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제24장 강해 발람의 3,4,5차 예언
발람은 두 번씩이나 여호와와 접신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의 원래 뜻을 변경시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예언을 얻어내려고 했으나,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세 번째로 아예 그 스스로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예언을 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의 신에 강제로 감동되어 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같은 것을 본 발락은 발람과 논쟁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발람은 자신의 예언이 스스로 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처럼 기만하고 있음도 보게 됩니다.
발람은 4,5차 예언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사에 대한 예언을 남깁니다. 다윗 시대 또는 신, 구약 중간 시대 등에서 1차적으로 성취가 됩니다. 이것은 보다 더 멀고 궁극적인 영적 이스라엘, 곧 신약의 모든 택한 성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승리를 오묘하게 예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야곱에게서 나온 한 별, 즉 홀(scepter)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타고 세상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승리에 대한 예언까지 남긴 발람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더 이상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해봤자 역사 전체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는 무의미함을 깨닫고 부득불 물러나게 됩니다.
1-14절은 발람의 세 번째 예언입니다.
1: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거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사술을~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쓰던 사술을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의 술수가 무가치하고 무력한 것임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2: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하나님의 신은 성부, 성자 하나님과 동격인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발람에게 임재하신 이유는 그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 언약의 불변성과 하나님의 권능을 보다 더 잘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명확한 것은 발람이 성령 충만함을 입을 마음 자세를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위에 현현하신 것은 악을 궤멸시키려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의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지 않는 악인에게도 임하신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 모두를 당신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3: 그가 노래를 지어 가로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한다는 것은 성령의 임재로 육의 눈은 감기고 영의 눈이 열린다는 의미입니다. 발람은 영적이며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와 뜻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은 육의 욕심과 판단으로서 발견할 수 없으나, 오직 이 모든 것을 버릴 때에 영의 눈을 뜰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일 그의 처절한 심판을 놓고 볼 때(31:16) 이 영안의 열림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말씀을 듣고, 이상을 보는 것은 여호와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계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 술사에 불과한 발람에게 이상이 주어졌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하고 선하신 의지를 악의 세력인 발람에게 확실히 심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엎드려서 눈을 뜬 자’ 엎드리는 것은 추락하다, 눕다는 뜻이 있습니다. 자의적인 행동이 아니라 성령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압도당하는 상황을 낱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발람이 거꾸러졌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 앞에 인간은 압도되고 항복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뜬 자는 육신적인 모든 것들이 차단된 상태에서 내적이고 신령한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육의 것을 멈추고 영의 것을 추구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5: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던 모압 광야는 황량할 뿐 아름다움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영적인 눈을 통해 이스라엘의 외적 환경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의 번영된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으므로 이런 표현은 자연스럽게 사용한 것입니다.
6: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여러 갈래고 힘차게 뻗어나가는 급류 계곡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이룩해 나가고 있는 이스라엘의 위력, 탁월함, 번영 등을 상징합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생활 식수가 부족한 곳이므로 물이 있는 골자기는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필수 조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요와 영원한 번영을 상징합니다. ‘강 가의 동산 같으며’ 발람의 고향 ‘유프라테스 강변’을 지칭하는 낱말과 똑 같습니다.(22:5) 발람은 강 때문에 비옥해지고 번성한 자신의 고향을 염두에 두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접목되어 있음으로 생명력이 차고 넘치게 될 이스라엘을 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침향목’ 평균 3.4m의 높이로 자라는 상록 다년생 나무로 독특한 향내로 향 재료와 방부제로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백향목‘은 주로 레바논에서 생산되었으며, 약 천년의 수명을 자랑하는 고급 자재입니다. 모두 귀한 목재로 귀하였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이스라엘의 고귀함을 말하려고 그것을 예로 든 것입니다.
7: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통은 두 개의 물통을 말하며, 고대 근동지방 농부들의 필수적인 관개장비입니다. 사람 목을 중심축으로 하여 긴 장대 양 끝에 매달아 물을 담아 나르던 나무로 된 통을 가리키며, 물이 풍족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물이 부족한 팔레스타인에서 물이 넘칠 것을 예언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부족함이 없이 부어주시는 풍요로움과 복을 상징합니다. ‘종자가 물 가’에 있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 왕’이 ‘아각’보다 높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이방 왕을 압도한다는 뜻입니다.
8: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 적국을 삼키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강한 힘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힘을 주셔서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임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9: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바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다시 언급된 것입니다(창 12: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매체, 혹은 복의 통로로 삼으시고, 구원의 전달자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외적인 여건의 변화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받지 않듯이, 이스라엘 역시 축복의 주체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대하는 태도의 여부에 따라 다른 민족들이 흥망성쇠가 달려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즉 복의 전달자로서 이방 민족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전달하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할 신성한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것과 동일한 복이요 의무입니다.
10: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이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격노한 감정을 표출하는 행위이므로, 발락이 극도로 화가 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 여호와가 그대를 막아 존귀치 못하게 하셨도다.
발람이 여호와를 의식하여 청탁을 받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므로 그에게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발락의 조롱 섞인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말 속에는 여호와 때문에 부귀영화를 잃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최후의 회유가 내포되어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람은 또 다시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발람은 물질에 유혹되어 이스라엘은 성적인 타락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듭니다(31:16; 벧후 2:15). 이에 이스라엘은 그의 계략에 넘어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지만, 발람 그 자신도 비극적인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31:8). 그릇된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자들은 종국적으로 같은 운명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가장 커다란 미끼는 물질과 권력입니다. 악인인 이것을 사용하여 타인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고 획책하는 것입니다.
12,13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더 이상 술수를 써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발람은 복술가로서의 자신의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킬 의향으로, 여호와의 의사에 따르겠다던 일전의 발설 내용을 자기 변론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에게 변명으로만 그쳤으므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14: 이제 나는 내 백성에게로 돌아가거니와 들으소서. 내가 이 백성이 후일에 당시의 백성에게~
이것은 역시 발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인한 예언입니다. 이 충고 안에는 모압을 포함한 열국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가 예시되어 있습니다.
15-25절은 발람의 마지막 예언입니다.
1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15, 16절 초입은 3절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서,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것은 많은 신 중에서 ‘최고의 신’을 뜻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모압 왕 발락이 아직도 여호와를 하급의 신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이를 지적해 주기 위함입니다.(11절). 우리는 최고의 신으로 하나님을 알기 보다는 ‘유일한 신’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별은 신비스러움으로 말미암아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특별한 인물을 상징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사 14:12; 단 8:10). 여기서는 중요한 예언적 의미로서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홀’은 왕이 조복을 입고 조현(朝見)할 때에 오른 손에 들고 다니던 약 1.5m 가량의 지팡이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왕과 왕권을 상징합니다(에 4:1; 슥 10:11). 한 별과 한 홀이 예언적 용어로 사용되어 가깝게는 다윗 왕을,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고 있습니다(마 2:2).
‘소동하는 자식들’은 모압 자손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즉 모압 자손은 소동을 일으키는 자로서 지적이 되는데, 그들의 교만과 사악함을 나타냅니다. 발람은 이 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과 모압을 비난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모압은 복음을 방해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로서, 이들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은 하나님께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심을 모압의 멸망을 통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8: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에돔 족속과 그 거주지 세일 산은 이스라엘에게 빼앗길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돔 족속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19: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주권자는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역시 다윗과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예수님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악의 세력에 절대 굴복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남은 자들’은 에돔 족속 중에서 멸망되지 않고 남은 무리들로서, 메시아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는 사단의 세력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메시아 왕국의 도래와 함께 심판대 앞에 서며 멸망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20: 아말렉 은 열국 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에서의 2대 손 아말렉의 후예들을 가리킵니다(창 36:12). 이들은 가나안 남부에서 애굽 국경가지 널리 분포하여 살던 약탈 민족이기는 했으나(13:29; 창 14:7), 당시 근동의 판도를 가늠할 만큼 강대국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아말렉의 왕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하나님 앞에서 가장 패역한 나라로 심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출 17:8). 아말렉은 히스기야 왕에 의하여 전멸당하게 됩니다(대상 4:43).
21: 가인 족속
이 족속은 미디안 족속 중 한 지파를 가리킨다고도 하고, 아말렉의 한 부류라고도 합니다. 나중에 앗수르의 포로가 되리라는 표현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우호 관계에 잇는 민족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미디안 족속의 한 부족인 ‘겐’ 족속으로 보입니다(창 15:19; 삿 1:16; 삼상 15:6). 이들은 이스라엘 주민과 함께 B.C. 745-722년의 기간 동안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과 살만에셀에 의해 앗수르에 유배되었습니다(삿 4:11; 왕하 15:29).
23: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리니.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앗수르 역시 또 다른 심판의 도구에 의해 멸망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앗수르가 B.C. 612년 메대 제국과 바벨론의 연합국에 의해 패망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은 엄정하며 반드시 이루어짐을 두려워해야 하겠습니다.
24: 깃딤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르를 학대하며 에벨을 괴롭게 하리라 마는 그도 멸망하리로다.
지중해 동쪽의 ‘키프러스 섬’을 가리키는데 서방과 동방을 연결하던 무역 및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여기에서 깃딤해변이란 표현은 키프러스 자체보다 그 서방의 세력, 즉 지중해 연안 제국 세력을 의미합니다.(렘 2:10; 겔 27:6) 이는 앗수를 멸망시킨 바벨론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벨’은 건너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유프라데스 강 서편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앗수르와 이스라엘 모두 정복을 당했다는 점을 볼 때 모두 타당합니다. 그리고 앗수르와 근동 여러 지역을 제패했던 바벨론도 결국 새로 부상한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에게 B.C. 6세기에 함락되었습니다(사 13:19; 렘 25:12). 이러한 모든 나라의 흥망을 압축하여 언급한 것은 이 세상 왕국의 나약함과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5: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
발람이 고향이 유프라테스로 돌아가지 않고 미디안에 머물렀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31:17). 그가 미디안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압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미디안 지방에서 재도전해 보려고 한 것입니다. 발람이 미디안 왕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하였으며, 그로 인한 심판을 당한 것을 미루어 볼 때(31:8, 16), 미디안 행은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에 있어서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무의미하며, 이렇게 멸망으로 치닫는 발람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들이 탐욕에 빠질 때에 얼마나 어리석으며 맹목적이 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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