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민수기 제23장 강해 발람의 제1,2차 예언 노래

chukang 2009. 12. 1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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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제23장 강해 발람의 1,2차 예언

 

메소포타미아 복술가들은 7층 제단을(창 11:4) 쌓고 사술에 의하여 접신을 한다고 합니다. 발람도 동일한 방법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접신을 두 번씩이나 시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영원히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직접 하나님께 듣고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 뜻을 변경시켜 자신의 이익에 맞게 저주의 말을 얻어 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것은 무당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제문을 구실로 구슬려서 자신들이 원하는 복을 주게 만든다는 소위 주술신앙(샤머니즘:shamanism)적 행동입니다. 따라서 한글 성경만을 보고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고 하여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잘못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며, 발람은 단지 하나님을 주술 신앙의 대상인 잡신들의 하나로서 간주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절대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런 잡신의 우두머리이며 실체인 사단이나 그의 추종자들이인 귀신들과 혼동하거나 또는 그렇게 격하시킨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에 사람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에 맞게 하나님의 뜻을 뜯어 맞추려는 주객전도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발람은 여호와의 신의 감동으로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오히려 자신의 입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을 행하게 됩니다. 1-12절은 발람의 첫 번째 예언, 13-30절은 두 번째 예언의 내용입니다.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발람이 이런 제단과 제물을 준비하게 한 것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신의 특유한 사술 방법에 기인한 것입니다(신 23:4). 그는 ‘여호와’ 하나님도 고대 근동에 존재하던 여러 잡신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여호와를 불러내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이런 것들을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 행위는 제사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제주(祭主)에게 있는 것이므로 진정한 제사가 되지 못하고 주술에 머물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2:7)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 속에 교역자들과 신자들이 있지만, 말씀에 근거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발람과 발락과 다를 바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리니라.

발락은 발람의 요청에 따라 제물과 제단을 준비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비록 사악한 목적일지라도 악인들은 그들의 신을 찾고, 준비된 것을 바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인들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성도라 일컬음을 받는 우리들은 더욱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여 먼저 내 자신을 산제물로 바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위하여 준비된 것을 드림으로써 모든 일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3: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갈지라~

발람이 여호와를 만나려는 의도에서 특별한 장소를 선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계시를 받던 방법과는 달리(출 6:13, 29; 대상 21:18-30; 단 2:19; 벧전 1:10,11), 자신이 창안해 낸 복술의 일환으로 표증을 찾고자 하는데 불과하였습니다. 따라서 발람이 미래의 경황을 알기 위해 특별한 사물을 관찰하던 복술가임을 간과한다면(레 19:16), 본문을 보며 그가 혹 여호와의 신실된 종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냐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발람은 사태난 산으로 갔습니다. ‘사태난 산’은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뜻으로서 산당(영역본)이나 꼭대기(공동번역)를 의미합니다. 즉 고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교의 주술가들이 점괘나 신과 접하기 위하여 사람이 없고, 전망이 좋은 산꼭대기나 황폐한 곳을 찾았던 관습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신 여부에 관계없이 자기 나름대로 장래 일을 예견하기 위함일 뿐인 것입니다.

 

4: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고하되 내가 일곱 단을 베풀고~

발람의 사술에 의하여 하나님이 호출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발람과 발락의 악한 행동을 저지시키시려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현현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잡신들처럼 사술이나 마술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을 장악하고 지배하시는 전권적인 능력을 지니셨기에 발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발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복술가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생각대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생각도 지배하시고 입술도 지배를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만을 나오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발람은 그 입술로 악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입술을 주장하셔서 선한 말이 나오도록 역사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발람이 다시 제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니 그곳에는 발락과 귀족들이 제단 옆에 모두 함께 서 있었습니다. 발람은 그들에게 노래를 지어서 말하였습니다.

 

7: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노래는 히브리어로 ‘마솰’입니다. 단순한 노래가 시를 의미하지 않고 ‘지혜가 함축된 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발람이 지은 이 노래는 문체와 형태를 고찰해 보니 B.C.15세기의 작품으로 입증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 노래는 발람의 순수한 창작이 아닌 하나님의 신탁에 의존한 작시임이 분명합니다. 이 노래는 발람 자신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변화에 의해 고백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휩싸여 강제적으로 불리워졌다는 데에 이의를 달지 말아야 합니다.

‘아람’과 ‘동편 산’은 동일 장소입니다. 즉 발람의 고향 ‘브돌’입니다. 아람은 메소포타미아 북부 및 수리아에 살던 셈족과 그 지역을 통틀어 지칭하던 용어이며, 고대 근동 사람들 누구나가 쉽게 알 수 있는 지명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호 12:12).

‘야곱’과 ‘이스라엘’ ‘저주하라’와 ‘꾸짖으라’의 단어가 각각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꾸짖으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볼 때에 ‘위협하라’는 뜻으로, 감정을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협박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믿는 성도들에 대하여 사단의 세력이나 이방인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마음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발람이 이처럼 동일한 의미를 반복 나열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파멸되기를 절실히 표현하였던 것처럼, 사단의 세력은 믿는 성도들이 거꾸러지고 파멸당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8: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발람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였던 발락의 기대와 소망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 속에는 우주와 역사를 주권적으로 운행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발람 자신도 무력할 뿐이라는 체험적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계속 시도한 것으로 보아서, 그의 고백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이뤄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20, 23절). 이처럼 악한 궤휼을 일삼는 자들은 정의의 반발에 부딪쳐 일시적으로 몸을 도사릴지는 모르지만 다시금 기회를 엿보는 법이므로 성도들의 계속적인 감시와 경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홀로 처할 것이라’와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는 말 역시 반복적인 평행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독보적인 위치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현현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그들의 성별됨과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신 30:15; 수 24:15; 막 10:21). 그러나 사실 복음이 개방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우월성보다는 ‘성도의 우월성’으로 그 의미가 바뀌어져야 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10: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야곱의 티끌’은 야곱에게 주어진 무수한 후사를 가리킵니다. 이는 과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셨던 언약의 성취를 시사합니다(창 28:14). ‘이스라엘 사분지 일’은 약 45만명을 말하는데(출 12:27), 바람은 사면에 야영하는 이스라엘 진영 중 가장 가까운 한 진영을 가리키면서(2:1),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두 구절은 사실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내포하는 표현으로서 이스라엘 인구 수가 많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백성으로서(창 1:22; 12:1-3; 롬 9:4,5) 이스라엘 백성들의 당당하고 위압적인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이스라엘의 위엄에 압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신도 모르게 감동되어 그들을 의인이라고 칭하며, 자신도 악한 길에서 벗어나 의인의 길을 걷다가 죽기를 원한다는 고백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과 온전함으로 위엄과 당당함을 갖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악의 세력조차도 성도들을 바라보았을 때에 감격하여 굴복할 수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11: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모압 왕 발락은 부와 명예를 발람에게 보장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발람의 축시 낭송으로 인해 그의 심경은 청천벽력이 치고 말았습니다. ‘어찌’ 즉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전개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감탄사임을 생각할 때에 발락의 놀람과 좌절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악인의 기대는 세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반드시 허무하게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12: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이 말씀은 “유의하고 경계하고 신경쓰지 않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압에 의하여 그에게 전해진 말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한 번 더 기회를 엿보자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욕망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거짓된 성도요, 양의 무리 속에 섞여있는 염소에 불과한 것입니다.

 

13-30절은 발람의 두 번째 예언입니다.

13: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본래 발락은 발람의 복술 효험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정하였으나, 역효과를 가져오자 그 실패 원인이 위치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이스라엘의 끝 부분만 보게 하여, 그들의 미약함을 인식시키고, 발람의 저주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은 보는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권위와 힘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14: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단을 쌓고~

‘소빔 들’은 ‘보초 서는 자들의 벌판’ ‘파숫꾼들의 벌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해 북독쪽에 위치한 이곳은 아바림 산맥 줄기에서 뻗어 있는 벌판으로 그 사면이 비스가 산을 비로한 많은 산들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분만을 관망할 수 있으므로 발락은 발람의 새로운 주술을 기대하면서 이곳으로 안내하였던 것입니다.

 

15: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날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이번에는 발람이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날 동안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4,5절에서 여호와께서 임재하신 것이 자신의 주술의 효과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신있게 말하면서 주술을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기서’ 이 말은 특별한 장소가 아닌 수단으로서 ‘그처럼’이란 의미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내가 그처럼 여호와를 만날 동안에’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발람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입에 또 다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다시 그의 입을 주관하신 것입니다. 발람은 계속하여 발락의 악한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의 무리들이 노리는 기회를, 섭리가운데 그들에게 나타내고 알리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체험한 발람이지만 끝까지 탐욕에 눈이 어두어져 결국 나중에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31:8).

 

17: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발락이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투에서는 역시 ‘여호와’를 한 갓 잡신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자들의 모습입니다. 잡신을 우습게 여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잡신에게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발람의 입에서 앞에서와 동일하게 자신들을 향한 저주가 쏟아져 나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염려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발락은 여호와 하나님을 참신으로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발람의 입에서 나오는 축복과 저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성공과 출세에만 관심을 두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기복신앙도 이와 다를바가 없는 것입니다.

 

18: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발람은 발락으로 하여금 일어나서 들을 자세를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하는 말에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라는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하였을까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앞에서 예언한 노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비유한 말입니다(말 3:6; 약 1:17).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창조주와 피조물의 근본적 차이를 들어냄으로써 이난의 월권행위를 제지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한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익의 여부에 따라 변하지 않과, 끝까지 이루심으로 스스로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로써 발락의 음모와 여기에 동참한 발람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질책하셨습니다.

 

20: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발람은 자신의 사술의 한계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사술을 쓰지 않았으나, 다시 이방신의 제단을 쌓았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자신의 악한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애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기에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을, 허물은 그들의 사악함, 즉 우상 숭배, 불의, 거짓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스라엘에 의하여 저질러진 모든 죄악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보지 않으신다고 하였으나, 그 뜻은 묵인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책망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 모든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김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죄 있다 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왕은 곧 여호와 하나님, 만왕의 왕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외치며 찬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2: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들소는 지중해 지역에 널리 서식하였으며, 진취성, 일사불란한 단결력, 막강한 전투력을 갖춘 동물입니다. 가나안 집입을 위해 정복 사업을 펴나가던 이스라엘의 용맹, 위엄, 강인함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은 변함없이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을 해할 수 있는 사술이나 복술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보호하는 백성들은 그 어떤 악한 세력으로도 절대로 해할 수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4: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이 구 절은 야곱이 유다에게 유언을 남길 때에 썼던 표현(창 49:9)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함이 더해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발람으로부터 예언의 노래를 들은 발락은 결국 그 어떤 세력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없으므로 더 이상 그들을 향하여 저주도, 축복도 하지 말라는 말을 발람에게 하고 있습니다. 발람은 발락에게 처음에 말한 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7-30절은 발락이 발람은 또 다른 곳으로 데려가서 세 번째 제단을 쌓고 저주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27: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발락의 헛된 생각으로 또 다시 다른 장소를 택하여 발람으로 제사를 지내어 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실지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브올 산 꼭대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아바림 산맥에서 제일 높은 산입니다. 이곳에서는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는 모압 평야를 가까이서 마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혹시나 이번에는 발람의 주술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실패에 실패를 하였음에도 또 악한 기대를 포기하는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무소불능의 속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또 단을 쌓고 제사를 준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지만, 감사의 예물도 아니고 헌신의 예물도 아닙니다. 오직 사악한 목적에서 바치는 뇌물입니다. 이러한 뇌물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타락한 종교인의 모습이며, 사망의 길로 들어가고 있는 잘못된 인간의 욕심의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