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 제2장 강해: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룻

chukang 2015. 11. 8.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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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제2장 강해: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룻

 

본 장에서 찾아야 하는 요점은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전개해 나가는 도구로 쓰실 인간을 택하시는 하나의 원리입니다. 룻은 구약 이스라엘의 선민적 특권이 극히 중요시 되던 시기에 이방인 출신이며 여자이며 초라한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하나님을 택하는 신앙 결단을 할 때에, 인간적으로 아무런 볼품없는 그녀를 더욱 더 크게 택하셨습니다. 또한 그녀가 이번에는 그녀의 모든 구속사적 복의 원친이 되는 보아스를 만난 것은 그녀의 시어미늘 위하여 봉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의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신앙적 사랑과 충성을 보일 때 그를 들어 크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룻만이 아니라 일꾼들에게 적용이 되는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절: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이 보아스와 만나게 됩니다. 룻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하는 복을 누리기 위해 나오미를 따랐지만 빈궁한 삶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코 후회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당해 공경하였습니다. 그런 효성과 열심은 이삭줍기와 같은 비천한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줍기에 나선 룻은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속에서 엘리멜렉의 친족이었던 보아스와 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이삭을 줍기 위해 밭으로 간 것이며 보아스의 밭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은 하나님의 면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 우연히 발생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처한 삶 가운데서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친족(모다: מידע)’는 ‘잘 알고 있는’ ‘친근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욥 19:14; 시 55:13; 88:8, 18) 미개방적인 사회에서 이처럼 밀접한 사람은 대개 일가에 속했는데 특히 히브리 사회에서 이 말은 기업을 무를 의무가 있는 친척입니다. ‘유력한 자’(이쉬 깁보르 하일: חיל גבור אישׁ )는 일반적으로 힘세고 용감한 장수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수 1:14; 삿 6:12). 그렇지만 간혹 재능이나 능력이 있고 부유한 자(룻 3:11)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보아스(בעז)’라는 이름의 어근은 히브리어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추론하여 ‘유복함’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어느 곳에서든 추수하는 밭에 나가면 추수 때 떨어진 이삭을 주울 수 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의 생계를 돕기 위하여 추수할 때 일부러 곡식 단을 조금 남겨 두기까지 합니다. 이는 약자를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규정해 놓으셨습니다(레 19:9, 10). 따라서 여호와 신앙에로 귀의한 룻(룻 1:16)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당장 생계가 곤란한 룻은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 오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시어머니를 공양하려는 룻의 애틋한 노력과 자기희생적인 태도입니다. ‘뉘게 은혜를 입으면’ 모세 율법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약자 보호 규례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삿 21:25). 더욱이 가난한 이들은 율법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이삭 줍는 일을 금지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압 여인 룻이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그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방 여인으로는 누군가의 특별한 호의를 입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밭으로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시리라고 기대한 믿음의 행위기도 하지만, 당시 룻과 나오미가 처한 생활이 얼마나 궁핍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당시 추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꾼들은 주로 남자들이(본문에서는 소년들로 불립니다.) 낫으로 곡식을 베어 놓으면 그 뒤를 따르던 여자들(본문에서는 소녀들로 불립니다.)이 곡식을 한 아름씩 모아서 묶고, 그 뒤를 특별히 허락받은(룻 2:2) 사람들이 따르면서 땅에 흩어진 이삭을 주울 수 있었습니다. 후대 유대인들이 규정한 이삭줍기에 관한 규칙들 가운데 한 조항을 살펴보면, 일꾼이 곡식을 벨 때 미처 한 두 줄기를 다 베지 못하고 지나치면 그것은 이삭 줍는 자들이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 줄기 이상이면 이삭 줍는 자들이 차지할 수 없고 지주에게로 돌려져야 했다고 합니다. 룻은 특정한 밭에 가려고 결정하지는 않았으나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입장에서는 우연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미리 예정하신 일이었습니다.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아스와 그의 일꾼들이 인사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사말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 주로 하는 인사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전인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이렇게 자상한 인사말을 건넸다는 것은 보아스의 고매한 인격을 잘 나타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사가 기드온에게 전한 인사말도 이와 동일하였습니다(삿 6:12)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사화(나아르: נער)는 ‘심부름꾼’, ‘젊은 시종’을 의미합니다. 이는 ‘노예’ 또는 ‘종’을 뜻하는 ‘에베드(עבד)’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아르’는 ‘에베드’와 달리 대개 가정을 갖고 있으면 ‘에베드’를 지휘, 통솔, 관장하는 책임을 떠맡기도 합니다(삼하 9:8; 16:4, 19, 29). ‘소녀(알마: עלמה)’는 비단 처녀뿐만 아니라(사 7;14), 젊은 여자(잠 30:19)까지도 의미하는 폭넓은 단어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는 나이 많은 보아스가 젊은 여자 룻을 가리켜 부른 말입니다. 보아스의 눈에 룻이 쉽게 구별된 것은 단순한 외모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외모 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압 백성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바로 룻의 고상한 기룸과 몸가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남보다 더 부지런히 일에 열중하는 모습(룻 2:7)도 눈에 띄인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봅니다.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보아스의 질문을 받은 사환이 이처럼 즉각적으로 룻에 관해 답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룻에 관한 이야기는 성 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효성과 그녀의 정숙한 행실과 여호와 신앙 등 뭇사람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단 사이에서’ 단 중에서 줍도록 하는 것은 주인의 특별한 허락 외에는(8, 9, 15절) 불가능한 것이므로, 더구나 이방 여인인 룻의 신분에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주운 것들을 다발로 묶게 하소서’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잠시 집에서 쉰 외에’ ‘그녀가 움막에 잠깐 쉬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일꾼들을 위해 밭 주변에 임시로 설치한 오두막과 같은 편의 시설에서 쉬었다는 뜻입니다. 그 후에는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8-16절: 시모를 봉향하기 위해 이삭을 줍는 룻에게 보아스가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룻의 시모에 대한 효행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보아스는 룻에게 볏단을 묶는 여인들의 옆에서 이삭을 줍게 하는가 하면, 길어 온 물을 먹을 수 있게 하였으며, 또 먹을 것을 풍족히 주는 등 온갖 호의를 다 베풀었습니다. 룻은 자신의 처지와 신분에 비해 베풀어지는 크나큰 친절에 놀라며 보아스의 호의에 감사했습니다. 본문에서 교훈하는 것은 첫째 말씀을 준행하는 신앙 자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율법의 최소규정(신 24:19-22)을 충실히 준행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넘어 보다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한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풀이해 그들 스스로 말씀의 올무에 빠져버렸던 바리새인들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약 1:27; 요일 4:20,21). 성도들은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그 말씀의 이면에 담긴 뜻까지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룻의 감사할 줄 아는 자세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호의를 당연한 것인 것처럼 누리지 않고 자신이 그런 은혜를 입기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방 여인임을 인식하면서 겸손과 감사함으로 보아스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성도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요 3:16)를 입은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자신의 의를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의를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엡 2:8, 9).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년들과 함께 있으라.

‘내 딸아(빗티: בתי)’는 자기 딸을 부를 때뿐만 아니라 지체 높은 어른이 손아래 여인에게 이야기를 건넬 때에나,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여인을 부를 때에도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나오미의 며느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룻 2:6) 자신의 신분에 비추어 볼 때 ‘내 딸아’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호칭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룻의 태도가 마음이 든 룻은 다른 지주들의 밭을 전전하지 않아도 일용할 양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녀들’이란 추수하는 자들의 뒤를 따르면서 그것을 모아 단으로 묶는 일을 하던 여자 일꾼들입니다. 보아스는 룻으로 하여금 바로 그 여인들의 뒤를 따르면서 곡식단 중에서 떨어뜨린 것들을 줍게 허용해 주었습니다.

9: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그들을 따르라’ 이는 남자 일꾼들의 뒤에서 곡식 단을 묶는 여자 일꾼들의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당시 밭과 밭 사이에는 울타리가 없었으므로 룻이 부주의하여 다른 사람의 밭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의 뒤를 바짝 따르라는 경고로 보는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룻은 처음에는 곡식 단 외곽 지대에서만 이삭 줍는 것이 가능했었는데, 이제는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 가능하도록 배려를 받은 것입니다.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당시 룻은 이방 여인으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들판에서 눈치를 보면서 이삭을 줍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꾼들은 각지에서 몰려왔고, 그중에는 난폭한 사람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집을 떠난 외떨어진 들판이기 때문에 룻은 신변에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 줍는 것을 이유로 폭행을 당하거나 심한 욕설도 당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때 보아스의 배려는 그녀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쉽게 물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성읍 우물에서 물을 충분히 준비해 와야 하는데 급하게 나온 룻으로서는 미리 물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소년들이 물을 길어온 우물은 ‘성문 가’에 있는 우물, 즉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 중 마시기를 원했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삼하 23:14, 15; 대상 11:17, 18)이 분명하다고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10: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런 행위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대개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순종, 존경, 감사를 표현하는 표시입니다. 특이한 경우 외에는 주로 왕과 하나님 앞에서만 행하던 것입니다(수 7:6; 삼하 14:4). 그런데 룻은 이방인인 자신이 보아스로부터 분에 넘치는 호의를 입게 되자 감격하여 이처럼 최상의 감사를 표하였던 것입니다.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이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룻이 부모와 고국을 떠나 나오미와 함께 바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인 베들레헴으로 귀향한 것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본문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이방 교회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보아스는 룻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룻의 미담은 그만큼 베들레헴 성읍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밭에서 일하는 룻을 지켜보면서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고 했는데, 이는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을 사환의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사실로 확인하였음을 의미합니다.

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가 룻의 착한 행실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여호와께서 보응해 주실 것을 축복한 본절은 나오미가 자신의 자부들에게 기원한 복복(룻 1:8)과 유사합니다.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신 32:11에서 인용된 상징적 표현입니다. 신명기에서 여호와는 날개를 펼쳐 어린 새끼들을 품은 독수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이 스랍들의 펼친 날개에 의하여 덮인 긍휼의 보좌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도 주장합니다(시 36:8; 57:2; 91:4). 아무튼 보아스가 룻에게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룻이 여호와를 자신의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그녀가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온전한 상주시기를’ ‘카이(Keil)’은 본절을 ‘여호와의 보상을 완전하게 하옵시며’로 번역하고 있는데, 룻이 행한 만큼 충분히 보상 받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13: 룻이 가로되 내 주어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룻이 보아스가 계속해서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는 견해(Pulpit Commentary) 둘째 이미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고 룻이 감사를 표현 것으로 보는 견해(Speaker Commentary) 이 중 어느 견해를 취해도 별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실제로 당시 룻이 처해 있던 경제적 형편은 보아스의 시녀의 형편만도 못했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녀가 보아스의 시녀 중 하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상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절은 룻이 단순히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과소평가한 것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친절에 감사하여 최대한 자신을 낮춤으로써 보아스를 높이고자 하엿을 것입니다. ‘위로하시고’ 고향을 떠나 많은 고난 속에 외롭게 살고 있는 룻에게 보아스의 위로와 따뜻한 말은 정녕 큰 힘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떡(레헴: לחם)은 밀가루나 쌀가루로 만든 떡은 농부들의 보편적인 음식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 기호에 따라 누룩을 넣기도 하고, 넣지 않기도 합니다. ‘초(호메츠: חמץ)’는 신포도주를 기름과 섞어서 만드는 시원하고 상큼한 음료를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도 근동 지역에서 애용되고 있는데, 로마 군인들이 즐겼던 ‘포스카’와도 흡사하다고 합니다. 고대 랍비들의 성경 주석인 미드라쉬(Midrash)sms 이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메시야의 징계와 고난을 상징하는 것(막 15:36)으로 보기도 합니다. ‘볶은 곡식’ 떡과 함께 서민들에게 애용되던 주식입니다. 밀 이삭이 완전히 여물지 않았을 때 좋은 이삭만을 골라 냄비나 철판에 볶아서 만듭니다(레 2:14). 이것을 씹을 때는 우유 빛 밀의 상큼한 맛과 신선한 껍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룻은 받은 음식을 먹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담아 시모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보아스는 이미 앞에서 소년들에게 룻에 대해서 잘 대해 줄 것을 명령했었습니다. 그러나 룻으로 하여금 더 큰 안도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룻이 있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소년들에게 명령하는 자상함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단 사이(between the sheaves)’는 7절에서와 달라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곳은 곡식 단들을 세워 놓은 곳입니다. 또한 이곳은 소녀들이 곡식을 한 아름씩 안아 단으로 묶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자연히 이삭들이 많이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서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추수가 끝난 밭에서 줍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이 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정직한 자들은 아무도 모르게 곡식 단에서 조금씩 몰래 빼 갈 수도 있는 곳이기도 할 것입니다. 보아스는 바로 그런 곳에서 룻이 이삭을 줍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16: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하니라.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본래 ‘줌’이란 ‘주먹으로 쥘 만한 분량’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팔에 안고 있는 고식입니다. 그것은 아직 단으로 묶기 이전의 상태입니다. ‘뽑아 버리라’는 말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떼어 내어서’라는 뜻입니다. 너무 깨끗이 거두어들이지 말고 자연스럽게 빠뜨린 것처럼 조금씩 남겨두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보아스의 명령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한 모세의 율법 규정(레 19:9; 10; 23:22)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꾸짖지 말라’ 즉 그녀에게 꾸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룻이 주은 이삭을 많게 하면서도 그 이삭들은 다만 그녀가 열심히 일한 결과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보아스가 세심하게 배려하였습니다.

17-23절: 룻은 그날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하여 시모 나오미에게 말했습니다. 주운 이삭과, 보아스로부터 받은 호의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가문의 기업을 무를 자임을 말하면서 룻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지시했습니다. 즉 룻과 보아스라는 단순한 두 사람의 만남이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란 언급을 통해 보다 발전적 관계로 전개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측할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추측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택한 백성을 위해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주은 것을 떠니’ 고대에는 곡식을 떨기 위해 편편한 바닥이나 깔개 위해 이삭을 올려놓고 적당한 막대기나 도리깨 또는 매끄러운 돌로 두드려 낱알을 모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한 에바’ 에바는 구약 시대 부피 단위로 현대 측량법으로 대략 22리터, 12되 정도의 분량입니다. 에바보다 작은 단위로는 오멜이 있는데, 한 에바는 열 오멜에 해당합니다.(출 16:36). 한 오멜은 한 사람의 하루 식량에 해당하므로, 한 에바는 열 사람의 하루 식량입니다. 그러므로 룻이 하루 동안 주은 이삭은 상당히 많은 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시모에게 드리매

룻은 보아스로부터 대접 받은 볶은 곡식을 혼자만 먹지 않고(14절) 집에 홀로 남아 있는 시모를 위해 남겨 가지고 왔습니다. 이처럼 작은 일에 있어서도 신경을 쓰며 극진히 나오미를 섬기는 룻의 효행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19: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잇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이방인 며느리를 밭에 내보낸 시모로서는 마음이 상당히 아팠을 것이며 걱정도 많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더구나 생각지도 않게 많은 양의 곡식과 음식을 가져온 며느리에 대해 궁금증이 더했을 것입니다.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많은 양의 곡식과 음식을 본 나오미는 즉각적으로 며느리가 특별한 은혜를 입었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하여 룻을 선대한 자에게 복이 임하도록 진정으로 기원한 것입니다. 이는 받은바 은혜를 아는 겸손한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룻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보아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사람이 ‘보아스’라고 룻에게 알려준 사람이 없음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즉 보아스도 역시 성내에서는 그만큼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생존한 자’는 나오미와 룻을 ‘사망한 자’는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 말룐과 기룐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을 때에도 호의를 베풀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아스가 이제는 과부가 된 나오미와 룻에게 또 다시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이름이 나오자 그에 대해 칭송을 하며 그가 생존한 자(룻과 자신)와 죽은 자(엘리멜렉과 두 아들)에게 베푼 친절에 대해 여호와께서 넘치게 갚아 주시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 여기에서 기업 무를 자(고엘: גאל)란 이전에 나오미의 소유였던 토지들을 되찾아 줄 권리와 그녀와 자부의 소유로 여태껏 남아 있는 땅이 있을 경우, 그 매입의 우선권을 가진 근족을 가리킵니다.

21: 모압 여인 룻이 가로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 추수뿐만 아니라 곧 이어지는 밀 추수가 끝날 때까지 항상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하였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대개 3, 4월경에 보리 추수를 하고 5, 6월경에 밀 추수를 합니다.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종전에 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일꾼들 뒤를 따라다니며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주으라는 것입니다. ‘소년들(네아림: נערים)’은 8절의 ‘소녀들’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즉 본 절은 룻이 일하는 소녀들과 떨어져 소년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소년들의 뒤를 따르는 소녀들 속에 계속 있으라는 말입니다.

22: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나오미가 이처럼 룻에게 보아스의 밭에 머무르라고 조언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보아스의 호의로 안심하고 이삭을 주울 수 있기 때문이며 둘째 현재 보아스가 자기 가문의 기업 무를 자로 가장 유력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보아스의 태도에서 그가 기업 무를 자기 의무를 이행할 마음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룻이 계속해서 보아스와 상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으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21절의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는 보아스의 호의대로 룻은 일꾼들 뒤를 바짝 따르며 이삭을 주웠습니다. 21절의 ‘소년들’이나 본 절의 ‘소녀들’은 모두 일꾼들을 의미합니다. ‘보리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룻은 보리 추수뿐만 아니라 밀 추수 때까지 계속해서 보아스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아마도 보아스는 이 오랜 기간 동안 룻의 성실함과 겸손함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이삭 줍는 미모의 여인 룻과 보아스 간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점차적으로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는 단계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나오미에 대한 룻의 변함없는 효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룻의 흠 없는 순결과 꾸밈없는 소박함과 시모에 대한 다함이 없는 헌신과 사랑을 보여주고 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