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2012년 부활주일 설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chukang 2012. 4. 8. 07:29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베드로전서 3:13-22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로서,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사회평론, 등에 걸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경험주의 인식론과 공리주의 윤리학, 그리고 자유주의적 정치경제사상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논리학체계』, 『정치경제학원리』, 『자유론』 등, 전 33권으로 이루어진 전집이 있고, 그밖에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면서 집필한 수많은 보고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인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육신적인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떤 삶이 더 좋아 보입니까? 학식이 많고 정신적인 면을 추수하는 사람은, 돈만 밝히는 사람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돈이 많은 사람 입장에서는 제 아무리 학식이 높다고 해도 돈도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무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연애하는 시절에는 사랑만이 제일 인줄로 알기도 합니다. 나이가 든 중년에서는 사랑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다는 말도 합니다. 이는 모두 각기 제 나름대로의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가끔 우스갯말로 사용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영국의 극작가이면서 비평가인 버나드 쇼와 당대 최고 미녀인 이사도라 덩컨이라고 하는 여배우가 어느 파티장에서 만났습니다. 버나드 쇼는 머리는 천재라고 불릴만큼 비상하였지만 외모는 매우 보기에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대로 여배우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렇지만 머리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파티장에서 만난 이사도라 덩컨은 버나드 쇼에게 ‘당신의 머리와 나의 외모를 닮은 아기가 태어나면 최고일 거예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버나드 쇼는 ‘나의 외모와 당신의 두뇌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하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돈도 많은 정신세계도 건전한 사람이면 참 좋을 것입니다. 머리도 좋고 외모도 아름답다면 또한 좋을 것입니다. 다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런 관점은 세상적인 관점입니다. 성도는 이런 세상적인 관점을 뛰어넘는 또 다른 하나의 다른 관점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신앙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을 행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줌으로써 믿음으로 그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

  선을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삶의 가치관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배만 부르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배도 부르면서 쾌락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사람, 배도 부르고 쾌락도 즐기고 문화적인 생활도 함께 해야 한다는 사람, 조선시대 선비들과 같이 배는 고파도 학문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고, 철학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선행’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인이 선행을 한다고 하였는데 옆에서 보는 사람의 시각으로는 선행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 백만 원을 고아원에 기탁했다고 할 때, 모든 사람들이 그의 행동에 대하여 선행이라고 인정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많은 재산 가운데 겨우 백만 원 내는 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매우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폐지를 주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 백만 원이 있었는데 그 돈을 고아원에 기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가난한 사람의 행동은 선행일까요? 이 또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만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남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 살아.’ 이런 시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을 행한다는 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일반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삶의 가치관에 따라서 선을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착한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한 불량배 집단에서 한 사람이 개과천선하여 새로운 삶을 살려고 그 조직으로부터 나오려고 할 때에, 그 조직은 그를 배신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가 그 조직에서 나오는 것을 환영할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는 이해타산에 따라서 그 처지와 입장이 갈릴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오직 단 한 가지를 가리켜 ‘선’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9:17; 막 10:18; 눅 18:19)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가리켜 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보이신 것이 아버지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셨습니다(요 10:32).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할 때에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일과 관련 되어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딤전 6:12)은 오직 주님을 믿고 섬기는 가운데 이 세상의 주관자인 마귀의 세력과 싸움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을 가리켜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악한 일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가장 악한 일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 12:31)입니다.

  이 선한 일을 하는데 대충 대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다가 말다가 하다가 말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디도서 2:12에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후서 11:2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만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열심히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2. 열심히 선을 행해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착하게 사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저렇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돈도 잘 벌고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느냐?” 그 답이 바로 오늘 14, 17절의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에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0) 즉 주님께서도 의인들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을 일러주시면서, 그러나 그 핍박으로 인하여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행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지만(눅 23:41), 선을 행하고도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 고난이 하나님의 신비로우신 뜻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자신들의 받는 고난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그들은 참으로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악인들이 받는 고난은 수치와 고통이 될 것이지만, 성도의 고난은 영광과 많은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고난이 주님의 고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런 죄와 허물도 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누구를 위함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고난입니다. 그 고난이 보통 고난입니까? 그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손과 발에 못 박히고,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다 흘리신 고난이요, 끝내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고난입니다. 우리도 역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며 또한 그와 같이 고난을 받는 자들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왜 꼭 그렇게 성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하느냐고 또 되풀이 하여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은 선한 일을 함에도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하고, 이런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슬픔을 참게 되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어서 매를 맞을 때에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잘못한 일로 인하여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도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기 위하여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시 37:7; 잠 23:17) 왜냐하면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넓게 보면 인생 자체가 풀과 같이 시들과 말라지는 것이지만, 악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무서운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성도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좋은 성도를 부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3.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이유

  인간이 태초에 지음을 받았을 때에 가진 양심이 선한 양심입니다. 이 선한 양심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이후에 이 양심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에만 교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것은 곧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병든 영혼, 우리의 타락한 영혼에 성령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병들고 타락한 영혼에 한 줄기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 빛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령 세례’라고 부릅니다. 성령 세례는 곧 우리의 악하고 병든 양심을 치료하시어 선한 양심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主)’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외적인 표식이 바로 ‘물세례’입니다.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신령한 구원의 표인 세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은 옛 세계가 그 죄 값으로 물속에서 멸망되었을 대에 구원을 받아 새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또한 주님의 부활하심과 같이 주님과 더불어 다시 살아난 ‘새사람’이 된 표식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었다는 외적인 표식이 바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원은 그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통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세례도 무익한 것입니다(고전 15:12-19). 세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에 대한 외부적인 증거이묘 확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악(원죄)을 씻어 없애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교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구원을 받았다는 표시인 동시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대속 제물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 피로 인하여 우리가 용서를 받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2:1-5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주님의 부활이 구원의 핵심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선하게 되었다는 것은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적인 생각들 죄로 물들어 있는 육신적인 행동들은 여전히 구원받기 전과 동일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제는 새롭게 된 선한 양심으로 인하여 무엇이 죄가 되는지 깨닫게 되었으므로,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값없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것을 좇던 것에서 벗어나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심령으로 변화되도록 성도 스스로가 노력을 해야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 속에서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을 좇아야만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갈 5:16).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향하여 비웃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 왜 예수를 믿니?’ 이렇게 묻습니다.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을 때에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소망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든지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성도 자신을 위할 뿐만 아니라 묻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에 관한 대답은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 합니다. 온유는 비웃은 불신자에게 대할 때에 취해야 할 자세이며,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대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의미합니다.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은 박해와 외부적 압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선한 양심’으로 인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선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되고, 불신자들을 볼 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선한 양심은 우리의 삶과 직결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8,9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를 주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대답해 주어야 할 ‘소망에 관한 이유’입니다. 이 소망을 품고 있는 성도의 선한 양심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되는 줄로 믿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사나 죽으나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