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나를 더 사랑하느냐

chukang 2011. 1. 9. 12:09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hwp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9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요? 그 답은 “죽기까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사랑하고 계시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십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내용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귀로 들어 단순한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을 주고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나는 저를 많이 사랑하는데 저는 나를 그냥 보통으로 대하고 있구나! 저 사람이 나를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많이 사랑하고 있구나! 혹은 나를 미워하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게 되어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서로 사랑하는지 좋아하는지 미워하는지 그저 그렇게 생각하는지 완전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짐작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처음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고 질문을 할 때에는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알고 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하고 질문하시고, 베드로의 마음을 확인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귀한 사명을 맡기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3차례에 걸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몰라서 질문을 하신 것을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마음을 알도록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과연 나는 주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내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 과연 어떤 일을 했을까? 이런 생각들이 주님의 질문을 받을 때에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 첫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무덤으로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고, 그 다음 번에는 문을 잠그고 도마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모여 있던 방 안에 찾아오셨습니다. 또 그 다음 번에는 도마를 포함한 11제자가 모여 있는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후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함께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에 찾아오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물을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곧 요한이,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고 “주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느라 힘들고 더웠는지 옷을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즉시 겉옷을 걸쳐 입고는 바다로 뛰어들어 주님께서 계신 곳으로 헤엄쳐 나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에 그물을 끌어올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숯불을 피우고 그 위에 생선을 굽고 계셨고, 떡도 있었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지친 제자들을 위하여 숯불을 피워 따뜻한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했던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베드로가 행한 것을 보면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할 일 다 하고 배를 타고 주님께 왔지만,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즉시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주님께로 올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말씀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이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큰 물고기가 153마리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났고, 한 가지 더 나타난 기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경우 당연히 그물이 찢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주시고 그 기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또 다른 기적까지 만들어 주시는 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이때에 잡은 물고기는 헬라어로 “ἰχθύ?”입니다. 비록 우연의 일치이기는 하지만, 이 단어를 풀어서 한 글자씩 각각 첫 자로 하면,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르”(Ἰεσύ? χρίστος θεὀς ὑίος)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모양을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호로 삼았던 것입니다.

  잠시 여담으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모나미 볼펜. 다 알고 계시죠. 이 아래 위로는 까만 것으로 몸통은 하얗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 "Monami 153" 이렇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모나미는 불어로 “Mon"는 ‘나의’ ami는 ‘친구’라는 뜻으로 ”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당시 ‘광신화학’의 사장인 이 볼펜을 한국 최초로 만들고,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손석삼씨는 기도하는 가운데 ‘153’이라는 이 말씀을 떠올리고 볼펜 이름을 ‘모나미 153’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은 9라는 숫자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다 합하면 9이 됩니다. 그리고 이 볼 펜은 1963년 15원에 팔렸고, 3은 광신화학에서 만든 3번째 제품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후에 회사이름을 ‘모나미’로 바꾸고 오늘날 문구업계 1위가 되었습니다.

 

  뭍으로 올라온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조반을 손수 지어서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뜨거운 감사가 넘쳤겠습니까? 그리고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것이 첫 번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도 역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요한은 베드로를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공식적인 이름이 베드로였던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보셨을 때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 게바란 ‘반석’이라는 뜻의 아람어로서 그것의 헬라어 표기가 바로 ‘베드로(Πέτρος)’입니다.

  베드로는 그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께서 부르시던 이름 그대로 제자들의 대표격으로 활동해 왔지만,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세 번이나 부인한 일생일대의 실수(요 18:15-24)는 그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른 새벽 바닷가에서 주님께서는 또 다시 베드로 대신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처음 만난 그 때 그리고 사도로 부름을 받던 추억을 되살리기를 바라셨는지 모릅니다. 즉 주님께서는 실패한 그 모습까지도 모두 감싸는 깊은 사랑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정답게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평소에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전에 주님과의 마지막 밤에도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가파스(ἀγαπας)’로 변함없는 신적인(divine) 사랑 또는 헌신적, 이타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이 사랑은 친구나 가족에 대한 사랑을 나타낼 때에 사용합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서는 과거 다른 제자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했던 과거의 맹세가 배반으로 인하여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서로 구분 없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단어로 대답한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베드로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과거의 잘못으로 인하여 감히 ‘아가파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필레오’라고 했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아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양떼를 인도하고 먹이고 돌보는 넓은 의미에서의 목양(牧羊)사역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이라는 말은 새로 개종한 초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보입니다. 즉 베드로가 맡아서 목회해야 할 신자들의 특성을 가르쳐주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에게 나약하고 자기를 보호할 능력이 없는 주님의 백성들을 목자의 심정으로 따뜻하게 돌봐 주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도 똑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에도 주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주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는 ‘어린양(초신자)’와 관련 되었지만 여기에서는 ‘큰 양’으로 치리(治理), 권징(勸懲) 등도 감당할 수 있는 신앙적으로 연륜이 깊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즉 주님께서는 모든 성도의 목양을 할 수 있는 사명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서 사랑을 ‘필레오(φιλέ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대로 해석을 하면 “너의 사랑은 진정 우정으로서의 사랑이기는 하단 말이냐?”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지나치게 단어를 구분하려는 의도라고 보기 때문에 역시 아가페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다고 봅니다.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서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를 깨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각오를 되새겼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귀한 사명을 죽기까지 감당하겠노라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미래에 대하여 예언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는 베드로가 장차 순교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약 27권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베드로 행전(Acts of Peter)'에는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의 박해시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처음에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베드로는 피신 도중에 주님을 만났는데, “네가 십자가를 회피하니 내가 다시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달리고자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즉시 회개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때에 감히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달릴 수가 없으니 거꾸로 달아달라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의 죽음이 꼭 십자가의 형벌을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목양 사명을 수행하다가 타의에 의해 강제적인 죽음을 당하는 순교를 말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처럼 주님을 위해 순교를 당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언적인 말씀을 마치신 후에는 “나를 따르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의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현재 예수님께서 자리를 떠나시면서 따라오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영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가신 길, 즉 구원 사역의 길을 따라오라는 뜻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 13:36에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을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가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라고 대답했는데, 그 말과 주님의 말씀과 연관이 되어 베드로는 주님의 일을 하도록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목회자가 되기도 하고, 선교사가 되기도 하고, 평신도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한 결 같이 주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느냐에 따라서 그 직분은 달라질 수 있지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베드로와 같은 사명을 받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순종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 뜻이 꺾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 방식을 버리고 주님의 방식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 뜻 버리고, 내 방식 버리고, 내 유한한 지식 버리고, 내 교만과 자존심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항상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올 해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주님께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내 생각, 내 방식, 내 지식, 내 교만, 내 자존심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바보가 되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게 하시려면 내가 바보가 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궁금해집니다. 말씀을 깨달아 알고 싶어집니다.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섬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교회가 궁금해집니다. 이런 성도를 어떻게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사랑받는 성도가 잘 되는 성도입니다. 그의 모든 삶의 부분들을 책임지고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hwp
0.04MB