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제21장 강해: 이스라엘의 회개와 베냐민의 회복

chukang 2015. 10. 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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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제21장 강해: 이스라엘의 회개와 베냐민의 회복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으로 인한 이스라엘 총회(Congregation)의 징계 결과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서 사라지게 될 정도의 심각한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총회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베냐민 지파의 회복 대책을 강구함으로써 비록 편법에 의해서지만 베냐민 지파가 유지되고 민족공동체도 회복이 됩니다.

본 장은 사사기 전체의 마지막 장으로,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이 비록 타락 징계 회개 구원 재 타락으로 범죄의 악순환을 계속했지만 하나님은 계속 참으시며 한 번 택하신 백성을 한 지파도 낙오 없이 숱한 배반 속에서도 보존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사 시대 초기의 위기로부터의 일시적 구원과 그 이후 긴 사사 시대 동안 연이어진 타락의 악순환이 결코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주시려고 하는 구원은 아니라는 사실도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사사기는 그 막을 완전히 내리고 있습니다.

 

1-12: 비록 죄악을 응징하기 위한 일이기는 하였지만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간의 싸움은 베냐민 지파를 거의 전멸 상태로 물고 갔습니다. 이에 전쟁을 끝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지나친 행동으로 인해 이스라엘 한 지파가 자신들 가운데서 없어질 위기에 처한 사실을 깨닫고 근심하며 후회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타개책을 찾았지만 이전 미스바 총회 땡의 맹세(20:1, 18)로 인하여 별 묘안을 찾지 못하고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전 총회에서의 맹세대로 그때 미스바 총회에 참여치 않은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징벌하는 일은 잊지 않았습니다.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자기중심적인 열심은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불의를 응징한다는 목적을 지녔지만 인간적인 혈기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잘못된 이해 등으로 인해 전체 언약 동동체를 구성하는 요소인 한 지파를 거의 멸절의 위기로까지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무슨 일에 있어서든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림으로써 인간적 감정과 판단에 사로잡혀 실수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죄악을 묵과하고 방조하는 일 또한 그 죄악에 상응한 대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은 비록 베냐민 지파의 범죄에는 참여치 않았으나 이스라엘 총회에 고의적으로 불참함으로서 베냐민 지파의 죄악을 묵인 방조한 셈이었습니다. 이처럼 죄의 척결에 대해 소극적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적극적인 범죄 행위와 진배없이 다루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죄는 물론 공동체의 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척결 의지를 지녀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지파의 대표들과 함께 저주의 형식으로 총회 석상에서 두 가지를 맹세하였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딸을 아내로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베냐민 지파를 이방으로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전체 초회 때에 총회에 모이지 않은 사람들을 반드시 죽인다는 것입니다. 총회의 이 같은 맹세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성급한 맹세로써 이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의 서약을 했을 때에 이를 지키지 않으면 죽음으로 대신해야 했습니다(17:16-19). 이 같은 맹세는 고대 근동의 국가에서도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여

베냐민의 모든 성읍을 파괴하는 일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목 놓아 크게 울었는데, 이러한 그들의 애통은 4만 명의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지파가 완전히 전멸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모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돌보심을 받았으며 동일하게 야곱과 모세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진다는 것은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는 아픔과 슬픔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지파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의 당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언약 공동체의 본질적인 뜻을 이제야 인식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의 처지를 회개하였습니다.

 

3: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

이스라엘의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것이므로 지파의 존속 여부는 곧 언약의 성취에 기초한 것이므로 지파의 존속 여부는 곧 언약의 성취에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49:28; 24:4; 1:5-15; 4:3, 4). 그러므로 12지파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진다는 것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더 이상 언약의 백성으로 성립될 수가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전멸 위기는 곧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의 위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총회는 미스바에서 성급한 맹세를 하여 언약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언약 공동체 의식을 인식하게 된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전멸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문제 해결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4: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서 거기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서 민족이 처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 받으려는 백성들의 바람은 베냐민 지파의 남은 자인 600명에게 아내를 마련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 총회에 참석치 않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에게서 여자를 데려다가 베냐민 사람들에게 주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5: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는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 위한 이스라엘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 말합니다. 미스바 서약에서는 이들을 전부 죽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브아 비류들을 행위를 옹호한 베냐민 지파처럼 죄악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죽인다는 것은 서약의 신실한 이행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총회의 결정을 새롭게 상기시키는 것은 분명히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데 있습니다.(8-12)) 즉 총회의 결정에 따르지 아니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이 속한 지파의 처녀들을 데려다가 베냐민 백성에게 주려고 한 것입니다.

 

6: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에 대해 호의적 동정심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같은 반성은 베냐민 지파의 죄악을 응징하기 위해서 무자비하게 전멸시킨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죽은 일반 베냐민 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동정심으로 보입니다. ‘끊쳤도다’(가다: גדע)는 나무를 베어 넘기는 것처럼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에서 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그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도망하여 림몬 바위 지대로 피신했던 베냐민 자손 600명입니다. 이들에게 아내를 얻게 해서 후손을 보아야 베냐민 지파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총회에서는 이들에게 딸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어길 때에는 반드시 죽이도록 하였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의 멸절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인과 결혼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은 율법에서 명백히 금하였기 때문입니다(34:16; 7:3).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문제의 귀착점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총회에 참예치 않은 자를 죽이는 것으로 모아지게 된 것입니다.

 

8, 9: 또 가로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에 이르러 총회에 참예치 아니하였으니,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거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요단강 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야베스 길르앗성읍 사람들은 요단 동쪽에 위치한 므낫세 반지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이 베냐민 지파를 공격하기로 한 총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은 것은 아마 그들이 라헬의 자손으로서 베냐민 지파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과 베냐민 지파와의 친밀성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삼상 11:1-15; 31:11-13). 한편 이들이 12,000명의 이스라엘 군사를 물리치지 못하고 진멸당하게 되었던 점으로 보아 야베스 길르앗은 조그만 성읍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백성을 계수할 때에베냐민 지파의 남은 자 600명에게 아내를 주해주기 위해서 고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총회에 참석치 않은 자들을 처벌하기로 한 매세를 기억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참석치 않았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베냐민과의 전쟁에 참가한 백성들을 하나씩 계수하는 것입니다. 조사 결과 요단 강 동편의 야베스 길르앗에서 한 사람도 참석치 않았음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을 죽이기로 하고, 그들의 여자들을 취하여 베냐민 지파의 남은 자들에게 아내로 주기로 하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같은 결정은 같은 동족인 베냐민 지파의 남은 자들을 이방의 여인들과 결혼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7:3) 취해진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 가지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범한 경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총회의 의도는 긍정적이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비정상적인 행위였던 것입니다.

 

10: 회중이 큰 용사 일만 이천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하여 라로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라.

베냐민 지파에게 행한 것과 똑같이 야베스 길르앗의 사람들을 진멸시키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녀와 어린아이까지 죽이도록 명한 사실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정착 전쟁을 상기시킵니다(6:21; 10:20-39; 10:11, 14, 21). 이것은 맹세의 서약을 철저하게 실행하기 위한 것입니다(5). 단지 그들은 베냐민의 전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400명의 처녀만 남겨 두었습니다.

 

11: 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모든 남자와 그리고 남자와 함께 누워서 남자를 알게 된 여자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즉 처녀가 아닌 기혼녀는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단지 베냐민 지파에게 아내로 줄 처녀 밖에 없었습니다. ‘진멸’(하람: הרם)성별하다’ ‘봉헌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어떤 것을 파괴하는데 헌신하여 철저히 파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27:29). 이같이 야베스 길르앗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징벌은 마치 이전에 미디안 사람들을 진멸한 것처럼 잔인한 행위였습니다(31:17). 하지만 이스라엘의 행동이 잔인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맹세 아래서 엄숙한 헌신의 의미로 행해진 행동이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2: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인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자지 아니하여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 오니라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

(마하네:מחנה)’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진영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연합군의 진영이 곧 성막이 있는 실로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중앙 성소가 있는 실로가 이스라엘의 본부가 되는 것은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나오는 장소로서 온 회중이 다 모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실로는 르보나의 서쪽 약 5km 지점에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야베스 길르앗이 요단 동편에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성막이 있는 실로는 요단 서편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3-25: 자신들의 과도한 행위로 말미암아 멸절의 위기에 처한 베냐민 지파를 보존하기 위해 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의 과오를 개달은 백성들은 림몬 바위 근처에 피신한 베냐민 지파의 생존자들에게 평화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야베스 길르앗을 응징할 때 사로잡은 400명의 처녀를 그들에게 주어 후사를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의 생존자에 비해 야베스 길르앗의 처녀가 약 200여 명이 모자랐으니 이스라엘 장로들은 또 다른 방책을 세우게 되는데, 여호와의 절기에 춤추러 나오는 실로의 처녀들을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납치하여 아내로 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베냐민 지파는 멸절되지 않고 그 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두 가지의 큰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법이 깨뜨려진 곳에는 그것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기까지 계속해서 부조화와 불합리가 있게 되며 그에 따른 비극적인 상태 역시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즉 레위인의 개인적인 범죄는 베냐민 지파의 추악한 범죄를 유발했고, 그것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내전과 길르앗 거민의 살상,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납치 극으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바로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류가 걸어 온 전형적 삶의 모습입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불합리함을 해결해 보고자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러므로 인해 더 큰 불합리를 초래해 왔던 것입니다.(7;14-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사 친히 이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계획하셨으니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입니다.(1:17; 고전 1:18, 30; 2:7)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류의 죄와 부조화, 그리고 불합리함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9:22)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필연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본서의 최종 결론,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5)입니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에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자가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미 사사기 19:1-15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같은 말이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이 말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참 통치자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사 시대 당시 이스라엘은 비록 인간이 세운 왕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왕이 되어 그들을 통치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저버리고 자기 소견대로 행함으로써 마치 왕이 없는 자들과 같이 행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죄 한 백성을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고 저들이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마다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은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성경 전체를 흐르는 중심 주제이며 사상이기도 합니다(1:18; 3:23; 벧후 3:9). 그러므로 오늘날 동일한 사랑과 은혜를 입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보답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림몬 바위에 숨어있던 베냐민의 남은 자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를 선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약자인 베냐민에게 먼저 평화를 제의한 것입니다. 이는 완전한 언약의 참여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공식선언으로서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임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14: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인 중에서 살려둔 여자를 그들에게 주었으나 오히려 부족하므로

베냐민의 남은 자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었던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가족이라고는 한 사람도 있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로잡아 온 야베스 길르앗 여인들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200명의 아내가 부족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은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게 됩니다.

 

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궐이 나게 하셨음이더라.

뉘우치다’(나함: נחם)한숨 쉬다란 뜻 외에 동정하다’ ‘위로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후회한다는 뜻보다는 단순히 전쟁의 상처로 고통 받는 남은 자들을 동정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소멸될 위기까지 당했던 베냐민 지파를 이제 적대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호의적으로 대우하게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궐이 나게 하셨음이더라.’에서 (페레츠: פרץ)’갈라진 틈도는 분열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틈이 생기도록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베냐민 지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상처이고 쓰라린 아픔의 기억입니다.

 

16: 회중 장로들이 가로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

회중 장로들이이스라엘이 당면한 베냐민 지파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야베스 길르앗의 400명의 처녀는 베냐민의 종족보전을 위해 주어졌으나 아직도 200명의 아내가 없는 자들 때문에 회중 장로들은 또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아내를 얻게 할꼬이스라엘 자손은 자급적이면 같은 지파의 사람과 결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 모두가 각기 자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36:7-9). 그런데 베냐민 지파의 현 상황은 연인이 모두 죽고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지파의 여인을 데려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회중 장로들은 최후의 방법으로 실로에서 여인을 납치하도록 베냐민 지파에게 통고하였습니다.

 

17: 또 가로되 베냐민의 도망하여 면한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기업(예루솨: ירשׁה)’로 세습되어질 산업또는 소유를 뜻하나 여기서는 계승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즉 베냐민의 남은 자들의 뒤를 이어 지파를 이어갈 후손이 있어야만 그들이 기업을 계속해서 상속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기업을 이어갈 후사를 위해 반드시 아내가 있어야만 된다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만일 여인이 없어서 후손을 잇지 못하면 그들의 기업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1절의 맹세가 여기서 반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성급한 맹세로 인하여 두 번식이나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성급한 맹세의 폐단이 얼마나 심각한 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편, 여기서 맹세의 서약을 지키지 않으면 곧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된다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의식을 다시 보게 됩니다(삼상 14:28).

 

19: 또 가로되 보라 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편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다 하고

르보나는 실로에서 북쪽으로 약 4.6km 정도 떨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세겜으로 가는 큰 도로 곁에 있었다고 합니다. 실로의 위치에 대한 묘사는 매우 정확합니다. 그런데 실로의 지리적 위치를 왜 구체적으로 묘사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성막이 예루살렘으로 옮겨져서 실로가 벽촌으로 퇴조했었던 시기에 살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합니다. ‘여호와의 절기실로에서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었다는, 이것이 어떤 절기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에 다르지만, 베냐민 사람들이 춤추러 나온 여인들을 쉽게 납치할 수 있었고 자기 성읍으로 아무 일 없이 돌아온 것을 볼 때 이는 밤에 행해졌던 절기로 추측됩니다(21:16; 24:7).

 

20: 베냐민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가서 포도원에 숨어당시 팔레스틴은 올리브와 포도나무의 주산지로 유명했습니다. 더욱이 팔레스틴의 포도나무 잎사귀는 특별히 컸으며, 포도재배가 대규모로 행해졌다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1:8; 8:11, 12 참고).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200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포도원에 숨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유대인 처녀들이 춤을 출 수 있었던 유일한 절기는 장막절이라고 합니다(Pulpit Commentary). 또한 장막절은 포도 열매를 수확한 뒤에 일주일 동안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16:13).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당시 세겜에서 베냐민 땅에 이르는 큰 길이 실로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이 같이 도주하는 일은 용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실로 여인을 납치하도록 요청한 이스라엘 장로들과 실로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미리 타협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22: 만일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쟁론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어느 누구도, 베냐민 자손에게 딸을 내어주지 않기로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가 실로 여인들을 납치하여 아내로 삼는다면 회중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자신들이 친히 나서서 사태를 무마하겠다는 것이 곧 장로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그러한 때 장로들이 어떠한 말로 백성들을 설득하려 하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실로 여인들이 춤추러 나왔다가 베냐민 자손들에게 납치당한 사태를 그냥 묵인하자는 의미입니다. 납치를 당한 딸들의 아비와 형제들에게 대한 첫 번째 변명으로 베냐민 지파를 이스라엘 공동체에 다시 복귀시킴에 있어서 그들의 아내를 완전히 마련해주지 못한 책임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딸을 베냐민 자손에게 주는 것은 일말의 책임을 감당하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변명은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로 실로인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딸들을 내어준 것이 아니라 베냐민 지파가 강제적으로 빼앗아 갔기 때문에 그들 실로 사람들에게는 1절의 맹세에 대해서 아무런 죄도 없고, 또한 미스바의 성약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설득입니다. 이러한 변명이 후에 실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베냐민 자손들에게는 실로의 여인들을 납치하는 데 있어서 그럴 듯한 명분이 되었습니다.

 

23: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니라

베냐민 자손은 200여명의 아내를 납치해 갔습니다. 이것은 기업을 잇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으며 남은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읍을 다시 세우고 보수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이스라엘 공동체로 회복되었으며 기업을 후손들에게 상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곧 각각 그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가 각기 자기 지파의 기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상비군이 아니었으므로, 소명 받은 일이 끝나자 모두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고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베냐민 지파와 관련된 모든 일이 끝이 났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소명을 위해 열심히 싸운 것처럼 가정을 위해 봉사하는 일입니다. 이렇듯 이제까지의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으나 동족상잔이라는 전쟁의 상처는 이스라엘 역사의 비운으로 그 흔적이 남게 되고 말았습니다.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에 나타난 혼란의 원인을 재차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저자는 사사 시대가 왕정 시대 전() 단계로서 도덕적, 정치적 무정부 상태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이스라엘의 왕이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각기 스스로가 왕 노릇을 하려 했으며, 이로 인해 끊임없이 혼란이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각각 그 손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은 당시의 비참한 혼돈 상태를 표현해 줍니다. 이처럼 사사 시대의 혼란의 상황과 원인을 재차 기록한 또 다른 이유는 본서가 기록될 다시에는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정 시대가 새롭게 시작된 점을 깨우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기브아 비류들을 정죄하고 신앙공동체를 회복했지만 그것은 매우 연약한 결집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정치, 종교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위가 있어야 했습니다(17:1,6). 그리하여 그 결과 이제 갓 세워진 왕정 제도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사사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