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제22장 강해 발락과 발람
이스라엘은 이제 모압 평지에 도착했습니다. 요단 서편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가장 좋은 지점인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기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게 되는데, 그 사이에 제2차 인구조사, 모세의 죽음, 새 지도자 여호수아의 임명 등의 사건과 신명기에 기록된 설교가 진행되었습니다.
본 장에서부터 24장까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 놀란 모압과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의 힘이라도 빌어서 이를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모압 왕 발락이 미디안 족속들과 결탁하여 당대의 유명한 메소포타미아 복술가인 발람을 초청하여 발생한 소위 거짓 선지자 발람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1-14절은 발락의 초청을 거부하는 발람의 모습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모압 평지는 요단강 건너편, 즉 강 동편에 위치한 약 20km의 넓고 광활한 초원 지대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평지 전역에 숙영지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그 평지 안에 있는 ‘싯딤’이라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수 3:1). 이곳은 가나안 입성을 위한 마지막 교두보라는 것 외에도 모세의 최후의 장소이며, 여호수아의 활동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2,3: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발락은 ‘침략자, 약탈자’란 의미로 당시 모압의 왕입니다.(삿 11:25) 이스라엘이 아모리의 남왕국과 북왕국을 모두 멸망시킨 것을 보았기 백성들과 함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압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신 2:9), 모압은 이스라엘이 아모리를 멸망시킨 것과 60만 명이라는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출 12:27)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4: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미디안 족속의 시조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세 번째 아내, 그두라의 아들입니다(창 25:1-4). 그는 시내 광야 남부와 중서부 아라비아 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그곳에서 가계를 형성하였습니다(출 2:15). 점차 불어난 미다안 족속들은 목축과 상업을 주업으로 하여, 활동무대를 시내 반도에 국한시키지 않고 아카바 만까지 넓히고 있습니다(창 36:35; 수 13:21). 따라서 미디안 장로가 어느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인지는 분명히 단정할 수 없지만, 문맥상 모압이 도움을 청하기에 가까운, 즉 모압 근처의 미디안 인들이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압 왕이 미디안 장로를 찾아 나선 것은 유목 생활과 무역을 통하여 견문이 넓은 그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는 단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5: 그가 사자를 브올의 아들 발람의 본향 강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가로되~
발락이 사자들을 브돌에 보낸 것은 발람의 탁월한 복술에 관하여 미디안 장로들에게 들었기 때문입니다(4절). 브돌은 유프라테스 강변 즉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입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그곳에는 잡다한 우상 숭배자들과 복술가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바람은 특히 복술가로서 그들 중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모압으로부터 400마일이나 떨어진 브돌까지 모압 왕 발락이 도움의 손을 청하였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다신론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마귀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복술자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마귀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발람의 마음을 유혹하여 끌어 당겼던 것입니다.
6: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하나님의 역사를 본 발락이 복술자 발람을 초청하면서 상당히 그를 높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첨의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신론자들은 지역마다, 나라마다 각각 주관하는 신이 따로 있다고 믿었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나라의 신이 더 큰 신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마술이나 이적을 실제로 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통하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시 ‘복술가’(코셈)이라고 불리던 발람은 축복 선언과 저주 선언에 있어서 상당한 효능을 거두던 자로 정평이 나 있었으므로, 발락은 작은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 대신 그를 초청하려고 했던 것입니다(신 18:10; 수 13:22). 복술가는 점을 치는 자, 혹은 예언, 예측을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발람이 제 아무리 특출한 신통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악령에 의한 것이므로 결국 하나님의 권능에 눌려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으며(수 13:23), 모압에게는 일절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신 23:5; 느 13:2; 미 6:3).
7: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술의 예물을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여기에서 복술의 예물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저주를 해 주는 대가를 말합니다. 이것은 복채로서, 이런 관습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도 직업선지자들과 백성들 간에도 성행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벧후 2:15). 여호와를 빙자함으로써, 또는 기적을 체험하려고 금품을 주고받는 행위는 모두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8: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실제로 발람은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니라 신접행위와 같은 주술적 방법으로서 사람을 미혹케 하던 자입니다(신 18:11, 12). 그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가 여러 신들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여러 신들 중에 이스라엘의 신이며, 본문의 말은 여호와의 신탁을 받아 보겠다는 발람의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는 것과 그의 사조로서 오직 그 분의 명령에 의지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민족의 위기 앞에서 신을 찾는 장로들을 통하여, 인간이 최후의 순간에 찾고 신뢰하는 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9,10: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말씀은 발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는 암시가 아니라, 이방술사에게 마저 현현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하였던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발람도 역시 창조하셨고 지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을 찾아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몰라서 물으셨을까요? 발람의 대답을 통하여 발락이 보낸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그러한 자들을 위하는 발람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도록 이끄시며, 질책하기 위함입니다.
11: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있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당시 근동 지방에는 국가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 유랑하던 족속들이 있었습니다. 발락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와 같은 떠돌이 족속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으며, 이러한 유랑 족들에 의하여 자행되던 약탈을 두려워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그가 그동안 복술을 행했던 것은, 한낱 신접한 자와 거짓 신으로서, 여기에서 진정한 주권자이며 참 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발락과 발람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능력의 하나님의 이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혹시 이스라엘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2-14: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언약을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창 15:1-21) 하나님 외에는 그 주신 복을 번복시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저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부탁이나 권면이 아니요, 모압과 발람의 음모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발람은 비록 거짓 신들에 의하여 점을 치는 자이기는 하였지만, 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경고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발락의 장로들에게 그냥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모압의 장로들은 그대로 돌아가서 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5-35절은 발락의 거듭된 초청에 발람은 결국 모압으로 향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15,16: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매.
발락이 더 높은 귀족들을 보내었다는 것은 복채도 더 많이 보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발락은 너무 작은 복채를 보냈기 때문에 발람이 거절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오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발락은 신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므로 오직 세상의 권력과 재물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발람에게 확실한 대우를 해 줄 것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령의 유혹으로 발람을 초청하는 발락의 모습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모습의 전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대방이 파격적으로 좋은 조건을 내세울 때에는 항상 그 앞뒤를 세심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7: 내가 그대로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발람이 거절하자 발락은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 조건은 최고의 명예와 최고의 권력이었습니다. 발락의 제안은 세상적인 가치로써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타락한 인간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욕심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조차도 무시될 수 있다고 보는 발락의 유혹은 물질만능 사상이 팽배한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성도들이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여기에서 발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마치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기다려 보자’는 계속되는 말을 통해서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그이 바리새적 외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발락의 제안에 반 이상은 승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겉모습과 생각은 다른 것입니다.
19: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발락의 엄청난 제안과 회유로 인하여 발람의 마음이 흔들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전달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락의 사신들에게 이처럼 말함으로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악한 것이 틈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하와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형태라고 하겠습니다.
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하나님께서 발람에 대한 경고를 풀어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우상숭배자들과 악령에 속해있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일관 되게 진노를 퍼부으시는 하나님께서 발락과 발람의 음모를 눈감아 주셨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가라는 말씀은 발람의 거역에 무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미움보다 더 잔인한 것이 무관심을 고려해 볼 때, 발람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니
나귀는 수나귀, 암나귀, 새끼 나귀로 성경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나귀의 용도는 승용, 화물용, 경작용으로 두루 사용이 되는데(창 42:26; 신 22:10; 눅 10:34), 발람이 안장을 지운 나귀는 암나귀(아톤)로서, 그의 직분을 고려해 볼 때 주로 승용으로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22: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발람은 하나님의 역설적 경고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시키는데 이용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모압 왕 발락의 뇌물에만 눈멀지 않았더라도 ‘함께 가라’는 말씀을 ‘가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으로 가는 것은 자신의 범죄 의지에 맞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어 해석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진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제1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 말씀의 진의를 고해하지 않기 위해 사심을 버려야 하는 것은 물론,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올바른 뜻을 헤아려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나귀가 천사를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도 합니다. 이것은 신화적 표현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 나귀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허황된 것입니다. 단지 나귀는 실물 교육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와 이적에 의해서, 보고, 말하는 능력을 임시로 부여받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어 사역하시기 때문에, 이 같은 기적을 접할 때 우리가 놀라워하고 의아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24: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나귀가 밭으로 들어갈 때에 발람은 채찍질하여 길로 올라서게 했습니다. 그 길은 좁아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나귀는 하나님의 사자를 피할 수밖에 없어서 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에 따라 행동하려 할 때에,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과 마주치게 됩니다. 요나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며 하나님을 피하였으나, 하나님 앞에서 도망갈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은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안이 어두운 발람은 나귀가 몸부림을 쳐서 자기를 상하게 하자 분노하였습니다. 그 원인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주어진 환경과 고난만을 원망할 뿐, 그것을 통하여 선한 곳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표본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앞으로 더 나아오니 나귀는 피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두려운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나귀가 말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너를 죽였으리라.” 발람이 정말 멍청한 것일까요? 나귀가 말을 하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도 놀라서 어떤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계속해서 나귀는 “나는 네가 오늘까지 일평생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발람은 처음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고, 벽에 몸을 비비고, 엎드리는 3가지의 이상 행동을 보고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는 말을 하는 대로 깨닫지 못하는 미련한 자였습니다.
31: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이렇게 우상숭배하는 자들이나 복술자들은 정말 짐승보다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밝히시고 사자를 보고 하자 그제야 땅에 엎드리지 않습니까? 사자는 발람에게 짐승보다 못하다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너는 나귀를 세 번 때렸지만, 나귀는 나를 보고 세 번이나 피하였기 때문에 네가 살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분명하게 발람에게 말했습니다.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32) 즉 다시 한 번 모압으로 가지 말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여전히 가고 싶은 마음에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제 그 사람들과 가도록 허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말만 하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36: 발락이 발람의 온다 함을 듣고 모압 변경의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고.
아르논 가의 성읍은 발락 이전의 왕이 아모리 왕 시혼과의 전투에서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난 후, 새로운 국경선으로 그어진 아르논 강변의 ‘아르’를 가리킵니다(21:15; 신 2:18). 이곳은 모압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모압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발락은 국경까지 나와서 발람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7: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특별히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발람을 물질과 명예로 회유하려는 발락의 노력을 보고 있습니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을 발람의 주술로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샤머니즘 숭배자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탄에게 속한 자는 샤머니즘, 토테미즘 할 것 없이 사탄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38: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임의로 말할 수 있으리이까~
발람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가 메소포타미아의 자기 고향으로 발길을 돌이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진실성이 결여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께서 혹시 모압 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1: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락은 발람을 잘 대접하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바알 산당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산당이 이스라엘 진영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압의 신은 ‘그모스’가 주신(主神)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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