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제2장 강해 - 여리고 성 정탐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다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 시작될 정복 전쟁의 제1차 대상이 될 여리고 성을 사전에 정밀 정탐하는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함께 하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1-7: 여리고성 정탐과 기생 라합에 대한 기사입니다. 가나안 정복의 교두보가 되는 여리고 성 정탐을 위해 파송한 두 정탐꾼들을 기생 라합이 위기에서 구해주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라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 1:5)에 오르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싯딤은 요단강 동편 12km 지점으로 야영하기에 좋은 지역이며, 민 25:1을 보면 이스라엘이 모압 여인과 더불어 음행의 죄를 지지른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정탐꾼을 ‘가만히’(헤레쉬:חרשׁ) 즉 은밀하게 보냈습니다. 여리고는 가나안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 성을 정복하지 않고는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조심스럽게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그 성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도록 하는 철저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정탐꾼들은 기생 라합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라합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라합을 부도덕한 여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11:31; 약 2:25). 이 사건을 통해 창기까지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2: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당시 팔레스틴의 정치적인 상황은 각 성읍마다 왕들을 가진 도시 국가 형태였습니다. 여리고 왕은 이런 성읍을 다스리는 통치자일 뿐 가나안 종족 전체의 왕은 아닙니다. 당시 상황은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 강 건너편에 주둔해 있는 상태이고, 조만간에 강을 건너 지격해 올 시점이었으므로, 여리고 성읍의 파수병들은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정탐꾼들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왕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내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정탐꾼들의 정체는 곧 탄로가 났습니다. 이로 인해 성읍 전체는 비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낮선 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느 집에 들어갔는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라합의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군사들을 보내어 체포하도록 하였습니다. 라합은 자기 집에 들어온 사람들이 정탐꾼임을 확인하게 되고, 이미 이때에 그들을 숨길 것을 결단하였을 것입니다.
4,5: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 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병사들이 라합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에 라합은 이미 정탐꾼들을 숨기기로 결단을 하고 지붕 위에 벌려놓은 삼대 밑에 두 사람을 숨겼습니다. 이런 결단성 있는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에 기록된 그녀의 행위와 말을 참고할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합은 병사들에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의 이웃에 유익이 되는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인데, 거짓말 자체로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그 동기는 신앙과 믿음에 기초한 것이므로 용서될 수 있다는 주장(칼빈)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라합의 행동에 대하여 ‘믿음’이라고(히 11:31; 약 2:25) 언급하고 있으며,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에 거짓말 한 그것까지 정당한 행위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이 성문을 닫을 때 쯤 나갔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미 단호한 신앙적 결단을 하였기 때문에 죽음의 위험까지도 불사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라합이 정탐꾼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면 병사들은 라합의 집을 수색하였을 것인데, 보았지만 이미 나갔으니 급히 따라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병사들은 라합의 말에 속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라합의 입술을 주장하였고,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팔레스틴을 비롯한 고대 동양의 지붕은 대개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막 2:4). 따라서 곡식을 말린다거나, 다른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고(삼상 9:25,26; 왕하 23:12), 많은 사람들이 지붕에서 쉬곤 하였습니다. ‘삼대’는 삼 줄기로 잘라서 3, 4 주일 동안 껍질을 벗겨서 물레 돌려 실을 뽑고 그것으로 삼베옷을 만들었습니다(출 9:31,32; 신 23:8). 이로 볼 때 라합은 비록 기생이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여인들처럼 삼베옷을 만드는 부지런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 그 사람들은 요단 길로 나루턱까지 따라갔고 그 따르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여기에서 그 사람들은 왕의 명령으로 정탐꾼들을 잡으러 온 병사들을 말합니다. 추격하는 병사들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좇아 싯딤의 이스라엘 진영으로 건너갈 수 있는 요단 나루턱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단강을 건넌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요단 길 주변과 인근 야산을 수색했습니다. 성문을 닫는 것은, 정탐꾼들이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그 성문을 닫는 것은 미처 도망하지 못하고 성내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정탐꾼의 퇴로를 막기 위한 행동인 것입니다.
8-13: 라합의 신앙고백과 구원의 요청입니다.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을 구한 행동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며, 현재 가나안 사람들의 심경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 동편의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죽인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과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구해 줄 것에 대한 맹세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눕는 것은 지붕 위에서 잠을 자는 것을 말합니다. 여름에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정탐꾼들이 피곤하여 잠들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에 라합은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라합 자신과 그 가족의 생사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우상 숭배와 다신론의 사회에 살고 있던 한 여인 라합의 입술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호가 언급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비록 라합이 여호와께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그 일이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라합이 감히 자신의 왕과 종족을 배반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간담이 녹나니’ 이 말은 가나안 백성들이 모두 낙담하여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정보는 참으로 정탐꾼들에게 큰 소망과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는 일찍이 모세가 예언한 바에(출 15:15) 대한 성취로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신하게 하였습니다.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가나안 백성이 공포에 휩싸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40년 전에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일과(출 14:15-22) 최근 요단 동편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로 인함이었습니다.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싸울 마음조차도 상실한 것을 뜻합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속성으로 신앙의 핵심(신 4:32-40)입니다. 기생에 불과한 라합이 이처럼 비교적 정확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놀라운 일입니다. 그년 당시 고대 근동에서 전개되는 역사를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를 간파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라합을 특별히 돌아보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주권적인 뜻과 섭리가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12,13: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 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선대’(헤세드:חסד)는 약속, 계약, 언약 등에 기초한 충성, 진실, 인자 등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는 인간관계 속에서의 친절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 하나님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라합은 자신이 먼저 정탐꾼들에게 ‘헤세드’를 베풀었으니 이제는 이스라엘 편에서 자신에게 삶의 보증이 될 만한 확실한 증표로서 '헤세드‘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합은 자신과 가족과 아버지 집 전체가 구원 받는 것에 궁극적인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자기 집을 구원한 사실(히 11:7)과 사도 바울 전도 내용(행 16:31)과도 연관이 됩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맹세는 본인들은 물론 이스라엘 군대도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성호로 맹세하는 것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14-21: 창문으로 드리운 붉은 줄은 라합과 이스라엘을 대표한 정탐꾼들의 약속입니다. 이 줄은 일종의 ‘보증’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보증은 십자가 보혈입니다.(히 9:11-22) 출애굽 당시의 보증은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라합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붉은 줄이 있는 집 안에 있어야 했고, 노아 시대 사람은 노아 방주 안에 있어야 했으며,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안에 거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즉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롬 3:21-26).
14: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라합의 요구에 대해 정탐꾼들은 먼저 ‘누설치 아니하면’이란 조건을 붙인 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라합과 그 가족만은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인자하고 진실하게 대할 것을 여호와 이름으로 맹세하였습니다. 따라서 라합이 조건을 어기면, 정탐꾼들은 맹세를 준수할 의무가 없어지지만, 라합이 조건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맹세를 어기게 되면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5: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 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여리고 성벽 위에 집이 있었다는 사실은 고고학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서 창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탈출하기는 매우 용이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도 역시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창밖으로 매어 있는 붉은 줄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오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지니라.
라합의 거짓 제보로 인해 정탐꾼들을 추격하여 요단 길 나루터로 갔던 여리고 병사들은 여전히 그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여리고 북서쪽에 있는 낮은 야산 지대로 피신토록 가르쳐 줍니다.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바위와 동굴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은신처로는 안성맞춤이라고 합니다.
17-19: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메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앞에서 맹세한 언약을 차질 없이 이행할 것을 다시 한 번 더 다짐하고, 자신들이 탈출하는 창에 붉은 줄을 매어놓을 것과 가족들이 모두 라합의 집에 모여 있을 것을 부탁했습니다. 라합의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있다는 것은 첫째 스스로 신실하게 약속을 이행했다는 증거가 되며, 둘째 정탐꾼들의 약속을 믿고 구원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표시가 됩니다. 이처럼 행함과 믿음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창문에 매인 줄이 붉은 색이었다는 사실에서 생명과 구원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집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결코 생명을 보장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라합의 집이 구원의 매개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비밀을 누설하는 것과 관련이 되므로, 집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노아 당시 방주 안에 들어가 있던 생물만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사실(창 6:9-22)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방주인 교회 안에서만 영원한 생명이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20,21: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허물이 없으리라’는 것은 의무로부터 짐을 벗는 것입니다. 라합이 계약을 파기하여 비밀을 누설하게 되면 정탐꾼들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계약의 의무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라합은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말하고 정탐꾼들을 붉은 줄로 성 밖으로 탈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줄은 그대로 창에 묶어 밖으로 내려놓았습니다.
22-24: 두 정탐꾼의 보고입니다. 이스라엘 진영으로 무사히 돌아 온 정탐꾼은 여호수아에게 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당한 모든 일과 가나안 땅의 거민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고 하였습니다.
22: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따르는 자가 돌아가도록 사흘을 거기 유하매 따르는 자가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만나지 못하니라.
산에서 사흘을 숨어 있으라는 라합의 조언에 따라 행동한 정탐꾼들은 여리고 병사들이 여리고 성에서 도보로 몇 시간 소요되지 않는 요단 강 사이를 삼 일에 걸쳐 샅샅이 수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리고 수색대의 정찰 방향이 길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정탐꾼들이 라합의 말을 듣고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23,24: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그 당한 모든 일을 고하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정탐꾼들의 보고 내용의 핵심은 24절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라합을 통해 얻은 정보를 근거로 이스라엘의 승시를 확신하고 그렇게 보고하였을 것입니다. 1차적으로는 심리적인 면에서 승리를 확보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는 가데스에서 가나안을 정탐한 12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와 일치합니다(민 13:3; 14:5-9). 여기에서 정탐꾼들을 신앙 가운데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실제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신앙의 확신의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매사를 인간적 안목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신앙의 안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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