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2015년 부활주일 설교: 나는 꽹과리 같은 목사였어요.

chukang 2015. 4. 4. 22:16

 

 

나는 꽹과리 같은 목사였어요. (고전 13:1)

 

  부활! 정말 좋은 단어입니다. 저는 이 부활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하나님의 언어라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많은 부활 설교를 들었고 은혜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 그 자체가 신비로운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상상도 안 되고,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렵기도 하면서 신비로운 것입니다.

  기독교의 두 가지 가장 큰 핵심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입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참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기독교의 정수중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는 줄거리를 교리 중심이 아닌 실천적인 관점에서 부활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활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한 알이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의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농부가 씨를 뿌리면 그 한 알의 씨앗에서 정말로 100배의 결실을 가져옵니다. 거의 모든 씨앗이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주님께서 주신 교훈처럼 더러는 길가에도 떨어지고, 더러는 풀 속에도 떨어지고, 더러는 돌밭에도 떨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새가 쪼아 먹는 씨앗도 있고, 물기가 너무 많아서 정말로 썩어 사라지는 씨앗도 있고, 너무 가물어서 싹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사실 인간의 마음의 밭은 다 옥토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점에 있어서 성도의 마음 밭은 불신자의 마음 밭보다 더욱 황폐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말에 너무나 공감이 갑니다. 목사라고 하는 귀중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들어 생각해 보니 목사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제 모습을 반영시켜보니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못나고 가장 형편없고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바로 목사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입니다. 얼마나 존귀한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까!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민권을 가지면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 총독도 바울을 어쩌지 못하고 로마로 보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공부는 또 얼마나 잘했습니까. 당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배설물쉽게 말해서 똥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배설물이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다 배설물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바울의 모습인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으스대면서 자랑하면서 목에 힘을 빳빳하게 주고 살던 그 사울이 거듭난 뒤로, 중생한 뒤로 겸손해지고, 대접받으면 살던 생활이 남을 섬기는 생활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어떤 부활일까요? 죄로 죽어있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처음의 모습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이것을 가리켜 성화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몸은 그대로지만 죽었던 심령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부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심령이 바울처럼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느낀 변화는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제 생각으로는 바울이 느끼며 깨달은 것은 바로 자신이 정말 어리석고 모라자고 교만하고 더럽고 추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내 자신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표를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체격은 어떻고, 공부는 어디까지 했고, 생김새는 이정도면 괜찮고..... 이런 저런 것들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깨닫고 느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습을 찾아낸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그 피조물의 모습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어떤 존재로 태어났는가? 어떻게 그런 존재로 태어날 수 있었는가? 이 질문들이 오늘 부활 설교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이제야 발견하게 된 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이렇게 제 자신에게 말하곤 합니다. “왜 그렇게 살았니?” 이 말 속에는 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니?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목사인 내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면서 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니?’ 하는 질문을 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저는 하나님을 모르는 목사였습니다. 말씀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설교하고 외치던 꽹과리 목사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고전13장 그 유명한 사랑의 주옥같은 말씀들... 사랑의 종류들.... 그 사랑들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너무나 어마어마하게 크고도 넓어서 정의조차 내릴 수 없습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을 깨달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계셨고 지금도 사랑 받고 있다는 그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겨우 그런 것을 깨달았다구요? 이렇게 질문할 사람도 있겠죠?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또 나를 사랑한다는 것 모르는 성도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깊이 느끼며 깨닫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성도들이나 목사들도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저도 예외는 결코 아님을 말씀드리면서... 교회 부흥, 내 건강, 가족 건강, 자녀들 잘되는 것 등의 그런 종류입니다. 더 나아가서 국가를 위한 기도, 사회를 위한 기도 등을 합니다. 물론 기도라는 그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주 당연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말씀을 통하여 그런 기도까지 허락하시고 응답하신다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또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도 분명히 들어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시에서 이곳 시골 경남 사천의 한 작은 마을로 제가 왔습니다. 마을 이름이 바로 예수 마을입니다. 예수님 할 때에 그 예수발음은 동일하지만, 이곳은 한문으로 예수(禮樹)인데, 쉽게 풀면 예의와 나무숲이 있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와 보니 마을 이름처럼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골 인심도 예전처럼 그런 넉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라, 아는 사람도 더러 있고, 친척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살아가는 생존문제에 관해서는 오직 내 자신의 힘으로만 가능하였습니다.

  농사를 배우면서, 참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열사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외로움 서글픔 이것저것 다 찾아옵니다. 이런 것들은 오지 말라고 애원을 해도 얼마나 잘 알고 찾아오는지 모릅니다. 감기몸살 같은 것은 애교로 봐 줄 수 있습니다. 손이 퉁퉁 붓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시고, 어깨 아프고 허리 아픈 것, 무플 관절 아픈 것,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을 바로 이럴 때에 쓰는 것이더군요.

  와송을 재배하면서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슬퍼하며 심히 애탈지라도이 찬송가 구절 무지하게 많이 불렀습니다. 정말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 보이지도 않은 씨를 뿌리고 싹이 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잘 기를 수 있을까?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속담은 너무나 잘 알았지만, 콩을 심어 보니 정말 콩이 열리기는 하더군요.

왜 내가 이곳에 와 있어야 하는가? 왜 내가 이곳에 오기로 결단을 하였을까? 이런 질문은 힘들고 어려우니 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질문들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가장 중요한 발견은 나는 어떤 존재인가?’하는 철학자들도 의문부호를 다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비교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곳 시골에 온 후로는 다른 사람과 제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뻔할 뻔자로 내가 상대가 안 되기 때문에 그냥 포기해 버리고.... 그 대신 풀과 짐승들과 내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은혜가 넘쳐 나던지요!

  다른 사람들은 짐승을 키우면서 당연히 그런 줄로 알고 키웁니다. 제가 개를 서너 마리 키우는데, 풀어 놓으면 온갖 데를 다 돌아다니면서 채소밭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묶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식당에서 개밥을 얻어서 통에 담아옵니다. 개밥그릇에 퍼서 줍니다. 꼬리를 치면서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 개들은 내가 밥을 주지 않으면 굶겠구나. 저렇게 묶여서 주면 먹을 수 있고 안 주면 먹지 못하는 신세구나. 내가 개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개로 만들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서 저 개들이 나에게 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할렐루야! 개 이빨을 보세요. 무시무시합니다. 뼈까지 오도독오도독 씹어서 먹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런 개가 사람에게는 절대복종을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다스리며 살도록 허락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세상 사람들이나 일부 성도들은 그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당연히 그러려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데 이런 자연의 이치 속에서 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로 태어난 것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차를 만들고 비행기 선박 로켓 우주선 등 별 것을 다 만들어 냅니다. 과학을 발전시켜서 온갖 편리함을 다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에게 위대하다.’고 말할 만도 하다고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도 여전히 차를 몰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농막에 돌아와서 개들과 함께 살면서, 채소 등을 재배하면서 느끼는 것은 감사였습니다.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는 인간으로 살고 있는 한 떠나보낼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에 매여서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스스로 만들 불행 속에서 살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갖 세상 자랑만 하고 살던 나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면서 이곳까지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 모습을 스스로 바로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이었는가.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었나. 내가 얼마나 교만한 존재였나.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고 계셨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뒤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얼마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질문을 하면 조금씩 머뭇거리게 될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내놓는 성도들도 있는데, 잘 들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 같은데,,,, 더 잘 들어보면 결국 제 자랑이더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성경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10계명을 지키고 있나요? 저는 10계명 중에 제대로 지키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깨닫고 내 신앙이 이처럼 모자라면서 그동안 성도들에는 잘하라고 꽹과리처럼 소리만 내는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무늬만 성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핑계를 대고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일부 목회자 중에는 주일 성수하냐고 물어보면 성경에는 주일성수라는 말이 없어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럼 안식일은 지키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안실일은 구약이라서 안 지켜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 목회자나 성도는 무늬만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왜 주일을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목회자가 되고 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 율법은 그림자요,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기본 원리도 모르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과 신약 모두의 중심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에 대한 구절을 말씀드립니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1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이처럼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지켜야하고 이래서 못 지키고, 누구는 이렇게 말하고 누구는 저렇게 말하니 도무지 오락가락해서 안 지킨다고 핑계대면 안 됩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요, 그 다음은 말씀에 복종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더 사랑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신앙의 원리는 알고 계신가요? 신앙의 시작은 절제로 시작해서 절제로 끝이 납니다. 시작의 절제는 그동안 하고 지내던 것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좋던 것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던 것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것은, 곧 빛과 어둠 속에 함께 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말씀에 어긋납니다. 성도는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제로 끝내야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절제가 없이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가지 성령의 열매의 마지막이 바로 절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랑도 절제, 봉사도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가 없으면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절제의 기준은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로 알아야 참신앙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주님의 재림 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신앙이라고 하는 범주에 있어서, ‘성화가 되어가는 과정은 하나의 부활의 신앙을 이루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에 너무나 감사해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그것이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주장 버리고, 내 생각 버리고, 내 고집 버리고, 세상 관습 따르지 않고, 말씀 따르는 생활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변해가는 내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부활의 신앙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