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제20장 강해 므리바 사건과 미리암과 아론의 죽음
본 장은 이제 저주의 38년이 지난 후에 다시 가데스바네아에 다다른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3, 14장에서의 가데스바네아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고 방황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출애굽 1세대는 다 죽고, 이제는 제2세대가 장성하여 가나안 정복의 주역으로 대두하였습니다. 그런데 40년간의 광야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생략되어 있고, 초기와 말기의 적은 부부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장에서부터 마지막 36장까지는 대개 출애굽 제40년경의 말기 역사입니다. 이제 조금씩 요단 동편 쪽을 정복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대지도자인 모세가 가나안 정복 사업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선고 받게 되는 므리바 물 사건과, 에돔 족속의 경내 통과 거부, 또 모세를 도와 출애굽의 대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미리암과 아론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시의 백성들이 다 죽고 그 2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도 교체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13절은 므리바 물 사건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에 거하더니~
정월은 33:38을 참고해 보면 출애굽 제40년 째 아빕 월(현재의 3-4월)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중 10명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13:26-14)36)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되리라는 선고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38년이 경과한 이 때 출애굽 제2세대들 장성하거나 새로 태어나서 또 다시 신광야의 가데스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미리암이 죽고 장사하였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로 그를 살리는 데 최대의 공헌을 하였으며(출 2:4), 최초의 여선지자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지도자였습니다(출 15:20, 21; 왕하 22:14; 눅 2:30). 그러나 그녀도 역시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세와 아론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는 징벌의 대상이었으므로(12:1), 가나안 진입 이전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미리암의 종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업적 보다 순종 여부에 따라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신 26:16; 32;46; 삼상 15:22).
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이곳은 ‘맨미스밧’ ‘가데스바네아’라고 불리는 곳으로 팔레스틴 남쪽 변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아시스 지역으로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물이 마른 원인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물은 녹지에서도 그렇지만 사막지대에서는 더욱 더 생명과 직결이 되는 것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뭄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위협이 가나안 땅 진입을 위한 하나님의 시험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내 형제(兄弟)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試驗)을 만나거든 온전(穩全)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試鍊)이 인내(忍耐)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忍耐)를 온전(穩全)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穩全)하고 구비(具備)하여 조금도 부족(不足)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고 하였습니다. 시험과 환난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키기 위함임을 깨닫는다면 그것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는(말 3:2,3) 용기가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공박하다’는 말은 반감을 가지고 싸우는(against)이라는 뜻입니다. 즉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적의를 가지고 싸우려고 대항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부모와 똑같은 모습을 똑같은 곳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3: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다면 이렇게 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원망입니다. 이것은 삶의 의지를 상실한 모습인 동시에 하나님께 큰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어떤 환경과 상황 아래 있더라도 포기하거나 자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창 1:11-27, 7:1-3; 욥 27:3) 경솔한 사람, 의지가 없는 사람, 단순한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인내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이러한 모습은 출애굽 직후에 르비딤에 정착 할 때에도 있었습니다(출 17:3).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기 보다는 단지 모세나 아론에 의한 민족 독립 운동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극한 상황을 인내할 수 없었으며, 고통을 받는 자유인이 되기보다는 배부른 노예(돼지)가 되기를 더욱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잇는 시련이 우리의 영적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의 일부분임을 깨닫고 인내한다면, 어느 시점에 다다라서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차지하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믿음이 없는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머물렀던 가데스는 백성들의 말대로 모든 것이 부족하고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곳을 바라보았을 때에 그곳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모든 것이 충만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6: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이스라엘 관례 상 엎드리는 것은 두려움이나 존경의 표시입니다. 여기에서는 여호와께 대한 존경이나 두려움보다는 백성들의 다그침에 대한 난감함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7,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여기에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지팡이입니다 . 이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게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반석을 치라고 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11절에 보듯이 모세는 명하는 대신 반석을 쳤습니다. 전의 경험을 떠올린 것일까요? 그는 쳤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간과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에 의존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사역을 덮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경험도 중요하지만 시시때때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야말로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9-11: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너희 반역의 무리들아 들으라.’ 이런 뜻입니다. 모세가 단순히 반석에게 명령으로만 물을 내라고 하였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높이 나타났을 것이지만, 모세는 인간의 짜증과 혈기를 가지고 마치 자기 자신이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처럼 부 번이나 힘껏 내리쳤던 것입니다.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 모든 사람과 모든 짐승들이 다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을 질타하는 심정으로 쳤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백성을 사랑하사 물을 제공하시려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가리우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모세와 아론은 마치 자신들이 기적을 베풀어 물을 내는 것처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 대신 자신들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모면하려고 하는 유혹과 혈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백성들에게 확신시켜 줄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야 만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며 교만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게 하는 말씀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므리바’란 용어는 ‘겨루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보통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당신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14-21절은 에돔과의 협상 내용입니다. 모세는 비록 므리바 사건으로 인하여 가나안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으로 가려면, 지형상 사해 남단을 거쳐 요단 동편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적합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에돔 족속의 영토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이에 모세는 사자를 보내어 에돔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에돔 땅을 지날 수 있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14-17: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자를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에서(에돔)와 야곱(이스라엘)은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입니다(창 25:19-27). 그러나 장자 명분 사건으로 인하여 갈등을 겪은 후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일시적인 화해도 있었으나 결국 에서는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에서 벗어나고 세일 산 부근으로 이주하여 에돔 족속의 선조가 되었습니다(창 36:1-43).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모세는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의 갈등 관계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친족 관계임을 강조하여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후손이 자신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고, 애굽에서 수많은 고통 속에 지낸 것과,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큰 역사를 통하여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을 세세하게 설명을 한 후에, 에돔 경내에 있는 좋은 곳, 즉 포도원이나 채소밭이나 혹은 우물물까지도 전혀 가까이 가거나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오직 ‘왕의 대로’로만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왕의 대로는 길을 높게 돋운 것을 말합니다. 국가 예산으로 닦아 놓은 모든 대로를 지칭합니다. 여기에서는 ‘술탄의 길’(Derb les Sulton) 또는 ‘황제의 길’로 불리던 특별한 도로입니다.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통과하지 못하리라~
이것은 오랜 민족 감정에서 나온 대답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형인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고, 그로 인하여 자신들이 이스라엘 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즉 열등감으로 인한 시기심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통과를 불허할 뿐 아니라 무력으로 제거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돔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일련의 적대 행위 가운데 첫 번째 사건입니다.
20: 그는 가로되 너는 지나가지 못하리라 하고 에돔 왕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에돔 왕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으로 군사를 동원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돌이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형제국인 에돔과의 전쟁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신 2:4,5)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이 최후 목적지인 가나안 진입 때까지 가급적 피흘림을 줄여보고자 의도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신 7:1). 우리도 역시 하늘나라의 진입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귀들과의 세력들과 전면전을 벌여야 하지만 때로는 우회로를 택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임을 가르쳐 준다고 하겠습니다(창 3:1; 롬 7:23; 엡 6:12; 딤전 6:12).
22-29절은 아론의 죽음의 내용입니다. 우회로를 찾아 가나안을 향해 계속 나아가던 백성들은 호르 산에 이르게 됩니다. 아론은 바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2: 가데스에서 진행하여 호르 산에 이르렀더니.
순서로 볼 때에 이 사건이 20,21 절 앞에 나와야 합니다. 아론의 죽음은 에돔의 저지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렇게 순서가 바뀐 것은 아론의 죽음을 특별한 주제로 다루고자 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의 선후를 분명히 알게 해 주는 것은 호르산이 가데스에서 아라바 광야로 통하는 길목에 있기 때문입니다(33:37). 아라바는 왕의 대로를 통과하기 위한 최후 거점이었으므로, 아라바 동쪽에 위치한 호르산은 가나안 진업 경로에 있어서 가데스와 아라바의 중간 지점이 되는 것입니다(신 10:6).
호르산은 에돔의 국경을 형성하고 있던 아라바의 동편에 있었으나, 험하고 황량한 형세 때문에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곳이었으므로 에돔 땅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아라바를 끼고 펴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33:10; 신 10:6).
24: 아론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 말은 이스라엘의 내세관이 담겨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구약 초기 사람들은 아직 부활 신앙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창조 신앙에 근거하여(창 1:24-31; 전 12:7) 사람이 죽는다면 선조들과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즉 히브리인들은 역사의 초기부터 벌써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훌륭한 철학과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으므로 구약시대 사람들보다 영원한 삶에 대해 더욱 선명한 인식을 하게 되었으므로 믿음도 더욱 커야 할 것입니다.
25: 너는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산으로 불러 계시하셨습니다(출 3:1-12; 19:3-6; 신 32:49).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엘르아살을 대동하여 산으로 올라오라 하신 것은 엘르아살이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론이 입고 있는 옷 즉 대제사장의 복장을 벗겨서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혀줌으로써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을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이 옷은 ‘거룩한 옷’(출 39:1)이라고 불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구별하여 세운 대제사장이 입은 이 거룩한 옷은 엘르아살이 입게 되고 대제사장직은 그에게 이양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절차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즉 아론의 교만으로 인한 (10,11절) 자격 박탈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인생의 최후까지 겸손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29: 삼십 일을 애곡하였더라.
야곱을 위해서는 칠 일간을 애곡하였던 반면(창 50:1-10), 모세와 아론을 위해서 30일 씩 애곡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때때로 불평불만을 터뜨리기는 했으나 모세와 아론을 민족 최고의 영웅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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