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바로 빌라도이다! 마태복음 27:11-26
이번 주일은 고난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토요일까지 7일간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받으시는 이유와 예수님을 고난을 가한 주모자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만들 주역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들로 3부류가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당시 대제사장들과 헤롯이었습니다. ❶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유대교를 이끌어 가는 대표적인 지식인인 동시에 선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르치던 것은 율법인데,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과 십계명에 들어 있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율법은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이전의 사울이던 시절에 행하던 모습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613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랑과 생명의 법이 아닌, 도리어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하였고, 이 율법들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소위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자신들이 가르치던 율법대로 이들은 율법의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쉐마’ 교육이라고 해서 가르치는 것이 있는데, ‘쉐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고(신 6:4)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즘 가르치고 있는 ‘쉐마 교육’은 예수님께서 계실 때에 유대인들이 지키던 613가지 조항의 율법과 소위 ‘탈무드’라고 하는 교육지침서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못 박는 교육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단어만 ‘쉐마’를 끌어다 사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교육은 행위 위주의 교육으로 '행위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며, 영적인 삶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삶이 잘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왜 저렇게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러움으로, 공부 잘하는 방법, 돈 잘 버는 방법, 출세하는 방법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기독교교육이 절대로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이 쉐마 교육은 율법의 저주로 지옥에 가는 교육임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❷ 제사장 계급인 사두개인들은 오직 정치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오직 형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 제사장들이 되고 말았고, 특히 대제사장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큰 권세를 지키기 위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온갖 음모와 술수를 부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악 중에 가장 큰 죄악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부활을 감추기 위하여 거짓 증인을 만들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 할 때마다 그들을 잡아다 공갈과 협박을 하며, 심지어는 감옥에 가두며, 죽일 음모를 꾸미기도 한 자들입니다.
❸ 또 하나의 막강한 정치적 세력이 있는데, 그는 바로 헤롯왕입니다. 헤롯 왕가는 에돔 족속의 후손(이두매: 에돔의 헬라식 발음)으로 야곱과 에서시절부터 패배자였습니다. 정치를 잘해서 로마로부터 왕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헤롯왕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당시 태어난 모든 어린 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까지도 죽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는 모습을 통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행위의 율법으로 예수님을 대적한 대표적인 자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인 권세를 등에 업고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탐하는 자들이었으며, 헤롯왕은 왕으로서 충실한 로마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 헤롯왕은 항상 서로 물과 기름과 같이 서로 섞이지 못하는 존재였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서로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는 사단이 뒤에서 이들을 조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사단은 이들의 마음을 조종했고, 이들은 사단에게 조종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자신들의 권세와 이익에 눈이 멀어 사단에게 순종하여 결국은 사단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❹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최종 결정권자의 심문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 왕 이 세 무리의 음모를 완성시킨 장본인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전 각본에 따라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하여 이미 사형을 결의했습니다(마 26:66). 하지만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비록 산헤드린 공회라고 할지라도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보내어 합법적인 사형 선고를 받아내려고 하였습니다.(1, 2절)
대제사장으로부터 빌라도에게 이송되신 예수님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 심문을 당하셨습니다(11-14절, 15-26절) 첫 심문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첫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왕’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왕의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마 26:64). 빌라도가 말하는 왕은 정치적인 왕으로써 마치 헤롯이나 로마 황제와 같이 이 세상에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물은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종교적인 문제를 가지고는 로마법에 저촉되지 않으므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고 빌라도에게 고소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첫 질문부터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한 번도 자신이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지만, 실제로 주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며(마 2:2), 인 인류와 우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세주로서의 왕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를 하는데(눅 23:2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그 내용은 ‘반란음모죄’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당연히 사형 언도를 받을만한 죄목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거짓 고소에는 침묵하셨습니다. 이는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의 성취입니다(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도는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포악하고 교활하고 자기 이익 앞에서는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눈을 밝히던 이 로마 총독은 죽음 앞에 초연한 그 모습에 압도를 당한 것입니다. 누가는 빌라도가 일차 심문을 끝낸 후에 아무런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다시 주님을 헤롯에게 보내어 재심을 요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3:6-13).
2차 심문을 시작하면서 빌라도는 명절 때에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를 따라 바라바와 주님 둘 중에 누구를 놓아 줄 것인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아들’인데, 일부 성경 사본에 의하면 ‘예수 바라바’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마태는 ‘예수 바라바’와 확실히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고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바라바는 유명한 반란범으로 소요와 살인죄를 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눅 23:19). 빌라도의 의중에는 주님과 포악한 바라바 둘 중에 양자택일을 하도록 하여 주님을 놓아주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도 무리들이 바라바를 원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합니다.주님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선생으로 인식이 되었으나, 바라바는 살인자였기 때문입니다. 18절에도 보면 빌라도는 이미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인하여 주님이 잡혀 온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정치의 권모술수와 그 이면을 누구보다도 잘 읽을 줄 아는 정치인이므로, 사건의 배경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저의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빌라도의 아내도 재판할 때에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고 전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군중들을 충동질하였습니다. 이는 선동정치를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도 하지 않은 채 끌려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무리들은 바라바를 풀어 달라하고 예수님을 멸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악한 자를 풀어주고 선한 자를 죽이려고 선동하는 것입니다. 기득권에 눈이 어두워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또 다시 둘 중에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군중들은 여전히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를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을 때에,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으니 군중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이에 빌라도는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자신은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군중들도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리어다.’고 합니다. 이에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십자가의 형은 로마가 가장 악독한 죄인에게 가하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런 형벌에 처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형벌을 요청하는 군중들은 선동에 넘어간 자들이었고, 그 배후에는 사악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무리 속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를 외치던(마 21:90)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악은 어리석은 자들 속에 힘 있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군중들에게 강하게 역사하는 악령의 힘은 빌라도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에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중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든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존재는 누구일까요? 물론 당연히 사탄 마귀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전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 헤롯이 마귀의 농간에 놀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어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수난의 최종 결정권자가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아주 특별하게 악한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놓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성격과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세상적인 이기심은 백성들의 외침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고 만 것입니다. 물을 떠오게 하여 손을 씻으면서 자신의 책임을 유대 군중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없어지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이런 빌라도의 이기심을 욕하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사악한 욕심으로 인하여 십자가형을 허락하지 않았나요. 아무리 자신의 죄를 군중들에게 돌린다 한들 자신의 죄가 없어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의 죄는 무려 이 천년 동안이나 사도신경을 통하여 모든 기독교인들로부터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저주는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 죄 값을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말대로 A. D.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멸망을 당하면서 당시 110만 명이라고 하는 엄청난 수가 학살을 당했으면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무려 600만 명이라고 하는 어머 어마 한 백성들이 학살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이제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당시 빌라도와 동일한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불의를 보고도 못 본체하고, 알면서도 행하는 것은 그 어떤 핑계를 댈지라도 그 죄 값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행동을 하는 것, 교인들도 다 따라하고 있는 것 나도 압니다.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따라 동일한 행동을 하는 그 자체가 바로 빌라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을 알면서도 덮어주고, 군중들의 외침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는 그런 죄악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선동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동자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괜찮아! 이 한 마디가 바로 선동입니다. 남을 죄악으로 동참시키는 선동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죄를 지어도 괜찮을까요? 그 죄값을 물로 씻는다고 없어질까요? 내 스스로 다른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한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빌라도와 같이 물에 손을 씻으면서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죄를 짓게 되면 양심에 찔림이 오는데, 이 찔림이 올 때에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성도가 되느냐 교인이 되느냐, 아니면 마귀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느냐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짓지 않을 수 없지만 회개하는 영혼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교회 안에서 마귀 좋아하는 짓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빌라도가 행한 모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 때문에’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넘겨주었다고 핑계를 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고 면죄부를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너 때문에 그랬으니 네가 책임을 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는 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2:4-8을 보면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회개할 줄 모르고,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온갖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묵묵히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는 대속 제물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기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년 6.25 기념 주일: 메롬 물가 (0) | 2012.06.24 |
---|---|
2012년 부활주일 설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0) | 2012.04.08 |
2012년 삼일절 기념 설교 - 잃어버린 자유를 찾아서 (0) | 2012.02.26 |
2012년 설날 가정 예배 (0) | 2012.01.16 |
2012년 신년 예배 -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0) | 2012.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