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또 어느 구두닦이 소년이 닦을 신발을 찾느라 하루 종일 사람들의 신발만 내려다보고 살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의 것을 쳐다보고 살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도 인생을 구두닦이로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무엇을 쳐다보며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을 때에는 땅엣 것만을 바라보았고, 세상 풍속과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를 따랐지만,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우리 성도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성도들은 당연히 그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엣 것’에 두어야 합니다. 위엣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위에 있는 바로 그것들’, 즉 장차 성도들에게 주어질 하늘에 있는 보물과 같은 많은 약속된 복들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비록 지금은 복잡하고 삭막한 물질 사회에 살고 있지만, 본향인 하늘 하나를 향해 가는 나그네로서 ‘위엣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위엣 것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행기를 최초로 만든 라이트 형제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 앞서 과학자 랭글러 박사 팀이 비행기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시험 비행을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라이트 형제는 비행 시험에 성공을 하였지만, 랭글러 박사의 실패에 실망한 기자들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라이트 형제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9월에야 라이트 형제는 몇몇 기자들 앞에서 비행시범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뜨게 하는 양력의 원리는 진작 알려져 있었습니다. 양력이라는 것은 땅에서 끌어당기는 중력의 반대 힘을 말합니다. 즉 새들은 양력을 중력보다 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원리를 잘 아는 과학자들이 비행기를 발명하지 못하고 자전거포나 운영하던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었을까요?
비행을 위해서는 2단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1) 공중에 뜨기 2) 제어하기. 모든 과학자들이 1단계에 집착하고 있을 때 라이트 형제는 2단계를 실험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2단계에 성공하지 않으면 1단계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즉 라이트 형제는 할 수 없을 때에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은 허황되다고 한 것을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 날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적인 정신, 미래지향적인 정신들이 과학과 결합이 되어서, 우리나라에서는 비밀스럽게 생각하던 계수나무와 토끼가 있다고 믿는 달까지 유인탐사선을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달리하게 되면 현재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한 것들, 단지 꿈으로만 생각되고 허황된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만화책을 보면 로봇이 등장합니다. 인간이 하기 힘든 일을 척척 대신해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로봇끼리의 전쟁 만화나, 로봇이 사람을 지배하는 만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화가 이제 현실로 나타나서, 백화점에 가면 로봇이 손님들과 대화까지 나누고 위치도 알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도무지 지금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천국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바뀌어야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의 생각을 성령께서 바꾸어 주실 때에 우리가 중생한 사람이 되어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되었다면,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속에 감추어진 장차 나타날 영원하고 행복한 생명의 비밀인 ‘위엣 것’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다’는 것은 ‘~에 몹시 마음을 두다’, ‘몰두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위엣 것’을 항상 생각하며 깊이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12:16을 보면,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세상의 것들이 우리의 목표나 목적,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비록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항상 마음에는 천국 시민의 마음을 품고 생활은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을 좇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것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추구하는 것이 달라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기꾼들은 어떻게 하면 남의 돈을 가로챌까 하는 생각에 몰두합니다. 선행과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과 지식과 돈으로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무엇을 하면서 놀까 하는 사람은 매일 매시간 노는 방법을 찾고 즐기려합니다. 그러나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놀고 싶은 것을 참고 공부하게 되면 최소한의 미래는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즉 지금 것에서 벗어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도 ‘위엣 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속한 영적인 것이라면 ‘땅엣 것’은 이미 십자가로 인해 소멸된 가치 없는 죄악된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위에 있는 영적인 것은 사랑과 안식과 자유와 평화와 평등이 넘치며 갈수록 깊어지고 극치를 이루는 영원한 삶을 말하는 반면에,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땅의 것들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에 매인 순간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것은 시들고 피폐되며 사라지는 인간의 순간적인 사람에 마음을 몰두하고 빼앗기며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한 2서 17절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소망을 땅에 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3.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참조, 고전6:19) 주님의 것이라면 우리가 피해야 할 오류는 무엇이며, 생활의 모든 행동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는 분명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을 따라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그의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우리의 유일하고 합당한 목표로 삼고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것을 향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들’이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가리켜, 탐심은 곧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같은 것들이 ‘위엣 것’을 추구하는 성도들의 심산을 타락시키는 것들이므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이라’는 말은 ‘죽음에 빠뜨리라’, ‘죽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땅엣 것을 찾아다니며 죽이라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범람한 음란과 탐심 같은 것들을 모두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죽이라’고 한 것은 오히려 성도들 안에 있는 땅에 것들을 향해 한 말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공로로 거듭난 성도들은 예전에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옛 사람이 가지고 있던 ‘땅의 지체’들과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비록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새 사람을 입었다 할지라도 옛 본성이 성도 안에서 그대로 내재되어 있다면 항상 갈등과 번민 속에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새 사람을 입음과 동시에 자신의 옛 품성과 행위들에서 과감히 돌아서야 합니다.
성도의 소망은 오직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고 하늘 창고에 자신의 재물을 쌓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이 지상에서도의 삶도 천국의 영화로움을 바라보며 고난 가운데서도 천국 시민으로 적합한 의로움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궁극적인 천국 시민으로서 마땅히 천국의 모든 것들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몸이 이 땅에 있기에 그것들을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육상 경주에서 목적지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앞만 보고 달려가듯이 우리도 십자가 이전의 땅의 것들은 모두 버리고 십자가 이후의 위엣 것들만을 바라보며 삶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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