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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26편 강해 - 공의에 호소하는 탄원시

chukang 2012. 11. 6.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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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26편 강해 - 공의에 호소하는 탄원시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신본주의(神本主義)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왕가 곧 다윗 왕가만이 선민 이스라엘의 영원하고 유일한 왕가가 될 것임을 하나님의 언약(삼하 7:8-16)으로 확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등극 이전에는 그저 인본주의적 탐욕에서 자신의 세속적 왕권을 지키려는 사울로부터, 그리고 등극 이후에는 그 역시 인본주의적 탐욕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대내외의 정적들로부터, 심지어 노년에는 그 역시 그저 인본주의적 탐욕에서 왕위를 노리는 친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끝없는 도전과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신본주의적 정통성과 순결을 지키려는 도중에 끝없이 인본주의자들의 야욕 및 음모와 대결해야 했었던 처절하고도 장렬했던 다윗의 생애 중에서 더욱 긴박한 극한 위기 상황을 당하여 쓴 시입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절대 공의의 실현만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와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첩경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절대 공의에 근거한 원수와 자신 사이의 심판과, 자신의 구원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완전함’은 성실함, 또는 순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완전함에 행하였다는 말은 하나님과 같이 절대적으로 의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하나님께 대해 거짓 없는 태도와 절대적인 신뢰를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시인이 ‘요동치 않고 여호와를 의지하였다.’는 말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전심으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의지한 데 대한 여호와의 판단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담대한 요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의지한 자신의 삶에 근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의 모든 행위를 선악 간에 두루 살피시사 반드시 공의의 보응을 해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살피다, 시험하다는 말은 단순히 인간의 외면적 행동뿐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통찰력입니다. 단련한다는 말은 귀금속을 제련하여 불순물을 분리해 내듯이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원수들이 자신을 무고하게 모함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무죄함을 판단해 달라는 탄원입니다. 결코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자신의 행위가 완전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롬 3:9-22)

 

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인자하심(헤세드:הסד)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진리(에메트:אמת)는 하나님의 정확무오하심, 전혀 거짓이 없으심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보다 좁은 의미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악에 빠지지 않고 진리의 말씀대로 좇아 행하고 있다는 시인의 겸손한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 하리이다.

  허망한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신령한 복을 깨닫지 못한 채 세상 욕심을 좇아서 살아가는 자를 가리킵니다. ‘간사한 자’는 자신의 사악한 속마음을 감추고 위선을 일삼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과 같이 ‘같이 안지 않으며’ ‘동행하지 않는다.’는 말은 악인들과 완전히 절교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들의 악한 행위를 본받아 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악은 무릇 그 모양이라도 멀리하려고 힘써 왔음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 하리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회중과 대조되는 말로 사악한 일을 도모하고자 모이는 악인들의 모임이 행악자의 집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라는 구절이 떠오르게 합니다.

 

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4,5절에서는 시인이 윤리적인 무죄함에 대하여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면, 6절에서는 종교적인 무죄함에 대한 내용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손을 씻고’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전에 손을 씻는 정결례를 행하는 것(출 30:17-21)을 뜻하는 것으로 시인 자신의 순결성을 그 같은 행위에 비유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에 두루 다닌다.’는 말은 제사장이 제사를 집행하기 위해 제단 주변을 왔다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시인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악인들과의 교제를 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훈을 받을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교제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예배 행위가 아닌, 먼저 하나님께 적대적인 악한 세상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일(요일 2:12-17)이 요구 된다는 사실입니다.

 

7: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시인은 하나님께 두 가지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단시키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로 인하여 진리 중에 거하게 하심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널리 전파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의 생활(살전 5:18)과 증거의 생활(딤후 4:2)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두 가지의 요소입니다.

 

8: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눈에 보이는 성전에 대한 사랑으로 구체화시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시대에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기로 약속하신 장소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그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전에 대한 성도의 사랑은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무죄함에 대하여 주장한 후, 그러한 자신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절대 위배되는 것이므로, 그것이 공의를 왜곡되게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호소는 구원에 대한 가장 힘 있는 호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공의를 굽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0: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악특함(짐마:)’는 ‘악한 계획, 나쁜 의도’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상대방을 해하려고 중상모략하거나 심악한 계교를 꾸미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오른 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뇌물을 주고받는 것은 그 대가로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므로 곧 하나님의 공의를 굽게 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상반절의 ‘악특함’과 병행을 이루어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한 행위’를 뜻합니다.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지금까지 악인들과 달리 불의를 멀리하며 성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해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겠다는 시인의 다짐입니다. 악인들과 달리 하나님을 찾고 매어 달리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애타는 호소입니다.

 

12: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평탄한 데’란 자칫 발을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 매우 위태로운 곳인 ‘좁은 데’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안심하고 뛰어다닐 수 있는 넓은 평지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구에 응답하사 자신을 구원해 주실 줄로 확신한 믿음을 이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실로 여호와를 절대 의뢰하는 자만이 이 같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으며 비록 고난 받는 중이라도 기쁨으로 여호와를 송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여호와 신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