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제11장 강해 만나와 메추라기
본 장에는 시내산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에까지 가는 동안 불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다베라 사건, 둘째는 만나에 싫증낸 사건, 셋째는 메추라기 사건입니다.
1-3절은 다베라 사건입니다. 광야 40년 세월은 그야말로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차고, 하나님의 징계와 모세의 중보, 하나님의 용서의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내용의 뚜껑을 여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시내산을 떠나 얼마 되지 않아서 곧바로 백성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징계하셨고, 모세의 중보 기도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멈추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을 원망한 죄인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그곳 지명을 ‘다베라’ 즉 ‘불사름의 곳’이라고 칭하였습니다.
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귀에 악한 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창 38:7; 신 17:2을 보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이런 표현과 비교가 됩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를 여호와께서 직접 살피시듯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가장 악한 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말이겠지요? 본문에서는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우상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애굽의 아피스 신은 이렇게 우리를 고생시키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상을 높인다든지 하는 말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원망’을 했는데, 한두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원망을 하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불과 2년 만에 해방의 기쁨,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원망을 하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곧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불을 일으키시고 진 끝을 불사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불은 구체적으로 어떤 불인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한 불이며, 심판의 도구라는 점입니다. 불신자는 반드시 불에 의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여호와의 맹렬한 심판의 불이 진을 사르기 시작하자 백성들은 즉각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즉시 모세에게 달려가서 이것을 보고하고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불을 거두어 들이셨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깨닫도록 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즉시 모세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신 것입니다.
3.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을 만들어 지명을 붙였습니다. ‘다베라’는 ‘불사름’이라는 뜻입니다. 고전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고라의 사건에도 연결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반드시 이렇게 징계가 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4-9절은 만나에 싫증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출애굽 이후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던(출 16:35) 이스라엘이 싫증을 내어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앞에서 이미 징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또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도 반역을 하며 도리어 애굽의 종살이를 그리워하는 추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4. 이스라엘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섞여 사는 무리들은 출애굽 당시 함께 나온 ‘중다한 잡족’(출 12:38)입니다. 이들은 아무래도 이스라엘과는 달리 신앙도 희박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연대감도 떨어졌을 것입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불평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또 탐욕을 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도한 욕심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의 이러한 탐욕은 이스라엘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울면서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들 이방인들을 교화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한 모습에 도리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울며’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다시 범죄한 상태로 돌아갔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다베라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이방인의 탐욕을 따라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된 성도가 다시 세상 풍속에 얽매인다면 더욱 비참해질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벧후 2:20-22). 주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눅 9:62).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앞절에서‘누가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하고 뒤이어 과거 애굽에서 먹었던 생선, 과일들과 양념류 즉 자극적인 음식을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주식과 곁들어 먹는 반찬류입니다. 이것들은 또한 정력과 관련된 음식이기도 합니다.
6. 이제는 우리의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정력에 해당하는 말은 ‘네페쉬’인데, 이것은 곧 사람의 영혼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는 ‘신체 자체’혹은 ‘육체의 기력’을 의미합니다. 잠언 23:2에서는 ‘탐욕’ 전도서 6:7에서는 ‘식욕’으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즉 정력이 쇠약하다는 말은 광야에서는 분명히 구할 수 없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망을 나타내는 말로 자신들의 식욕과 힘을 돋굴만한 음식을 먹지 못함으로 인한 육체의 허약함과 빈약한 식생활에 대한 염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만나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영양소가 다 들어 있는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제조하신 음식입니다. 이 귀한 것을 먹으면서도 불완전한 식품들을 열거하며 먹고 싶다고 합니다.
만나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진주와 비유하고 있기는 합니다. 또 깟씨와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백성들이 처음에는 만나를 요리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 먹었으나(출 16:15, 16) 나중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해서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만나는 상당히 맛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9.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만나는 이슬과 함께 새벽에 땅에 내려졌고, 이스라이 마른 후에도 땅에 있었다가(출 16:14), 해가 떠오르는 아침녘에 사라졌습니다(출 16:20, 21). 이처럼 기온이 오르면 사라지는 만나가 열을 가하여 요리를 할 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은 만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음식임을 보여줍니다.
10-15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토록 원망하므로 모세는 더 이상 이들을 인도할 수가 없다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10.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
이방인으로부터 시작된 탐욕은 온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급기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울어댔습니다. 이것은 불평을 은밀하게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에 장막 문에서 드러내 놓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한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대규모 저항입니다. 이로 인하여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셨습니다. 모세도 물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11.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이 탄식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모세의 회의를 나타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가장 큰 재물로 여겼다고 평가될 만큼(히 11:25,26) 사명에 투철한 사람이었으나, 계속되는 백성들의 원망으로 인하여 크게 좌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으나, 오히려 그 사명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와 요나가 맡은 사명으로 인하여 오히려 죽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명자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류입니다.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는 많은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롬 8:18). 이것을 기억하고 고난을 극복하여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사명에 대한 회의로 말미암아 모세는 백성들에 대해 무관한 태도를 보입니다. 즉 자신이. 이 백성을 낳지 않았으므로 백성들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또 의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고전 4:15). 신앙의 제자인 디모데나 오네시모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살전 2:7; 모 1:10). 즉 신앙의 지도자는 성도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듯이 보살피고 인도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두 번 계속되는 불평과 원망으로 지쳤을 수도 있습니다.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일단 사명에 대한 회의가 오기 시작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능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잊어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세만은 너무나 잘 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모세가 기적을 일으킨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어디에서 고기를 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세와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들어 쓰일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모세의 불평에 응답하시며 하나님께서는 70 장로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에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모세의 불평은 동역자를 구하는 것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동역자에 대한 요구는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많은 동역자가 있어도 그 백성들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혼자서 어떤 일이든지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내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산다면 주저 말고 단번에 나를 죽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만 깊은 좌절과 고통 속에 빠져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직분자로 세우는 것이지 그를 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엡 3:7,8) 그러므로 모든 직분자는 자신의 직분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직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깊이 새기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처럼 훌륭한 인물이라도 자칫하면 이렇게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조심해서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16-23은 모세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와 약속의 내용입니다. 모세의 탄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모세와 함께 일할 70명의 지도자를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백성들에게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불신앙, 인간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심과 은혜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혜가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인간들은 멸시하고 핍박하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죄에서 벗어나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마음과 몸을 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16.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70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노인과 장로는 둘 다 ‘자캔’이라는 단어로 ‘늙은 자’를 뜻하기도 하고 ‘장로’를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장로는 ‘나이든 자’, 곧 경험이 많은 자들 중에 백성의 대표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유사’는 지휘하다 혹은 감독하다는 뜻으로 ‘지휘관이나 감독관’을 의미합니다. 70인을 모으라고 하셨는데, 7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완전함을 뜻합니다. 70 장로로 하여금 종교적인 일로 모세를 돕고 중재자로서의 그를 지원하기 위함입니다(출 18:21-23; 신 1:9).
17. 내가 강리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신’에 해당하는 단어는 ‘루아흐’라는 것으로 앞에 정관사 ‘하’가 붙으면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들에게 부여하시는 ‘특별한 은사’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31:1; 35:31). 여기에서는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 혹은 ‘힘’과 같은 뜻보다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킵니다. 장로와 유사들 중에서 선택된 70인에게도 모세와 동일한 성령을 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수리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의 통일적인 지휘 체계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와 동일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직분이 있으나 성령은 하나입니다(고전 12:4-31). 많은 지체, 많은 사람은 한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롬 12:4-8; 엡 4:7-13).
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특별한 기사를 행하실 때, 백성들로 하여금 성결케 하도록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옷을 빨로 목욕을 하고 정결케 하였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옷을 씻은 자들입니다(계 7:14; 22:14). 또한 우리는 매일 우리의 죄를 자백함으로써 깨끗케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요일 1:9).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이 말은 말은 선하다, 좋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선한 의미가 아니라 탐욕에 끌려간 것을 말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느낀 것과 같습니다(창 3:6). 또 다윗이 우리야를 볼 때 ‘아름다와 보이는’것도 탐욕에서 나온 것입니다(삼하 11:2).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탐욕스러운 동기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그 때가 재미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도 그것으로 인해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면 안 될 것입니다.
19, 20. 코에 넘쳐서 싫어가기까지 일 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
‘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프’인데, 이 단어는 여호와의 ‘진노’를 말할 때 쓰이는 단어라고 합니다. 그들의 탐욕이 여호와를 심히 진노케 하였으므로(10), 여호와께서 그들의 ‘코’에 질리도록 먹이실 것입니다. 모세는 어디서 고기가 나와서 백성들을 줄 수 있겠느냐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려 1 개월 동안이나 질리도록 먹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지도자 모세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일반 성도는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신 중의 신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여 일 개월 동안 질리도록 먹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할 수 없을만큼(왕상 8:27)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신 것은 그들에게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지만, 그들은 여호와를 멸시하였습니다. 은혜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거절하여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몸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이지만 죄로 이끌려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몸을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드리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글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불경스러웠는지, 울면서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단지 고기가 먹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으니 이 얼마나 악한 민족입니까? 얼마나 더럽고 추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도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1. 모세가 가로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 만 명이온데~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이십 세 이상의 장정이 60만 명이라는 것인데, 이들 모두가 1 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고기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모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양떼와 소떼를 다 잡아도 안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 능력이 없어졌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10대 재앙, 홍해를 가르시는 능력을 잊었는가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은 인간보다 지혜로우시며, 하나님의 약한 것은 사람의 강한 것보다 강하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25).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미칠 수가 없는 측량 불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네가 볼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는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24-30절은 70인의 장로들이 세움을 받는 내용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피택되었지만 회막에 나가지 않은 자에게도 임하셨습니다. 나간 자나 나가지 않은 자에게 모두 성령이 임하였고 장로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모세가 ‘나가서’ 즉 모세는 장막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 담겨있을까요? 모세는 불평하기 위하여 장막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와서 70인을 소집하여 장막에 둘러세웠습니다.
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모세에게 임한 성령이 이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이것은 동일한 성령을 이들에게 부어 신적 권위를 그들에게도 위임하심으로써 모세가 그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그들은 즉각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예언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신적 권위와 위엄을 제공을 받았다는 외적인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어떤 예언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지만, 예언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일을 말했다고만 하면 안 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은 황홀감도 있는 심적 상태에 들어갔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장막에 나오지 않은 두 사람도 그들의 장막에서 예언을 하였는데, 이것을 들은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였습니다. 모세와 모인 장로들 중에는 ‘여호수아’도 있었는데, 여호수아는 그들이 예언하는 것을 금하게 하라고 모세에게 고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29)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신이 모든 백성들에게 임하였으면 좋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여호수아가 금하자고 한 것은 혹시나 모세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약해 질 것을 염려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자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반드시 성령이 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31-35절은 탐욕으로 인한 죽음의 사건이 발생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어 먹게 하시고, 대신 백성들의 탐욕의 대가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31.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저편 곧 진 사방으로~
이것은 메추라기를 몰아 온 바람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서 생겼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메추라기는 떼를 지어 다니는 봄 철새로 아카바 만을 따라 올라가다가 거센 바람을 만나 내륙 깊숙한 곳에 떨어지는 일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남풍’을 불게 하셔서 이스라엘 진위에 무리지어 떨어뜨리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몰아 오셨는지,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이나 되는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메추라기가 왔는데, 메추라기가 있는 곳이 땅에서 두 규빗쯤이니까 어른들이 손을 내밀면 잡을 수 있는 높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메추라기가 땅에서부터 두 규빗의 높이 쌓인 것입니다.
32.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든 자도 십 호멜이라~
고기를 먹고 싶다고 외치며 하나님을 배반하는 그들이 고기를 보았습니다. 어땠을까요? 정신이 나갈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모으는데, 하루 종일 모으고도 욕심이 생겨서 밤새도록 모았습니다. 그래도 또 욕심이 더 생겨서 그 다음 날도 모았더니, 가장 작은 자가 10 호멜이었습니다. 그러면 호멜이라는 단위는 얼마 만큼일까요? 1 호멜은 10에바입니다. 1 에바는 약 22리터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석유통이 20 리터짜리입니다. 그러면 1 호멜은 석유통 약 11개 정도의 부피가 될 것입니다. 10 호멜이니까 110개의 부피입니다.
여러분 고기를 좋아한다면 얼마만큼의 양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많이 먹는 사람이 최고로 먹어야 겨우 1근입니다. 600그램인데, 이 양은 어른 주먹 두 개 정도 부피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많이 먹는다고 치고 하루에 한 통을 먹는다고 해도 100일 동안 먹을 양을 잡았다는 계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탐욕으로 인하여 재앙이 임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33. 고기가 아직 잇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탐욕과 불신으로 하나님을 멸시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시편 78:31을 보면 청년들을 비롯한 다수가 죽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고기가 씹히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재앙으로 치신 것입니다.
34.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하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재앙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사를 지내고 그곳을 ‘기브롯 하다아와’라고 불렀습니다.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탐욕으로 인하여 받은 재앙 사건을 교훈하기 위해 ‘탐욕의 무덤’이라는 지명을 남겨둔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으로 인하여 사망까지 이르게 됨을 교훈하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35. 백성이 기브롯 하다아와에서 진행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기브롯 하다아와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큰 고통과 슬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 원인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죽은 자들을 장사하고 하세롯으로 이동을 하고 머물게 되었습니다.
본 장에서 교훈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성이 죄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헤에 감사할 줄 모르고 도리어 원망과 불평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거듭되는 범죄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례의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소망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인내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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