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5일 “나의 성탄절”
“성탄절이 내게는 어떤 의미일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조용한 시간에 앉아서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어릴 때의 성탄절은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는 날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머리맡에 양말을 놓아두면 그 속에 산타 할아버지가 몰래 와서 선물을 넣어주고 간다고 하는 어른들의 말을 믿던 시기였습니다. 산타는 굴뚝으로 들어온다고 들었죠. 그 작은 굴뚝으로 어떻게 들어올까? 이런 생각도 잠시였습니다. 혹시 시커멓게 변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살던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는 제일 높은 곳에 ‘태평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추수감사절, 성탄절에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크림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때 크림빵을 구멍가게에서 10원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도 교회에서 공짜로 빵을 나누어 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교회에 가서 빵을 타 오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던 시절이기 때문에 돈을 10원을 주면 교회에서 주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어머니께 돈을 타서 교회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에게 10원을 주고 빵을 달라고 해서, 크림빵을 하나 타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동네 친구들에게 ‘자 봐 10원 내는 것 맞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10원을 내는 것은 예배 시간에 ‘헌금’이었고, 빵은 그냥 교회에서 공짜로 나누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10원을 가지고 가게에 가서 사 먹어도 되는데, 왜 굳이 교회에 가서 10원을 내고 빵을 받아 왔을까요? 그런데 그 때 내 마음이 참 기쁘기도 하고 만족하기도 했습니다. 그까짓 빵 하나를 10원을 내고 받아 왔는데 가게에 가서 사먹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 내 마음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어릴 적의 내가 왜 교회에 가서 10원을 내고 빵을 받아왔을까 하는 질문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아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영혼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한 것 같습니다. 교회에 가고는 싶은데,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예배가 없는 평일에는 슬쩍 교회에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교회에 거주하시는 ‘사찰 집사’가 나를 보고 무슨 질문을 하기는 했는데 잘 생각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냥 저는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그냥 도망치듯이 나온 기억이 납니다.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나를 그때부터 부르고 계신 것이 아니었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 어릴 적부터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미 시작이 되었고, 그 깊이와 넓이는 감히 측량하려야 할 수가 없는 너무나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잠시 삼천포로 잠깐 빠져서,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 때였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의 조카가 초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여름성경학교에 가자고 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좋다! 갈래?” “그래?” “언제 가는데?” 그렇게 해서 제 생애 처음으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찬송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성경 공부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학교가 주일이나 월요일부터 금요일 혹은 토요일까지 대체적으로 5~6일을 했었습니다. 마지막 날 성경 공부한 것에 대한 시험을 보았습니다. 10문제를 내었는데, 다른 것은 다 썼는데 딱 한 가지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습니다. 선생님이 내 답안지를 보시고 웃으시면서 힌트를 살짝 주셨는데~ 아! 그렇지 하고 생각이 딱 나서 답을 썼습니다. 그 문제는 무엇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당시 동네에서 유명한 개구쟁이가 교회에 나오는 것만 해도 기특한데, 출석도 안 빠지고 잘 나오고, 공부하는 것도 열심히 하는 게 보여서 예뻐 보였나 봅니다. 그렇게 해서 100점을 맞았습니다. 그 때 여름성경학교에 나온 아이들 중에 저 혼자 100점을 맞았습니다. 출석도 꼬박 꼬박 한 번도 안 빠졌습니다. 참 재미가 있었습니다. 율동을 배웠는데, 학교에서 집에서 배우지 않는 것이라서 더 좋았습니다. 성경학교 내내 이런 저런 게임도 하면서, 점수를 다 매겼습니다. 그 결과 저는 내 생애 처음으로 1등이라는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처음으로 나온 플라스틱 필통에 연필 몇 자루, 지우개를 넣어서 상품으로 받았습니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이렇게 시작이 되는 여름성경학교 교가가 내 마음에 항상 남아서 이 나이가 되도록 가끔 나도 모르게 불러보곤 합니다. 그리고 나서 겨울이 되면서 또 겨울성경학교가 있었는데, 그 때는 한두 번 빠졌고, 시험을 안 보았는데, 친구가 1등을 하고 저는 그냥 나누어 주는 상으로 ‘출석상’을 받았습니다.
다시 성탄절로 돌아와서, 좀 더 커서 산타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즐겁게 노는 날인 줄로 알 때도 있었습니다.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캐롤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없었습니다. 산타, 루돌프, 겨울 눈 놀이 그런 주제로 꿍짝 꿍짝하고 다들 즐기는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제일 나쁜 캐롤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이 구절을 보면 ‘산타 =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떠지면서 교회의 성탄절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성탄절 이브의 행사, 성탄절 당일 어떤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우리 모두 산타가 되자.’도 있었습니다. 산타 복장을 한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가 선물을 나누어 줍니다. 세상을 계도해야 할 교회가 마귀가 지배하여 교회를 없애려고 하는 세상 유행을 교회 스스로 가지고 들어 간 것입니다. 이것이 벌써 30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그 때에는 ‘새벽송’이라도 있었습니다.
지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탄절의 주인공인 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성적으로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육신의 정욕으로서의 성탄절 주인공은 ‘쾌락’입니다. 신앙의 어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산타’가 되어서 예수님을 제거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선물과 즐거움에 흠뻑 빠져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산타’에서 ‘ㄴ’를 뒤로 물리면 ‘사탄’이 되는 것은 우리 한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Santa'에서 'n'을 뒤로 돌리면 ’Satan'이 됩니다. 산타가 있는 크리스마스 이브였지만 그래도 생각이 나는 것은,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크리스마스이브 행사를 없앴기 때문일까요?
믿음의 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 보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과 그 풍경들은 그냥 ‘썰렁’ 그 자체입니다. 어떤 불신자는 ‘태어날 곳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났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의 태어나신 마구간은 이미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계획 속에 있던 것입니다.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은 찬송가 가사 그대로 ‘참신과 참사람’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귀는 즐거움, 쾌락, 출세, 지식 등등 인간적인 것들을 앞세우며 이런 것들을 모르는 성도들을 향하여 오히려 ‘믿음은 그런 게 아니야’ 이렇게 핍박을 합니다. “어떻게 꼭 그렇게 성경적인 것만을 내세우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나. 사람이 넓게 볼 줄도 알고 포용력도 있어야지.” 예수 잘 믿는 성도를 ‘편협’하다고 비판하며 따돌림 시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1 5:3) 이렇게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고 응답도 없는 성도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계명들 즉 말씀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입술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런 성도들을 가리켜 “죽은 믿음”(약 2:26)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성도에게는 행함으로 나타나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태어나셨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태어나신 것입니다. 태어나심의 목적인 십자가에 달리는 것입니다. 흉악한 죄인 괴수들 살인자들이 매달리는 그런 십자가에 달리려고 태어난다면, 그런 주님 태어나신 날을 그냥 인간적인 쾌락 속에서 보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보다 더 기쁨은 없기 때문에 주님 오신 날을 기다리고, 그 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구속사의 중심인 십자가의 사건의 의미를 바로 알고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성탄절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살리기 위하여 주님께서 오셨는데(엡 2:1)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되는 것을 가리켜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도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고 하셨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성탄의 최고의 기대치가 올라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이렇게 큰 기쁨의 소식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믿는 성도에게는 성탄절이야말로 참으로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이 성탄절이 기쁜 날로 끝나지 않고 참으로 감사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무엇이관대 나를 이처럼 사랑하실까요? 본시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또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내 모든 죄와 허물은 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다가, 하나님께서 계신 저 영화롭고 아름다운 천국 시민이 되게 하셨으니 이 감격이야말로 어떻게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신앙의 바탕 속에서 성탄절의 맞이하는 성도야 말로 감사 속에서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있다면 다시 교회마다 캐롤이 울려 퍼지면서 크리스마스이브 예배가 드려지고 새벽송이 부활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우리나라 교회의 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보는 사람마다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전도한 것과 같이 성도마다 믿음이 부활하고 교회가 부활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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