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 1 (서론, 서술)

chukang 2012. 9. 9. 00:50

 

  예 정 론 에베소서 1:1-14

 

  예정론이란 무엇인가? 이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가장 쉬운 교리이면서도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의 신학은 거의 100%라고 할 정도로 이 예정론을 무효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신학은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를 포용하고 있으며, 만민구원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정통 장로교회의 성도들이나 일부 목회자들까지도 예정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신학의 시대적 흐름으로 인하여 신학자들이 바로 가르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세속화 되어 성경 말씀보다는 이단의 주장에 따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예정론에 대해서는 ‘로레인 뵈트너’의 ‘칼빈주의 예정론’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하여 가능하면 문구를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알기 쉽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제1장 서 론

 

  천주교에서 면죄부를 강제적으로 판매할 때에 많은 신부들이 반대를 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르틴 루터’는 천주교의 잘못된 점을 95개 항으로 정리하여 발표함으로써 정면으로 천주교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주임사제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선행의 복잡한 체계에 하나님의 가없는 은총의 선물이 얽매어졌음을 개탄했고, 95개조 반박문에서 교황은 연옥에 관한 권한이 없고, 성인의 공덕에 관한 교리는 복음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면죄부 체계를 공격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윤리적·신학적 개혁에 대한 루터의 핵심적 관심사입니다. 즉 성서만이 권위가 있고(sola scriptura), 의인(義認)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sola fide)는 것입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교환권과 곧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1521년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결국 파문당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시대의 독일의 츠윙글리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여 교회와 국가를 연합하여 취리히에서 신정정치를 실시했고, 프랑스에서는 칼빈이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부정하며 스위스 바젤로 망명한 후에 ‘기독교강요’(1536)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3대 종교개혁가로 불리는 루터, 츠윙글리, 칼빈은 모두 예정론에 있어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강력하게 예정론을 가르쳤습니다.

  루터의 ‘노예적 의지(The Bondage of the Will)'에 의하면 칼빈과 같이 예정론 교리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루터파 교회에서는 수정된 형태의 예정 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와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는 스코틀랜드의 개혁장로교회와 프랑스의 위그노 교파와 같이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한동안 이 교리를 지지하였고, 공공연하게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비성경적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이 있으며, 칼빈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기탄없이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는 시대적 흐름 속에 성경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성도들과 신학자들은 칼빈주의를 낡은 신학이라고 간주하려고 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칼빈은 바울, 어거스틴의 계보를 잇는 가장 훌륭한 신학자입니다. 칼빈주의는 칼빈이 만들어 낸 신학신조가 아니며, 예정론을 비롯한 성경적 신학 사상을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한 사람이 칼빈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칼빈은 신학사상 체계를 창작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제시하는 바를 조직적으로 명료하게 우리들에게 해설해 준 것입니다. 마치 ‘뉴턴의 법칙’과 같이 모든 물체는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뉴턴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뉴턴이 명료하게 논증하였기 때문에 ‘뉴턴의 법칙’이라고 붙여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칼빈주의의 체계 역시 칼빈이 탄생하기 전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체계는 사실 창조 시부터 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를 칼빈이 밝히 깨달아 조직화한 것입니다.

  칼빈의 가장 위대한 점은 ‘성경이 인도하는 곳까지만 갔고 성경이 멎는 곳에서 멎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은 넘어 가지 않으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주저하지 않고 수용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선언은 결정적이며 적극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비평가들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이 설득력 있는 논리적 분석은 그의 적을 두렵게 하는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관한 탐구에 있어서 일반인이 일찍이 거의 꿈도 꾸지 못한 신비들을 통찰해 내서 위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때까지 가려져 있던 성경의 한 면은 모든 사람들 앞에 밝히 드러내었고, 또한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에 별로 주의하지 않았던 것들의 심오한 진리를 강조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사도 바울의 교리를 밝히 드러내어 그것을 기독교회의 정착을 시킨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의 교리가 바로 “예정론”입니다.

  예정론은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정론 교리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성경의 교훈에 대한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경 교육이 부족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예정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무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정론은 성경에 계시된 가장 깊고 심오한 진리를 취급하는 교리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정론을 먼저 신중하게 연구해 보지도 않고 거부해 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 예정론이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현명하고 선량한 많은 사람들의 확신을 받아왔다는 것과 따라서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예정론이 지극히 위대하고 복된 성경의 진리이며 모든 교파의 근본적인 교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개혁주의 신앙의 총화나 본질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유명한 ‘카이퍼’라는 신학자는 “예정론이나 성경의 권위에서 칼빈주의의 특성을 발견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러한 도리들은 칼빈주의의 논리적 귀결이지 출발점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무성한 잎이 그 나무가 잘 자라고 있음을 증거해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뿌리는 아닌 것과 같다. 만약 이 교리가 다른 진리와의 필연적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단독으로 표시된다면 필경 이 교리의 효과는 과장되고 또한 그 체계는 왜곡되어 잘못 전달될 수밖에 없다. 어떤 원리의 서술이 참이 되러면 그것이 그 소속 체계의 다른 요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제시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전체적으로 이 체계의 평행을 이룬 서술이다. 예정론과 더불어 다른 진리들 곧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성령의 인격, 성령의 영감, 이적, 예수님의 속죄 및 부활, 재림 등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2장 서 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자신의 가장 현명하고도 거룩한 뜻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일체의 사건을 자유롭게 불가변적으로 예정하신다. 그러나 그 결과로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가 된다든지 피조자의 의지에 폭력을 가하는 존재가 된다든지 제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이 탈취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정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일체의 상정적 조건하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을 다 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미래에 어떤 조건하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지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예정하신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정교리는 하나님의 목적은 절대 무조건적인 것으로서 유한한 피조물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뜻에 따라 작정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자연의 운행을 작정하시고 역사의 과정을 가장 세미한 부분가지 지배하시는 위대한 능력의 왕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영원불변하며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주권적입니다. 이 결정은 단순히 자연계의 운행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의 전체 사건에 미치며 또한 성도와 천사, 사악한 자와 음부에 있는 악귀의 전 활동가지 포함합니다. 이 결정은 그 원인 조건 지속(持續) 및 관계에 있어서 일찍이 있었고 또한 장래에 있을 일체의 사건을 동시에 포괄하며 시간과 영원 안에서 일어나는 피조물의 전 활동 범위를 포함합니다. 하나님 자신 외에 모든 것은 이 결정 안에 포함되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창조력과 지지력을 힘입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유한한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며 또한 하나님께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을 제한하거나 방해하는 어떤 상태도 발생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지금 그가 하고 게시는 일 그대로를 하시려고 목적하시었습니다. “그는 우주의 주재시오,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은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라고 분명히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 유지도 하나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그 어느 부분에서나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의 관할 안에서만 발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결정하거나 허락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주권적 예정으로서 표시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결과적 사실이나 변화로 조건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미래의 모든 사건에 관한 그의 예지의 기초가 될지언정 결코 예지나 장래의 사건들 자체에서 기원된 어떤 것들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제정(이것에 의하여 그가 인간 각 개인에게 어떻게 행하실는지는 그 자신 안에 결정하셨다.)을 우리는 예정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인류는 모두 명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기로 어떤 사람은 멸망을 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개인은 이 목적 혹은 저 목적으로 각기 다르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영생 아니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루터도 칼빈과 같이 절대적 예정론을 열렬하게 지지했다는 사실이 루터의 로마서 주해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의도에서 발새하고 또 그것에 의존한다. 이런 관계로 생명의 말씀을 받을 자와 그것을 받지 않을 자 그들의 죄에서 해방될 자와 그 죄 가운데서 강퍅해질 자 또한 칭의 맏을 자와 정죄 받을 자가 다 예정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루터의 친한 친구인 멜랑톤은 “모든 일이(우리가 외면적으로 행하는 일뿐 아니라 내면적으로 사고하는 사상까지도)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되어진다.”고 하였으며 “기회나 운명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의 예정을 철저히 깨닫는 길만이 하나님의 경외하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의 첩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헤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어떤 주인이 한 종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어느 곳에 보낸 후에, 또 다시 다른 종을 같은 일을 주어 같은 장소에 보내었을 때에, 이 두 종이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는 아주 우연적인 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이미 그들을 보낸 주인이 작정하고 예지했던 당연한 만남인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건의 발생이 우리들에게는 맹목적인 듯하고 의외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사태의 추이를 미리 알고 게시며 또한 의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우연한 것이나 사소한 것이 원인이 되어 누누이 중대한 사건이 발생되는 예는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신적 지배가 크고 작은 모든 사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만 사소한 사건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각 사건이 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 중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비교적 큰데 불과합니다. 역사의 과정은 무한히 복잡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단순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소요리 문답에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규정들은 그의 뜻에 따라 정해진 그의 영원한 목적이니 그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발생할 것은 무엇이든지 작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창조 된 모든 것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 즉 어떤 것은 산나물이 되고, 어떤 것은 미나리가 될 것입니다. 또 어떤 것들은 두견새가 되고 어떤 것은 까마귀가 되고, 어떤 것은 사슴이 되고 어떤 것은 돼지가 될 것을 결정하는 것과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남자 혹은 여자, 부자 혹은 가난한 자, 우둔한 자 혹은 총명한 자, 백인 혹은 유색인, 가인 혹은 아벨과 같이 태어나도록 결정한 것은 가장 위대한 예정입니다. 이렇게 전포괄적인 예정을 사람의 손이나 맹목적인 자연력의 손에 맞기지 않고 다만 천지의 주권적 창조주시오 소유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진흙과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수행해 나가는 하나의 조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나이다.”(롬 8:29,30)

 

  개혁주의 신앙은 참으로 우주의 주권적 지배자이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주요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이다. 칼빈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베이네’는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세상은 모든 사건들 속에서 사람은 높이고 하나님께는 극히 제한된 부분만을 드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예정론을 축소시키거나 왜곡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이 약한 자들은 고리타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혀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은 불신앙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참 성도들은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지 오직 말씀에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일치시켜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행함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이용하여 앞날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대로 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참 성도의 길은 지혜의 근원인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예정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셨는데, 내 안에 도적같이 스며든 악한 영은 오히려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이는 연단이 길어지기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비롯한 모든 천지만물까지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 자가 될 것인가 불순종하여 멸망을 받는 자가 될 것인가를 잘 판단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