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2012년 삼일절 기념 설교 - 잃어버린 자유를 찾아서

chukang 2012. 2. 26. 09:12

잃어버린 자유를 찾아서 (요한복음 8:31-59)

 

  을사조약(乙巳條約)19051117일 대한제국 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제국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입니다.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이며, 을사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을사늑약, 을사오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은 제2차 한일 협약(第二次韓日協約, 일본어: 第二次日韓協約)이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 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조약은 1965년 한일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조를 통해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습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습니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합니다.

  그 후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 병합의 방침을 19097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습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에게 병합청원의 시나리오를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송병준은 이에 앞서 19092월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매국흥정을 벌였습니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합병을 역설한 바 있었으나 일본 제국 측의 병합 계획 때문에 일이 늦어지게 되자 직접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등 일본 제국의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한편 이완용은 송병준의 이런 활동을 눈치 채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와 합방문제의 교섭에 나섰습니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제국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아 고마쓰 미도리와 교섭에 나서도록 했습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습니다.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되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라면서 자기 휘하의 내각이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습니다. 이런 시나리오를 연출시키면서 일본 제국은 점차 병합의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판단하여,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내세우고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습니다.

  불려온 대신들 중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이후 이른바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 친일파 대신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습니다. 8명은 한일합방 이후 공을 인정받아 작위를 수여받았습니다. 결국 1910822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되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경술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경술국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한일병탄조약이며, 한일강제병합이었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은 삼일절입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시작되는 독립선언문을 191931일 파고다 공원에서 낭독하며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한 업적 중에 가장 큰 것 3가지를 짚어보면, 첫째 교육기관설립, 둘째 병원 설립, 셋째 미신타파입니다. 기독교 학교를 세워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며, 자유로운 세계를 소망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앞장서서 연락망을 구축하고, 숨어서 태극기를 그렸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에는 서양 귀신을 전파한다고 하였으나, 병원을 세워 병든 자를 치료하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함으로써 불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고, 이로써 믿은 자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미신은 곧 귀신에게 하는 것으로, 나라가 어렵고 흉흉할 때일수록 무속신앙은 더욱 활개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무속인들은 선량한 백성들을 속여 가난한 살림을 더 어렵게 만들고, 허황된 생각이나 무서움을 불어 넣어 올가미를 씌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런 악한 것을 깨닫게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점차 귀신을 멀리하고 주님을 영접하기 시작하였고,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연결이 되었고, 한 개인의 자유만이 아닌 대한제국의 독립으로 민족 전체의 자유를 위하여 만세운동이 불길같이 번져 나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삼일 만세운동은 한 번으로 끝나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날을 시작으로 전국각지로 확산되었고, 해외의 동포들도 참여했습니다. 삼일운동에 참여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총칼 앞에 쓰러지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운동은 191931일부터 1920년까지도 계속 되었고 우리나라 외에도 미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간에 총 피해 집계는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 46.948명 불에 타버린 교회가 47동 민가가 715동 소학교 2동 등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제일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은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집회를 교회와 교역자들이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손병희 열사는 33인중 15명의 천도교인중 한사람이었지만, 그는 재판정에서 삼일운동 참여의 동기를 묻는 판사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우리는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따를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천도교의 주장으로 볼 때 기독교, 불교, 유교의 장점만을 따서 만든 민족종교이기 때문에 손병희 선생이 하나님을 거론한 것은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참고로 33인 중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으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전체 인구의 1.3%에 지나지 않았으며, 천도교인의 십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으며, 천도교는 300만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세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입니다.  그만큼 기독교가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나 한 사람만의 구원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나라 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 함께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종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유는 억압을 당할 때에만 생각이 나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억압하려고 하면 반발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억압을 당하면서도 항거할 수가 없기에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세를 쥔 사람에게 적당히 복종하는 가운데 일부의 자유를 누리며 만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갈망하며 진정한 자유자로서 자기의사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는 어떤 자유를 가지고 있을까요? 또 어떻게 해야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요?

 

1. 착각의 자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복속되어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면 자신의 자유를 빼앗긴 것을 모르기 때문에 순종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빼앗기는 자유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자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유전입니다. 이 유전은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것으로써, 후손들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으며, 다른 민족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유대교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불교, 유교 등 모든 종교가 오랜 세월을 거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이라는 유전을 지키고, 그 유전이야말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내세워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결과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아브라함과는 달리, 하나님의 보내신 그 아들을 믿고 저에게 순종하기는커녕 도리어 저를 대적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나요? 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의 규칙으로 바꾸고, 믿음이 아닌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였습니다. 14:21에서도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말씀은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결코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말씀을 지킬 수가 없고, 지킨다고 하여도 그것은 말씀에 순종이 아닌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하는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그 표시로써 율법을 지키는 위선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손이 되게 하시리라”(3:9)고 하셨으며, 누가복음에서도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44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이미 마귀의 자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마귀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주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며 더 나아가서는 죽이려고 하였고, 종내에는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죄를 짓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자랑을 하고 다닙니다. 자신만은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다닙 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적인 교훈과 유전을 더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없는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을 간증하는 그 말에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간증이 성경에 없는 것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마귀의 유혹임을 깨달아야 할 터인데, 그런 간증을 들은 자신을 뿌듯해 하고 있으니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에서나 듣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나서면 내가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하고 있는지 의심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을 하거나 도덕적으로 더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게 되면 불신자들이 비웃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쇠퇴하고 무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짜 성도들의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빛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스스로 성도라고 하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마귀의 자녀입니다. 자유자가 아니라 마귀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마귀는 괜찮다이렇게 속삭입니다. 다른 성도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어! 괜찮아. 세상 살다보면 다 그런 거지 괜찮아! 어떻게 말씀을 다 지키면서 살 수 있니? 괜찮아!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귀가 계속하여 노예로 부리기 위한 달콤한 유혹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타협의 자유

  요즘 학교에서 일진이라고 하는 아이들의 폭력에 시달려 자살하는 아이들이 자꾸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학교 반장이면서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자살까지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일진들이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그저 자신에게만은 피해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타협의 자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동네에 아주 무서운 깡패가 있는데, 부하를 거느리고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상가에 가서 돈을 요구하면, 상인들은 무서워서 돈을 줍니다. 그리고 그 피해를 피해가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타협의 자유에 속합니다. 북한에서는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면서, 우리나라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무상원조를 적게 해 줘도 공갈 위협을 하고, 실제로 포격을 하여 전쟁의 공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일진, 강패, 북한 등의 공갈, 협박, 폭력이 두려워서 돈을 주고, 그들의 말을 수용하면서 내 자신을 지키는 것은 타협입니다. 이는 비겁한 것입니다. 그렇게 타협하여 자유를 얻었다고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까? 우리 민족이 타협만하는 비겁한 자들이었다면,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타협한 자들은 매국노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타협함으로써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정의로부터 도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유를 지킬 용기가 없기 때문에 타협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온전한 믿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2:21) 하나님께서 변질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변질되는 것은 순수함을 잃는 것입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하는 것은 순순한 믿음이 아니라 불신자와의 타협이요, 불신자와의 타협은 곧 마귀와의 타협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도 여전히 우상과 관계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6)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24:4)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타협은 있을 수 없습니다. 타협은 마귀의 미혹은 받은 것입니다. 타협하는 자들은 미혹을 당하여 이미 그 마음이 주님을 떠난 것입니다.

  미혹당한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하는 교훈은 거룩입니다. 거룩은 곧 분리를 말합니다. 악한 것과의 분리, 물질의 유혹에서의 분리, 우상으로부터의 분리, 타협하는 자들과의 분리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4:4) 타협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임을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3. 진리의 자유

  주님께서 죄의 종이 된 자들에게 자유케 하는 참된 진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진리가 자유를 준다면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학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의 긍지가 아닙니다. 적당한 타협을 통해 안위를 보장받으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실 수 있습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진리를 시대적 진리라고 하지만, 그 시대가 지나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이 되므로 진정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라고 하는 것에는 십자가의 구원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셔야만 했기 때문에 기꺼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자유를 줄 수 있으며, 또한 천국에서만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말씀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되고, 마귀와의 적당한 타협이나 세상과의 타협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도 결코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누구나 다 겪어야 하는 것이지만, 죄의 결과로 인하여 주어지는 지옥이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가리켜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옥의 권세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또 믿음이 연약한 자들, 또 이런 자들을 미혹한 악한 영은 성도들을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기 위하여 온갖 달콤한 말로 속삭이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의 어려움을 주기도 하고, 무서운 폭력으로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성도를 반드시 책임져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적인 복이라고 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함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벗어나서는 받는 물질은 그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무서운 흉기가 될 뿐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육신의 자유를 물리치고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수고와 노력이 있을 때에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주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도록 만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 항상 갈등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육체의 자유와 영혼의 자유의 싸움입니다. 육신의 자유를 좇는 것은 곧 사망이지만, 영혼의 자유를 갈구하는 것은 구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