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신명기 제25장 강해 - 선민의 바람직한 생활을 위한 규례들

chukang 2010. 9. 2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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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제25장 강해 - 선민의 바람직한 생활을 위한 규례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광범위한 여러 분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민으로서의 바람직한 생활 자세를 규정하는 여러 가지 규례를 자유롭게 편집 기록한 내용입니다. 1-3절은 태형(笞刑)에 관한 규례, 4절은 곡식 떠는 소에 관한 규례, 5-10절은 계대 결혼에 대한 규례, 11-12절은 남자의 음낭을 잡은 여자의 처벌 규례, 13-16절은 공정한 도량형에 관한 규례, 17-19절은 아말렉 도말 명령의 회상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재판 시에 있을 두 있는 두 가지의 경우는, 첫째 어떤 사람이 범죄의 혐의를 받고 고소당하였으나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 재판관은 그의 혐의 없음을 공적으로 선포하여 그가 더 이상 사회생활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고소당한 자의 혐의가 사실로 밝혀졌을 때에는 재판관은 반드시 그를 정죄해야 하며 악인을 의롭다고 선포하는 불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잠 17:15).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재판관이 공의롭게 해야 하며 돈에 매수되는 위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필수적입니다.(신 16:19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운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여수히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라.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태형 집행은 일종의 종교적 행위처럼 엄숙하게 진행이 되는데, 먼저 재판정의 수석 재판관은 28:58, 59절과 29:9절의 말씀을 큰 소리로 봉독한 후에 형을 입행하게 했고 마칠 때에는 시편 78:38절의 말씀을 읽었다고 합니다. 매를 때릴 때에는 그 죄의 경중에 맞도록 그 수를 신중하게 헤아려 때리도록 규례가 정해졌습니다.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태형 시 곤장의 수는 최고 40으로 제한하고 그 이상은 넘지 못하게 하였으며 때리는 도구도 보통 나무 막대기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인권과 생명에 관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후대로 가면서 뾰족한 쇠나 고리가 달린 채찍을 사용하여 생명을 위협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왕상 12:11).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종종 심판과 고난의 기간을 뜻하는 상징적인 수로 사용이 됩니다.(창 7:12; 출 24:18; 민 13:25; 마 4:2). 따라서 태형은 범죄자에 대한 마땅한 징계임과 동시에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연단시키려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대 율법 학자들은 40을 초과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한 대를 감한 39대를 때리도록 규정하였습니다(고후 11:24). 40대 이상을 때리는 것은 마치 사람이 동물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에게 그렇게 할 경우 그를 치욕스럽게 만들어 그러한 형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정당한 형벌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이며, 심할 경우 불구자가 되고 평생 조롱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죄인이라도 그의 인권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성경적 교훈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살후 3:15).

 

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이는 곡식을 떨기 위해 수고하는 소에게 충분히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성직자들이 수고한 대로 생계비를 받는 것이 당연함을 말할 때도 사용이 되었습니다(고전 9:9; 딤전 5:17,18). 때로는 곡식 떠는 소를 위해서도 그 생명을 돌보며 긍휼을 베푸는데(잠 12:10),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자존심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에 대한 삯을 정당하게 지불할 것은 물론 인권이 존중되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교훈합니다.

 

5: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여기에서 ‘동거’는 같은 집일수도 있지만, 같은 동네나 지역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창 13:6; 36:7). ‘아들이 없거든’ 여기에서 아들은 반드시 ‘아들’만이 아니라 딸도 되고 후손으로도 해석이 됩니다. 딸만 있어도 상속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민 27:4-7;36:8) 형제가 죽은 후 자식이 없는 경우에는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할지라도 근친상간의 죄(레 18:6-18)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풍습은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오래된 풍습이며, 다른 이방 국가에서와 고구려에서도 이 같은 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계대결혼 혹은 형수취수법이라고 합니다. 룻과 보아스의 결혼이 계대결혼이며 이로 말미암아 다윗 가문이 태어나고(룻 4:17),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까지 이어진 것은(마 1:17), 죽은 형제를 위하여 대를 이를 후사를 낳아 줌으로서 가능하였습니다.

 

6: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계대 결혼에 의해 태어난 첫 아들, 곧 장자는 아비의 기력의 시작(창 49:3)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호적에 기록되어 기업을 상속함으로써 그 가문을 일으키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자손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욕망은 공통적인 것이지만,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자식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개념과 아울러 그 이름이 길이 남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내세적인 소망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 하나이다 할 것이요.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려 할 때에 공적인 제제 조치가 가해졌습니다. 이는 아마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그의 형수 다말을 취한 후에 형의 대를 잇기를 거부하여 고의로 딸에 설정하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사실(창 38:6-10)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율법으로 보입니다.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형의 아내 취하기를 거부할 경우에 성읍 장로들은 그를 법정에 소환하여 먼저 그를 타일러 설득해야 합니다. 이때에 성읍 장로들은 대개 자신의 가문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에 가문 중에서 한 가계의 이름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반드시 설득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설득해도 듣지 않을 경우에는 공적으로 모욕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를 징계하도록 했습니다. 계대 결혼의 규정을 위반하는 것은 형벌이 따르는 것은 아니며 도덕적인 의무이며, 억지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칫 당사자의 진정한 자유를 빼앗고 인격을 손상시킬 위험이 따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억지 결혼의 거부로 인하여 경멸과 수치를 참아낼 수밖에 없으며, 그러나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형제 된 자로서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9: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사람이 신을 신고 땅 위에 서 있다는 것은 곧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뜻합니다(출 3:5). 그래서 누가 신을 벗어 건네준다는 것은 곧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는 상업적인 거래에서 흔히 사용 되었습니다(룻 4:7). 그 죽은 형제의 아내가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긴다는 것은 형제 된 자로서 마땅히 형수를 취하고 그 기업 이를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할 권리를 박탈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맨발 상태가 된 그 사람은 곧 다른 사람의 조소거리가 되어 형제 사랑의 정이 없는 자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굉장한 모욕이요 가문을 더욱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입니다(민 12:14).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맨발 상태의 사람이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되듯이 신 벗기운 자의 집은 불쌍한 가문, 불 볼일 없는 가문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런 자에게는 수치스러운 오명을 붙여 준 것은 그만큼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개인보다 가문 전체를 더 중시했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1, 12: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남편을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 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보지 말지니라.

  곤경에 처한 자기 남편을 구하려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급소를 공격하는 행위에 대해서 엄벌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남자의 인격을 모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이며, 또한 가문을 잇지 못할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가문을 잇는 일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3: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큰 것과 작은 것’(한 돌과 또 한 돌이란 뜻: 에벤 와아벤(אבן ואבן)은 돌로 만든 저울추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건을 팔고 살 때에 무게가 다른 추를 사용하여 부당하게 자신의 이익을 배가시키는 행위를 지적합니다. 물건을 살 때에는 큰 추를 사용하고, 팔 때에는 작은 추를 사용하여 두 배 이상의 부당한 차익을 남기는 것은 불의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14: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곡식을 되로 팔 때 서로 다른 되를 사용하여 부당 이득을 취하는 행위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저울추를 속여서 무게를 많게 하거나 적게 하고, 되를 속여서 부피를 많게 하거나 적게 하는 불의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암 8:5).

 

15: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하리라.

  신명기적 복은 확실히 현세적인 복과 내세적인 복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 하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공정한 경제적 상호 관계가 곧 이웃 사랑이며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점을 감안하며 본문 말씀은 신뢰와 화목이 넘치는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 무릇 이같이 하는 자, 무릇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도덕적으로 부정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정직하게 행하지 않고 부당하게 남을 속이거나 공의를 파괴하는 행위는 신정국가의 시민으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가증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토에바(תעבה)’로 주로 우상숭배나 이방인의 악한 풍습을 가리킬 때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이처럼 정직하지 못하게 행하는 일은 이방인들이 할 짓이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구역질 날 정도로 혐오스러운 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7, 18: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이스라엘이 호렙산 근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아멜렉 족속과 오랜 시간 동안 접전을 벌였는데(출 17:8-16), 그들은 매우 야비하게도 이스라엘이 강하게 맞설 때는 피하였다가 힘이 없어 지쳐 있을 때만 후미를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큰 곤욕을 치러야 했는데, 아말렉 족속은 그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이 같은 수법으로 많이 괴롭혔습니다(삿 3:13; 삼상 30:1). 아말렉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야비한 행동들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아말렉은 가나안의 7 족속에 속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당할 족속으로 지목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완전히 정착했을 때를 ‘안식’을 주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다윗 때에야 비로소 성취되었습니다(삼하 7:1).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한다는 것은 아말렉 족속을 표하거나 기억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파괴시켜서 더 이상 기억조차 하지 않도록 멸망시키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아말렉 일부를 멸하였고, 히스기야 때에 시므온 자손이 피하여 남아 있던 아말렉을 치기도 했습니다(대상 4:43). 그리고 포로 시대 아말렉 자손 하만이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했었으나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지혜로 그 민족이 거의 전멸되었는데(에 3:1; 7:9, 10; 8:11-13), 이로서 아말렉 족속은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